토끼들의 섬
엘비라 나바로 지음, 엄지영 옮김 / 비채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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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감을 총동원해 독자를 악몽의 세계로 에워싸는 이야기들. 깜빡, 잠들었던가. 깜빡, 오래된 등에서 타는 냄새가 나던가. 쿵, 쓰러지는 소리를 들었던가. 어둠 너머로 새빨갛게 응시해오는 것, 그것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던가. 끼쳐오는 냄새는 어디에서 불어온 바람인가.

어디로 가야할지. 무엇을 생각해야 할지. 나는, 누구였더라? 땀에 젖은 이마와 메마른 입술, 텅 빈 눈으로 돌아본 곳엔 끝없는 '무'가 펼쳐져 있다. 그것의 다른 이름은 허무다. 공허다. 모든 것이다. 일상이다. 숨 쉴 틈도 없이 밀집되고 달라붙은 것이다. 너무도 익숙한 이름이다. 권태다. 낯섦이고 체취와 뒤섞인 숨결이다. 축축하게 젖어드는 것. 살그머니 다가오는 어둠. 도시의 불빛. 뒤엉킨 지도.

p.20 토끼들은 우선 날카로운 앞니로 새의 목덜미를 공격했다. 그러고 나면 떨리는 주둥이와 가는 수염이 눈 색깔과 똑같이 피로 빨갛게 물들었다. 얼마 되지도 않는 살점을 다 뜯고 나면, 녀석들은 마른 나뭇가지가 분질러지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한동안 뼈를 갉아 먹느라 여념이 없었다. 토끼들은 심지어 부리까지 깨끗이 먹어치웠다. 그런 다음, 털이 다시 하얗게 될 때까지 부지런히 몸을 단장했다.

p.34 어떤 식으로든 설명하고 싶다. 자신이 겪고 있는 과정의 흔적을 남기고 싶다. 하지만 왜 그래야 하는가? 여자는 속으로 중얼거린다. 말로는 충분하지 않은 걸까? 이제는 연필을 쥐고 있기조차 힘들다. 마치 연필로 무언가 쓰려는 것이 손이 아니라, 귀에 매달려 있는 발인 것처럼 말이다. 모든 일이 너무나 빠르게 벌어지고 있다.


무더운 낮과 마른 먼지가 날리는 땅, 짜고 비린 냄새를 풍기는 바닷바람 냄새가 가득한 곳의 시간이 담긴 글은 그곳의 풍취를 그대로 담아내기 마련인 걸까? 그림동화처럼 차락, 하는 소리와 함께 넘어가고 이어지는 듯한 11편의 작품을 모두 읽고 나면, 길고 긴 악몽의 끄트머리에 다다른 기분이 든다.

그곳은 탈출구인가? 아니다. 막다른 길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끝인가? 그 또한 아니다. 갑작스레 끊겨버린 길, 끝없이 펼쳐진 바다 앞 모래밭과도 같다. 산을 따라 굽이굽이 빽뺵하게 들어찬 지붕들의 지평선을 보는 것과도 같다. '갈 곳이 없다'는 말이 적절할 것이다.

p.37 주인이 비명을 지르며 밖으로 뛰쳐나간다. 여자도 그를 쫓아 달려간다. 여자는 그를 놀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히잡값을 치르려는 것뿐이다. 그러나 여자는 뛰어가는 중에 왜 남자를 뒤쫓는지조차 잊어버렸다. 어느 순간, 갑자기 남자가 먹잇감처럼 보인다. 그는 그레이하운드처럼 날씬하다. 하지만 여자는 그보다 더 빨리 달린다.

p.101 나는 지금 미셸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다. 아니, 내 평생 단 한 번도 그를 생각한 적이 없는 것 같다. 내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그는 내 기억에 조금도 남아 있 지 않을 것이다. 소와 양을 본 기억은 있다. 심지어 보도에 초록색 침을 뱉은 기억도 난다. 하지만 미셸은 전혀 기억 나지 않는다. 아무것도. 갑자기 그에게 소리 지르고 웃고 싶다. 그것은 무시무시하면서도 마음을 홀가분하게 하는 냉정함이다.


작가는 말한다. “외곽, 변두리, 경계… 내 관심사는 언제나 현실을 결정짓는 윤곽이 희미해지는 틈새에 있다”. 당신은 시선의 변두리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거리와 색을 가지고 선명하게 인식되는, '제대로 인식되는' 영역이 아니라 시선을 옮기고 고개를 돌려, 눈을 가늘게 뜨고 집중해야 알 수 있는 영역의 흐릿한 상이 머무는 곳 말이다.

이 책의 이야기들은 그 이미지들을 닮았다. 현실을 그대로 모사하지 못하는 것들. 아니, 틀렸다. 실체가 인식의 경계에 흘러들어오며 늘어지거나 일그러지고 얽히는 모습은,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아니, '인식하지' 못하는 세계의 진짜 모습일지 모른다.

p.236 나는 조개껍데기를 해양생물의 집이나 해변에 널린 장신구라기보다, 항상 해골로 생각해왔다. 다양한 조개껍데기와 소라고둥으로 만든 목걸이가 주렁주렁 걸린 해안 산책로 기념품 가게 또한 뼈를 파는 곳처럼 보였다. 저 낮은 납골당에 귀를 대고 있으면 소리가 들린다. 바닷소리가 아니라 연체 동물의 영혼, 그러니까 조개껍데기 안쪽 진주층 위를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영혼의 소리가.

p.266 마지막으로 온 메시지는 여자가 몇 달 동안 고민하던 생각과 딱 들어맞았다. 얼마 남지 않은 믿음이 사라지고, 이 게임을 계속하고 싶은 욕망마저 떨쳐버렸을 때, 메시지가 기적적으로 도착했다. 믿을 만하지 못한 연인의 마지막 약속 같았다. "다시는 안 그럴게." "기적과 점술은 실제로 존재합니다."


모르는 것이 아니다. 알지 못할 뿐이다. 알고 싶지 않기 때문에,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에, 초현실이라 불리는 극도의 현실. 각각의 이야기들은 모두 시공과 주제, 화자를 달리하나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범람, 혹은 침투하거나 스며들어오는 초현실적 세계라는 뿌리를 공유한다. 그것은 존재 자체로 불안이다.

인식 바깥의 세계와 뒤섞이는 경험은 차라리 오염, 부패, 환각... 다른 이름으로 불려 다시금 깊은 금 너머로 밀어내져야 안심할 수 있다고 믿어왔기 때문일까. 어쩌면, 비정형의 세계가 고스란히 되비추는 이 세계의 이면 때문일까. 뒤집혀 다리를 바둥대는 갑충, 벌어진 틈 사이로 살덩이를 날름대는 조개를 들여다 볼 때처럼.

독자들은 이 괴이하고 섬뜩한 세계에서 무엇을 마주하게 되는가. 더럽고 끔찍한 폭력의 세계의 발밑을 침식하는 무의식과 생경함의 공포, 초월보다는 원시에 가까운 것들에게서. 절망, 무력, 전복, 소외... 그 끝에서 다다를 곳은 어디인가. 누구도 도망칠 수 없다. 이 경계 없는 경계-바깥의 세계에서. 깜빡, 눈을 감았다 뜨면 그곳엔...

p.185 여자는 동시에 도처에 존재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 것처럼 그 꿈들을 바라보았다. 그렇다고 여자가 수천 개의 조각으로 깨어난 것은 아니었다. 여자는 자기 마음이 자신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단지 지엽적인 내용만 기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모든 꿈은 여자의 마음 속 어딘가에서 지금도 여전히 영화 필름처럼 돌아가고 있었다. 여자는 자기 꿈속으로 밀고 들어온 타인의 꿈에 의해 파멸되었다고 느끼기는커녕, 오히려 마음이 차분했다.


*도서제공: 비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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