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치-22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7
조지프 헬러 지음, 안정효 옮김 / 민음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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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요사리안은 부상을 당해 병원에 다시 입원한 후에 정신과 의사의 상담을 통해서 ‘미쳤다’는 진단을 공식적으로 받습니다만, 아주 어이없는 진행과정에 의해 그 대신 다른 군인이 자국으로 돌아가 버리고 맙니다. 

요사리안은 자신이 출격 할당량을 모두 채워도 할당량은 계속 늘어날 것이고, 다음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나간 출격에서 자신이 살아 돌아올 수 없을 가능성이 언제나 매우 높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자꾸만 출격을 강행하는 캐스카드 대령을 죽일 음모에 동의하기로 합니다. 그렇지만 출격 할당량을 코앞에 둔 동료, 그것도 음모를 제의한 동료들까지도 정작 음모를 실행할 생각은 없었고, 당연한 일로, 할당량은 점점 더 늘어납니다. 

일흔 한 번이나 출격한 요사리안은 네이틀리와 그의 친구들이 출격 나갔다가 죽고 난 이후로, 이제는 더 이상 출격하지 않기로 합니다. 지휘부는 요사리안을 처벌하고 싶었지만, 그가 충분한 할당량을 채웠고, 또 영웅이었기 때문에 -그러나 본질적으로 그를 처벌할 근거가 없었기 때문에- 처벌하지 못한 채 협박과 회유를 일삼습니다.  

네이틀리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요사리안을 살해하기 위해 쫓아다니던 네이틀리의 여자친구가 로마에서 쫓겨났다는 소식을 듣고, 요사리안은 로마로 달려갑니다. 거기에서 그는 그녀들을 내쫓은 것의 정체가 바로, 캐치-22인 것을 알게 됩니다. 존재하지도 않으면서, 존재한다고 믿어지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극성맞게 사람들을 억압하는 캐치-22의 부조리함을, 요사리안은 점점 더 치열하게 느끼는 한편, 

네이틀리의 꼬마 여동생이 아는 사람 하나도 없는 도시의 거리로 내몰린 것을 깨닫고는, 그녀를 구하기로 합니다. 그녀를 찾아다니는 동안 요사리안은 로마라는 도시가 그늘에 숨겨둔 극악한 폭력을 목격합니다. 그리고 이내 하녀를 강간하고는 떨어뜨려 죽인 알피와 만나게 됩니다. 그렇지만 헌병은 그들이 있는 방에 들어와 알피에게 사과하고는, 출장증 없이 돌아다녔다는 이유로 요사리안을 체포해 갑니다. 체포된 요사리안은 캐스카드 대령에게 끌려갔고, 그는 요사리안을 귀국시키기로 했다는 말을 하지요. 

그러나 그 말은 캐치-22만큼이나 함정을 가득 담고 있는 말이었습니다. 캐스카드 대령과 콘 중령은 교묘한 말장난으로 그들 자신을 국가와 동일시 한 후에, 그들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치지 않는 행위는 모두 국가에 반하는 행위라고 단정 짓습니다. 요사리안을 ‘반국가적인 인물’로 낙인찍기 위한 어수룩한 수작이었던 것이지요. 

이 허튼 수작의 진심은 요사리안을 이용해 장군과 대령이 되고 싶은 그들의 욕망이었습니다. 요사리안은 자신의 안위를 위해 그들과 합의해 친구가 되기로 했고, 그들은 그를 귀국시켜주기로 합니다. 즐겁게 돌아 나오는 길에 요사리안은, 네이틀리의 여자친구가 휘두른 칼에 상처를 입고 정신을 쓰러집니다. 

병원에서 어느 정도 회복한 요사리안은 굴욕적인 협의에 따르지 않기로 합니다. 죽은 줄 알았던 오르가 초인적인 인내로 스웨덴에 가닿은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소식을 전해준 군목과 함께 요사리안은 ‘끊임없는 인내’로 자신의 목숨과 존엄을 지켜 마침내 승리하고 말겠다는 또 다른 목적을 향해 나가기로 합니다. 군목은 군에 남아 자신을 짓누르던 모든 사람들을 향해 정당한 분노의 주먹을 날리기로 하고, 요사리안은 오르를 따라 스웨덴으로 가기로 한 것이지요.  

유쾌한 탈주를 꿈꾸는 요사리안이 네이틀리의 여자친구가 휘두른 칼을 피해 달아나면서 작품은 끝이 납니다. 

♨ 조각 퍼즐 같은 이중 구조…? 

이 작품은 사람의 이름 혹은 지명을 통해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이러한 구조는 마치 조각 퍼즐과 같습니다.  

우선 퍼즐의 조각은 전체적인 맥락에서 이야기 구조를 갖게 됩니다. 즉 두 개의 조각이 같은 모양의 선을 공유하면서 서로 아귀를 맞춰가면서 전체의 구조를 이루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 작품에서 ‘퍼즐 조각의 전체적인 맥락’의 역할을 하는 것은 사람의 이름 혹은 지명으로 진행되는 커다란 이야기입니다. 한 사람의 이름 혹은 한 곳의 이름으로 진행되는 이야기가 하나의 퍼즐 조각을 이루게 되는 것이지요. 이 조각의 선을 이루는 것은 이 전 조각의 선이 끝나는 부분에서 언급된 사람 혹은 장소 내지 사건과 관계된 부분입니다. 즉, 그 논리가 퍼즐과 퍼즐을 이어주는 ‘같은 모양의 선’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 커다란 이야기를 통해서 독자들은 이야기의 틀을 잡게 됩니다. 

그런데 퍼즐의 조각은 전체적인 모양만 갖는 것이 아니라 그 조각 안에 그려진 그림을 통해서 또 하나의 이야기를 갖게 됩니다. 즉 두 개의 조각이 공유하는 선을 통해서 전체적인 이야기가 맞아 떨어져 나간다면, 퍼즐 조각 안에 그려진 그림은 전체적인 이야기 맥락 안에서 더 깊이 들어가 세부적인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부연하자면 이야기 구조를 통해 전체 맥락을 맞춰 가는 퍼즐의 조각이 ‘모양’을 맞추는 것이었다면, 여기 퍼즐 조각에 그려진 그림은 전체 맥락이라는 커다란 틀 안에서 진행되는 세부적인 이야기를 이끌어가게 된다는 말입니다. 

정리하자면, 퍼즐의 모양을 통해 전체적인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구조가 ‘공간’에 대한 것-사람 혹은 지명을 통해서 어떤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그림-이라면, 퍼즐에 그려진 그림을 통해서는 이야기가 진행되는 과정, 즉 ‘시간’을 통해서 이야기를 이끌어나간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의 사건, 그러니까 요사리안의 천막에서 죽은 남자에 대한 사건을 보자면, 애초에 그 남자에 대한 이야기는 공간적으로 여러 사람의 입을 통해서 등장하게 됩니다. 그 남자와 관련되었거나, 그 남자를 직접 보았거나 한 인물들이 그 남자에 대한 언급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때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이 남자에 대한 이야기는 시간적으로 뒤섞여 있습니다. 그들은 공간적으로 관계적으로 죽은 남자와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이야기 당시에 그 사람이 속한 시간 하에서 그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조각 A의 이야기’, ‘조각 B의 이야기’…. 하는 식으로 나오는 전체적인 맥락 안에서의 이야기이지요. 

그런데 이미 앞에서 여러 번 언급되었지만 한 번도 <진행>된 적이 없었던 죽은 남자에 관한 이야기가, 그 남자를 행정적으로 처리했어야 했으나 그러지 못했던 인물(조각 C)이 나오면서 비로소 <진행>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죽은) 그 남자가 어떻게 그곳에 가서, 어떤 과정을 통해 죽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지요. 이 때 이 이야기는 다른 인물들에게 알려지지 않거나 비밀로 부쳐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어쨌거나 그들은 전쟁 중이니 당연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혹은 전쟁을 빌미로 잘못된 일을 암암리에, 공공연하게 덮는 것일 수도 있지요. 

♨ 혹은 편집되지 않은 채 촬영된 순서대로 돌아가는 필름…? 

여러 곳에서 여러 사람이 언급을 하는 어떤 인물, 어떤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데, 그 당시에는 아직 진행되지 않았거나, 혹은 이미 진행되어 결과가 나타나 버렸거나 한 상태로 등장합니다. 그러다가 비로소 그 열쇠를 쥐고 있는 인물이 나오면 언급된 내용의 전모가 온전한 시간 순서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영화를 상황과 여건이 되는 대로 찍어 놓기만 한 채, 편집되기 이전의 필름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 같습니다.  

영화는 일단 장소나 스케줄에 따라서 ‘어떤 장면 A’을 찍게 됩니다. 그런데 그 장면에서 ‘어떤 사건 B’는, 이야기 속에서 시간적으로 ‘어떤 장면 A’보다도 선행할 수도 있고, 후행할 수도 있으며, 혹은 감추어졌거나 알려지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배우들은 이미 그러한 상황을 숙지한 상태로 그 장면에 맞는 역할을 연기하게 됩니다. 

그 필름을 그저 순서대로 보는 사람은 ‘어떤 사건 B’의 전모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저 그 사건의 전조라든가 그 사건의 결과나 파장을 볼 뿐인 것이지요. 그러다가 ‘어떤 사건 B’를 찍은 필름을 만나게 되면, 그 때에야 비로소 그 사건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전에 보았던 ‘어떤 장면 A’ 속에서 가졌던 ‘어떤 사건 B’의 의미를 뒤늦게 알아차리고, 그 의미에 따라 그 장면의 의미를 다시금 재구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 퍼즐 혹은 필름이 담고 있는 ‘정신없는 구조’가 폭로하는 것

장면과 장면이 품고 있는 상황이 매우 재미있고, 거기에서 드러나는 캐릭터들의 성격과 재담도 상당히 뛰어나게 구현/구사되고 있기 때문에, 장면과 장면을 읽는 데에는 커다란 부담이 없습니다. 다만 뒤늦게 밝혀지거나 언급되는 내용을 통해서 이전 장면과의 관계나 성격을 얽는 것이 조금 부담스러울 뿐이지요. 그렇지만 이 부담스러움이야말로 이 작품이 지니고 있는 개성과 본질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전쟁’이라는 것이 국가가 선정하는 대로 ‘국가라는 우리의 이익집단을 위해 어떤 숭고한 희생을 감행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이라는 것은 ‘참으로 두서없고’, ‘논리라고는 조금도 없으며’, ‘소수 인간의 추악한 욕망을 채우기 위해 다수의 인간이 ‘도무지 영문도 모른 채’ 스스로의 생명을 희생하거나 희생할 것을 강요당하고 있는 부조리극’이라는 사실을, 이 작품은 폭로하고 싶은 것입니다. 아니 폭로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부조리를 ‘체험’시키고 싶은 것에 가까운 지도 모르겠습니다.




♨ 캐치-22 : 제 잇속을 차리기 위해 사람들이 빚어 놓은 절대 권력

작품 초반에 언급되는 ‘캐치-22’는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전쟁이라는 과업을 수행하리오’라는 전제 하에, 멀쩡한 사람들로 하여금 (죽기 전에는) ‘절대로’ 전쟁에서 빠져나갈 수 없도록 만드는 규율로 존재했습니다. 그런데 작품 후반에 이르면, 로마에 있는 창녀들을 몰아내는 군인들이 또다시 ‘캐치-22’를 언급하는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이 때 등장하는 ‘캐치-22’는 이전에 등장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업그레이드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잠깐 언급된 부분을 인용해 보도록 하지요. 

“캐치-22요. 캐치-22에서 밝히는 바로는 우리들이 말릴 수 없는 것은 무엇이나 다 할 수 있는 권리가 그들이게 있다오.”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시는 거예요?” 요사리안은 당황하고 화가 나서 그녀에게 소리쳤다. “그것이 캐치-22인 줄은 어떻게 알았나요? 그것이 캐치-22라고 도대체 누가 얘기를 하던가요?”
“딱딱하고 하얀 모자를 쓰고 몽둥이를 든 군인들요. 여자들은 울고 있었다오. ‘우리가 뭘 잘못했나요?’ 하고 그들이 물었죠. 남자들은 아니라고 그러면서 몽둥이 끝으로 그들을 문 밖으로 밀어냈다오. ‘그렇다면 왜 우릴 몰아내나요?’ 여자들이 물었어요, ‘캐치-22요.’ 남자들이 말했죠. ‘무슨 권리로 이래요?’ 여자들이 물었어요. ‘캐치-22요.’ 남자들이 말했고요. 그들이 자꾸만 하는 얘기라곤 ‘캐치-22, 캐치-22’뿐이었다오. 캐치-22라니, 그게 대체 무슨 뜻인가요? 캐치-22가 뭐예요?”
“그것을 당신들한테 보여 주지 않던가요?” 분노와 실망을 느끼며 오락가락하던 요사리안이 물었다. “그것을 읽어달라고 하지도 않으셨어요?”
“그들은 우리한테 캐치-22를 보여 줄 필요가 없다오.” 늙은 여인이 대답했다. “그럴 필요가 없다고 법에 정해져 있으니까요.”
“그럴 필요가 없다고 어떤 법이 그래요?”
“캐치-22요.”
“아, 염병할!” 요사리안은 고통스럽게 소리를 질렀다. “그런 건 아마 있지도 않았을 거예요,”
 

이제는 그것이, ‘우리들이 말릴 수 없는 것은 모든지 할 수 있도록 규정되어 있는 법률’로서 등장하게 된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지경에 이르면 누구도 ‘캐치-22’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는 없지요. <그것이 무엇인지도, 또 무엇에 근거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명령하는 것은, 그 명령의 권한으로, 누구도 어길 수 없다.>는 절대적인 경지의 ‘폭-권력’이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지닌 부조리함은, 논리적 모순이라는 위태로우면서도 공고한 원리에 기반하고 있던 초반의 그것을 훌쩍 뛰어넘습니다. 너무나 말도 안 되는 것이 너무나 말이 잘 되는 양 행세하는, <숨 막히는 경지>를, 독자는 온몸으로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가만히 보면, 그들이 주장하는 캐치-22의 논리는 ‘국가’를 위한 희생을 강요하는 논리와 기가 막히게 닮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국가와 자기 자신을 동일시 해서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치라고 요구하는 파렴치한 캐스카드 대령과 콘 중령의 주장이 터무니 없이 들리지만도 않는 것이지요. 그러고 보면 이 작품이, 캐치-22라는 명백한 논리적 모순을 통해서 드러내고자 한 것은, 

“국가 혹은 집단을 위한 맹목적인 희생은 결국 소수의 탐욕스러운 배를 불려줄 뿐이다. 인간은 그러한 ‘있지도 않은 허상’을 거부하고 그 자신의 자존을 위해, 행복을 위해 살 권리가 있다.”라는 주장은 아니었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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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와일드 작품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22
오스카 와일드 지음, 정영목 옮김 / 민음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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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왕자> - 루비를 들고 있고 사파이어 눈동자를 갖고 있으며 금박을 입은 ‘행복한 왕자 동상’은 제비와 인연을 맺게 됩니다. 두 눈을 잃은 그를 위해 제비가 이집트 등지의 신기한 이야기를 해주자, 왕자는 제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나한테 놀라운 것들을 이야기해 주는구나. 하지만 무엇보다 놀라운 건 저 사람들이 겪는 고통이란다. 저 고통보다 큰 수수께끼는 없어. 내 도시 위를 날아다녀 보렴, 귀여운 제비야. 그리고 거기서 본 걸 나한테 이야기해 줘.” 

일견 이 작품은 우화적으로 ‘인간이 갖추어야 할 도덕성과 진정한 행복’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도 같습니다. 하여 교과서처럼 고루하기만 할 뿐 재미도 없고 전형적이기만 오지게 전형적인 이야기로 보일 수 있는 면도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제비와 왕자가 다시금 재회하는 장면을 보면서 느끼게 되는 ‘씁쓸하면서도 뜨거워지는 감정’의 묘한 결합은, 이 작품을 단순히 ‘도덕적인 우화’로 치부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 왕자가 도시를 내려다보며 고통스러워한 까닭이 무엇인지, 왕자와 제비가 스스로를 희생하여 얻은 것이 무엇인지가 동시적이고 복합적으로 엄습하기 때문입니다. 

<아서 새빌 경의 범죄> - 운명이 그에게 죄를 뒤집어씌운 걸까요, 아니면 그가 운명에게 죄를 뒤집어씌운 걸까요. ‘살인’이라는 한 마디가, 아서 새빌 경의 삶 속으로, 뜬금없고 괴상한 양상을 하고 파고듭니다. 그 단어는 손톱 밑에 끼어 계속 통증을 유발시키는 이물질같이, 그의 삶에 끼어들어 아서 새빌 경을 고통스럽게 만듭니다. 하여, 그는 ‘당당하고’도 ‘용감하게’ 그의 고통과 대면해 승리를 쟁취합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정말 어이없는 결론이지만, 이토록 고결하고 순수한 캐릭터가 나타나 그러한 결론에 속절없이 다다르는 것을 볼 때마다, 작가의 역량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분명 그 결론이 어처구니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그 캐릭터에게 그 결론은 합리적이다 못해 타당하다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게 되니 말입니다. 생각할수록, 참, 괴상한 메커니즘입니다. 

<비밀 없는 스핑크스> - 몇 장 되지 않는 이야기 속에 ‘특정 캐릭터’가 내밀하게 갖고 있는 비밀에 대해서 생각해 보도록 만듭니다. 어떤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 갖고 있는 최대의 비밀이 ‘바로 그것’이었다는 점이 다소 황당하기도 하지만, 어떤 면에서 참 슬프기도 해서, ‘이건 뭥미? 헐~’ 하고 넘겨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 어떤 은밀한 수수께끼도 없다는 건, 참 외로운 일이니까 말입니다. 

<캔터빌의 유령> -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어?!” 이 소설을 읽고 있는 도중에 절로 튀어나온 말입니다. 물론, 이 말은 캔터빌의 유령이 했을 법한 말이기도 하지요. 

물질주의적이고 실용주의적이며 유럽의 전통적인 것을 약간은 ‘불필요한 것들’로 치부하는 듯한 미국 목사 가족이, 유령이 살고 있는 캔터빌의 저택으로 이사 오면서 생기는 다양한 일들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유령은 그 자신의 본분을 다하기 위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더러는 죽음까지 이르게도 만들어왔습니다. 역사적인 맥락을 갖고 있는 다양한 분장을 동원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목사의 가족들은 미국의 실용적인 용품들을 통해 유령을 당황하게 만듭니다. 또 쌍둥이 꼬마들의 장난은 유령으로 하여금 깊은 실의에 빠지도록 만듭니다. 

사실 유령은 사악한 캐릭터였습니다. 아내를 죽이기도 했지요. 그렇지만 읽는 내내 얄미운 미국 목사 가족 때문에 유령이 불쌍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너무나 애처로워서, 미국 가족이 좀 겁에 질려주었으면 속이 다 시원하겠다! 라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생각보다 착한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권위라는 권위는 다 잃은 불쌍한 유령에게 평화가 깃들게 되는 것이지요. 매우 흥미롭고, 웃기기도 하며, 한편으로는 애처롭고, 다른 한편으로는 풍자 때문에 키득거리게도 되는, 놀라운 작품입니다. 고전적이면서도, 절대로 따분하지 않습니다. 

<모범적인 백만장자> - 'millionaire models'와 'model millionaires'를 두고 말장난을 한다고 치면, 이런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요? 그렇지만 이 작품은 말장난에서 나온 재미있는 이야기로 치기에는,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너무 많습니다. 

무엇보다도 가난하지만 죽도록 아름답고, 성품 또한 온화하고 고결하기 짝이 없어, 그 자신은 전차 대신 걸어서 다닐지언정 모델로서 1실링을 버는 가난하고 늙은 거지 노인에게 자신의 차비인 금화 한 닢을 내미는 데 주저하지 않을 지경입니다. 그럼에도 그를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속에는 어떤 우월감이라든지 선행에 대한 의식이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비극적인 운명에 대한, 처지에 대한 안타까움만이 느껴질 뿐입니다. 그 점이 바로 휴기를 더욱 고상하게 만드는 요인이 아닐까 합니다. 게다가 노인의 정체를 알게 되었을 때 화를 내기도 하고 부끄러워하기도 하며 이내 정중하고도 진심어린 사과를 하는 것을 볼 때,  

백만장자의 변덕으로 거지 분장을 하고 있던 남작이, 휴기에게 반한 것은 자연스럽고도 당연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모델 백만장자였던 이 노인 역시 백만장자 모델로서 전혀 부족함이 없어 보입니다. 그 사이에서 그들을 맺어주는 역할을 하게 되는 예술가 친구도 매우 흥미롭습니다. 사연을 알고 나서 호탕하게 웃어대는 그 호방함도 시원시원하고 말입니다. 

단순한 이야기를 단순한 이야기로 그치지 않게 해주는 것은, 바로 이 캐릭터들의 생생함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아, 정말, 예뻐요, 예뻐.  

<살로메> - 작품을 읽기도 전에 접하게 되는 삽화 때문일까요, 읽는 내내 그로테스크한 분위기에 압도당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분위기는 온통 음산하고, 무언가 불길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으며, 죽음의 신이 옷자락을 풀럭거리며 다니는 듯합니다. 

헤롯의 조카이자, 현재 헤롯의 아내인 헤로디아의 딸인 살로메는 자신을 야릇하게 바라보는 헤롯왕 때문에 연회장에서 빠져 나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우물에 갇힌 예언자 요카난을 만나게 됩니다. 그녀는 그에게 사랑을 고백하지만, 요카난은 그녀를 죄악과 동일시하여 피합니다. 그녀는 그에게 반드시 그 입술에 입을 맞추고 말겠다고, 이야기 합니다. 애초에 부탁이었던 그녀의 그 ‘조름’은 반복을 통해 반드시 실현시키고야 말겠다는 무서운 저주처럼 들립니다. 그리고 마침내 헤롯이 그녀에게 춤을 춰달라고 부탁했을 때,  

요카난의 머리는, 이미 은쟁반 위에 올려진 것과 다름없었지요. 

성경에서 읽은 바 있는 매우 익숙한 이야기입니다만, 이 작품 속에서의 요카난은 성경 속 예언자 세례 요한이 아니라 다른 캐릭터로 느껴집니다. 뭐랄까…… 살로메에게 그러지 말라고(사랑을 고백하지 말라고), 저리 가라고 말할 때의 그 말투가 마치, 거룩한 성자나 예언자의 그것이 아니라 연약하고 겁 많은, 그래서 조금은 비겁하기도 한 연인의 그것 같이 느껴진다고나 할까요. 

살로메는 매우 창백한 얼굴을 하고 나타나는데, 이 창백한 얼굴은 처녀의 아름다움을 갖고 있는 달과 유사하게 그려집니다. 그녀를 사랑하는 근위대장은, 달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그녀를 비유에 끌어들이기도 하지요. 하여, 이 작품에서 ‘달’과 ‘살로메’는 아름답고도 불길한 존재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고 보아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달에게서, 헤로디아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시종일관 ‘이상한’ 모습을 발견합니다. 죽음의 그림자를 읽는 것이지요. 

작품 초반에 묘사된 대로 죽음을 부르는 달은, 살로메 자신이었고, 하여 그녀는 자신을 사랑하던 근위대장과 자신이 사랑하게 된 요카난의 죽음을 야기합니다. 그녀는, 두 사람의 피 웅덩이 위에, 여신처럼 맨발을 듣고 선 것이지요.  

특히 작품 후반에서 요카난의 입술에다 대고 사랑과 비극을 읊는 살로메의 고백은, 연약하고 겁 많은 연인을 폭력적으로 쟁취해낸다는 점에서 어딘지 모르게 불경스러운 에로틱함을 풍기는 것 같습니다. 넘쳐흐르는 ‘피의 끈적거림’을 ‘체액의 비릿한 끈적거림’으로 바꾸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헤롯의 ‘마지막 처단’은, 살로메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 

살로메의 목소리 아! 나는 당신에게 입을 맞추었어. 요카난, 당신 입에 내 입을 맞추었어. 당신 입술에서는 쓴 맛이 나네. 피의 맛인가? ……아니, 어쩌면 사랑의 맛일지도 몰라……. 사람들은 사랑에서 쓴 맛이 난다고 하지……. 하지만 무슨 상관인가? 무슨 상관인가? 나는 당신에게 입을 맞추었는데. 요카난, 당신의 입에 내 입을 맞추었는데. 

달빛은 구원처럼 내려와 그녀를 비춥니다. 

헤롯이 더 이상 그녀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이미 그녀는 이렇게 도발적이고 에로틱한데 말입니다. 

<진지해지는 것의 중요성> - 모범적인 백만장자에서도 언어유희에 기반을 둔 작품 구성이 보였습니다만, 이 작품만큼 언어유희와 작품이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작품은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어니스트라는 이름을 두고 벌어지는 희극은 상류 사회에 대한 풍자를 기본으로 합니다. 허례와 허식에 쌓여서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사람들에 대하여 한 방 먹이는 것이지요. 물론 그 한 방의 주체는 진실함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니, 이 경우에 있어서는 진지해지는 것이라고 해야겠군요. 

똑같이 반복되는 행위들이 갖고 있는 코믹함과 희극성, 그리고 그 저변에 흐르는 풍자성은 작품을 매우 재미있게 해줍니다. (회사에서 읽는 게 아니었으면, 떠나가라고 깔깔거리며 봤을 겁니다. 아, 회사에서 읽고 있는 게 참 안타깝네요.) 그리고 극 말미에 이르러 잭과 앨저넌이라는 남자들이 왜 그렇게 똑같은 행위를 반복했는지를 알게 해주는 심리적인 근거가 등장하게 되면, 행복은, 이제 클라이맥스를 이룹니다. 정말 유쾌하고 재미있는 작품입니다. 비록 좀 짓궂기는 하지만, 사랑스럽기도 하고 말이죠. 


+++ “신고할 것이라고는 내 천재성밖에 없다”는 말이 그의 말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에 대한 설명이라고는 분명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과연 이 작품들이 19세기 작품들이 맞나 싶을 정도로, 세련되고 풍부한 블랙코미디 요소를 품고 있으니 말입니다. 두고두고 읽어도, 두고두고 재미있을 작품입니다. 

오스카 와일드,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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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2
켄 키지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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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콤바인 하나.

화자인 브롬든 추장이 콤바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정신병원으로 대표되는 거대한 사회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떤 질서나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개인들을 억압하고, 그 질서나 목적에 우겨 넣는 폭력을 행사하는 주체로서의 콤바인은, 정신병원에서 랫치드 수간호사로 대표됩니다. 그녀는 군인다운 엄격함으로 병동을 지배하고,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모든 세력을 ‘웃는 얼굴’로 짓밟으며 군림합니다. 하여, 병동의 모든 환자들과 간호사들, 직원들, 심지어는 의사들까지도 그녀를 두려워합니다. 그녀에게 대들었다가는 전두엽이 제거되어 식물인간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지옥 같은 이곳에, 철모르는 한 마리 새가 날아듭니다. 노동형을 선고받았으나 일이 고됐으므로, 맥머피가 잔머리를 굴려 정신병동으로 기어들어온 것이었지요. 하지만 병원은 만만하지가 않았습니다. 수간호사는 악랄하게 환자들을 괴롭히고 있었고, 그에게까지 그러한 굴종을 요구하는 손길을 내밀고 있었습니다. 하여, 맥머피는, 자유로운 영혼으로 존재하기 위하여, 굴종에 길들여진 환자들을 들쑤시기 시작합니다. 수간호사와 전면전을 선언한 것입니다. 비록 고통스러운 시간들이 있었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자신이 맡은 역할을 해냅니다. 

수간호사가 그 자신의 퇴원 여부를 쥐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 말입니다. 현실적으로 그녀가 그러한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맥머피는,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영민한 사람 특유의 실용적인 노선을 택하게 됩니다. 수간호사의 심기를 건들지 않기로 한 것이지요. 하지만 콤바인은, 그러니까 일단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억압자인 수간호사는 그를 내버려두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당했던 일들을 되갚아주겠다고……, 뒤끝 작렬하는 모습을 드러낸 것이지요. 여기에서, 또 하나의 콤바인이 은밀하게 맥머피의 등을 떠밀기 시작합니다. 

2. 콤바인 둘.

바로 억압당하고 있었던 환자들이, 바로, 그 숨겨진 콤바인의 역할을 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맥머피가 오기 전까지는 환자들은 공동체라고 할 만한 것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늦잠을 자기 위해서라면 동료 환자의 치부를 고발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방식은 수간호사가 환자들을 보다 효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방식으로 차츰 수간호사의 규율에 길들여졌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 길들여짐은, 맥머피가 실용적인 노선을 택했을 때 은밀한 힘을 발휘하기 시작합니다. 

맥머피로 하여금, 수간호사를 조롱하고, 그녀에게 대항하게 만든 것은 표면적으로 환자들이 아닙니다만, 어쩔 수 없이 환자들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콤바인은 사회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동원되는 억압인데, 이제 환자들이 맥머피를 중심으로 한, 그러니까 맥머피를 우두머리로 한 하나의 사회를 이루게 되었기 때문에, 맥머피는 불가피하게 환자들로부터 우두머리로서의 역할을 암묵적으로 강요받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맥머피는, 앞에는 수간호사를 위시한 사회적 콤바인이, 뒤에는 환자들을 기반으로 한 공동체적 콤바인이 팽팽하게 대치하는 그 가운데 홀로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낚시여행을 갈 때나 빌리에게 파티를 열어줄 때나 맥머피가 보여준 피곤하고도 지친 모습을 이해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어줍니다. 그는, 애초에 그가 도발하기는 했지만 책임질 생각은 별로 없었던 일에 말려들어, 이제는 도망갈 구멍도 없고 또 그 자신도 지치고 길들여져 도망갈 의지도 없는 상황에 갇히고 말았으니까 말입니다. 

3. 고래 싸움에서 살아남은 새우.

빌리의 죽음은, 전면에 드러났던 콤바인과 후면에 내재하고 있던 콤바인의 정면충돌을 불러옵니다. 두 콤바인은, 어쩌면 질서 유지 때문에, 또 어쩌면 두 콤바인을 대표하고 있는 사람들의 자존심 아닌 자존심 때문에, 서로가 치유될 수 없는 상처를 입을 때까지 충돌합니다. 그 결과 수간호사는 이전에 갖고 있던 뻔뻔한 권력을 상실하고, 맥머피는 존엄한 인간으로서 살아갈 권리를 박탈당하고 맙니다. 두 고래가 충돌했고, 두 고래 모두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나가떨어진 것입니다. 

여기에서 살아남은 것은, 귀머거리와 벙어리로 무시당하고 있다가 맥머피의 통찰에 의해 인간과 인디언으로서의 존엄을 되찾은 새우, 브롬든 추장입니다. 그는 두 권력이 정면충돌하는 장면을 생생하게 목격한 이후에, 인간존재의 존엄함이 억압적인 권력에 유린당하는 것을 사전에 막고, 그 자신의 자유를 위해 병원을 탈출합니다. 새우의 등이 터지기는 했지만, 새우는 죽지 않았고, 마치 변태한 파충류처럼, 더욱 성숙한 모습으로 되살아납니다. 

++ 아,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릅니다. 이 작품을 읽다가 자려고 누웠을 때, 잠이 든 것도, 그렇다고 안 든 것도 아닌 상태에서 괴롭게 몸부림 쳤고, 마침내 간신히 잠들었을 때에는 병동 같은 곳에 갇혀 수간호사 같은 억압자에게 고통 받는 무시무시한 꿈까지 꾸었습니다. 하여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것이 꿈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선뜻 이 책에 손이 가지 않았습니다. - 그러고 있는 저 자신을 보고 있자니, 브롬든의 이 말이 절로 떠올랐습니다. 

“어쩌면 여러분은 내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주절거린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너무 무시무시한 이야기라서 믿기지 않을 것이다. 너무 끔찍해서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으리라. 하지만 제발 내 말을 믿어 주기 바란다. 나 자신도 완벽하게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이것은 사실이다.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일이라고 할지라도 엄연한 사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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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3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56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음, 김연경 옮김 / 민음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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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편 소년들>은 퇴역한 2등 대위의 아들-알료샤의 손가락을 깨문 소년이죠-인 일류샤 스네기료프의 친한 친구였으며 2등 대위를 수세미라고 놀리다가 일류샤에게 자상을 입고 말았던 콜랴 크라소트킨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집을 보고 있는 그는 하녀가 얼른 돌아오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디 갈 데가 있었던 것이지요. 

그녀가 돌아오자 콜랴는 곧 스무로프를 데리고 일류샤의 집으로 향합니다, 그의 개 페레즈본을 데리고 말이죠. 정작 집 앞에 다다른 콜랴는 스무로프를 들여보내 알료샤를 불러냅니다. 두 사람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우정을 쌓아갑니다. 어쨌거나 일류샤가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콜랴는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콜랴는 일류샤가 죽였으리라고 추측되는 개와 똑같은 개를 데리고서, 일류샤가 핀을 먹인 그 개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거짓말로) 알려줍니다. 비록 그런다고 해서 다 죽어가는 일류샤가 회복될 수는 없었지만, 일류샤로서는 마음의 짐도 덜고 무엇보다도 그리웠던 친구를 되찾게 된 것에 커다란 기쁨을 느낍니다. 이들이 흥겹게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의사 하나가 이들을 방문합니다. 그는 매우 거들먹거리는 인물로서 카체리나 이바노브나가 이리로 보낸 것이었지요. 그런 캐릭터답게 매우 허황된 소견만 내리고는 도망치듯 그곳을 떠납다. 콜랴도 집으로 돌아갔고, 

<11편 이반 표도로비치 형제>가 시작하자마자, 얄료샤도 서둘러 그루셴카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녀가 그를 불렀던 것이지요. 그녀는 그 날도 미챠와 싸우고 왔다면서 골을 내고 있었습니다. 다른 이야기를 떠나 얄료샤는 이반이 미챠를 방문했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라고 맙니다. 만약 그가 그들의 비밀을 알게 된다면 그녀에게도 알려주리라고 약속하고서 알료샤는 급하게 호흘라코바 부인의 집으로 향합니다. 

그녀는 발에 병이 났지요. 그 발을 예찬하는 시를 썼다가 라키친은 그녀의 집에 출입할 수 없는 신세가 되었고, 반면 페르호친은 그녀의 숭배를 받는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히스테릭한 숱한 말 중에서 알료샤를 놀랍게 한 것은 이반이 리즈를 방문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페르호친이 오자 알료샤는 그녀에게서 놓여나 리즈에게 갑니다. 리즈도 반은 정신이 나가서 온갖 헛소리로 듣는 사람을 괴롭히더니만 알료샤의 손에 이반에게 줄 쪽지를 건네줍니다. 결국 알료샤를 메신저로 삼은 셈이었지요. 

알료샤는 미챠에게 도착했을 때 라키친은 막 감옥에서 떠나는 길이었습니다. 미챠는 애기에 대한 이야기를 비롯해 내밀한 이야기를 한 후 이반이 자신을 탈출시키려는 계획을 짜고 있으며 제안도 아니고 명령의 수준으로 그에게 강요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려줍니다. 그리고 이반은 자신이 살인했다는 사실을 믿고 있다는 말도 덧붙이면서 미챠는 알료샤에게 자신이 아버지를 죽였다고 생각하느냐고 묻습니다. 알료샤는 한 순간도 그를 살인자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말로 답하지요. 

알료샤는 미챠와 헤어지고 이반에게 가는 길에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의 집에 들릅니다. 그런데 이반 역시 그녀의 집에서 막 나오는 길이었지요. 세 사람은 같이 집으로 들어갑니다. 카체리나와 이반은 여전히 싸우고 있었고, 알료샤가 없는 사이 퍽 가까운 사이가 된 듯도 했습니다. 알료샤는 집에서 나가는 이반을 따라 나섭니다. 

냉담한 이반은 리즈의 추파에 혐오감을 드러내고, 사랑하지도 않는 카체리나 때문에 지겨워합니다. 자신이 그녀를 떠나면 그녀가 공판에서 미챠를 끝장낼 것이 틀림없었던 탓에 그는 그녀를 거절할 수가 없었지요. 두 사람의 대화는 살인자가 누구냐 하는 대목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알료샤는 이반에게 ‘형은 살인자가 아니야’라고 말해주는데, 이 형은 미챠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알료샤는 자기도 모르게 이반이 자신을 살인자로 여겨 괴로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이반이 살인자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해줍니다. 이반의 알쏭달쏭한 반항과 알료샤의 수도사 놀이에 지긋지긋해진 그들은 헤어져 각자의 집으로 갑니다. 

집 앞에 이르러서 이반은 곧 길을 틀어 스메르쟈코프의 집으로 가기로 합니다. 

이반은 모스크바에서 돌아와 스메르쟈코프가 있는 병원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의사는 그가 정신이 이상하다고도 했고, 간질이 거짓으로 일어날 수 있느냐는 이반의 물음에 그는 간질이 확실하며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는 말까지 합니다. 이반은 스메르쟈코프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눕니다. 스메르쟈코프는 놀랍게도 ‘그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도, 또 자신이 그렇게나 암시를 줬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죽음을 바랐다는 듯이 떠나버렸다’면서 이반에게 화살을 돌립니다. 자신은 이반이 ‘아버지의 죽음을 기대하고 있었다,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았을 뿐이지’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뜻을 전합니다. 

병원에서 나와 헤매며 이반은 알료샤를 만나 ‘자신이 아버지의 죽음을 기대하고 있는 거 같더냐’고 묻습니다. 알료샤는 그 당시에는 그렇게 생각했다고 고백합니다. 다시 스메르쟈코프를 찾아간 이반은 다소 굴욕적인 대접을 받으면서 다시금 ‘그저 입이나 다물고 있는 게 낫다,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거고, 자신을 무고하는 것일 뿐이며, 결국 웃음거리가 되는 것은 이반이다’라는 말로 설득당해 나옵니다. 이반은 ‘만약 스메르쟈코프가 아버지를 죽였다면, 자신도 공범으로 살인자가 된다.’는 생각을 합니다. 

카체리나의 집으로 가 이 생각을 고백하자 그녀는 서랍에 두었던 미챠의 편지 -돈을 못 구하면 아버지의 머리를 깨고서 돈을 훔쳐 오겠다는 말이 적혀 있는 편지, 자신은 도둑이 아니라 살인자라고 말하고 있던 그 편지-를 보여줍니다. 이 편지 덕분에 이반은 마음의 평화를 찾습니다. 미챠가 살인자라면 자신은 살인자가 아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메르쟈코프가 말한 대로 미챠가 죽고 나면 받을 유산이 늘어난다는 점이 찜찜했고 그래서 미챠를 구해내기로 작정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반이 알료샤와 (영원히) 헤어져 집으로 가려다가 스메르쟈코프의 집으로 향하기 전까지의, 두 사람이 관련된 사연이었습니다. 세 번째로 만난 스메르쟈코프는 병으로 매우 약해져 있었습니다. 그의 방으로 간 이반 역시도 건강한 상황은 아니었는데, 어쨌거나 두 사람은 다시 한 번 그 날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됩니다. 여기에서 스메르쟈코프는 자신이 <이반의 사주를 받아> 표도르 파블로비치를 살해했고, 드미트리에게 그 혐의가 가도록 만들었다는 사실을 이야기합니다. 그로서는 이 모든 것들을 이반이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그가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느낍니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다 뒤집어씌우려 한다면서, 이 살인 사건에 있어 결정적인 주범은 이반이라는 사실을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스메르쟈코프의 집에서 나와 자신의 방으로 간 이반은 섬망증의 증상에 시달립니다. 악마가 등장해 매력적이고 귀여운, 작가로서의 장래가 유망한 이반을 얻기 위해 끊임없는 말로 그를 농락하고, 이반은 그가 자신의 꿈일 뿐이라며 발버둥을 칩니다. (여기에서 다시금 이반의 사상이 확실하게 드러납니다. 그 사상이란 아래 <‘모든 것이 허용된다’ - 인물들을 사로잡는 단 하나의 문장>에 인용해 놓은 이반의 일화에 나와 있습니다. 그 사상이 대심문관과 지질학적 변동으로 심화되고 있습니다. 악마의 말도 이 사상을 대변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때 누군가가 그의 집 창문을 두드립니다. 미망에 사로잡힌 가운데서도 이반은 그것이 알료샤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과연 그 방문자는 알료샤였고, 그는 스메르쟈코프가 목을 매 죽었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이반은 알료샤에게 그 사실을 알고 있다고 말하면서 ‘그놈’에 대한 이야기를 정신없이 합니다. 그가 자기를 비웃었고, 그가 자기는 칭찬받고 싶은 욕구 때문에 내일 법정에 가서 자신이 아버지를 죽였다고 증언할 것이라고 거짓말 했다면서 괴로워합니다. 그러다가는 이내 쓰러져서 잠이 들고 맙니다. 그를 침대에 눕히고 자신도 소파에 누워 알료샤는 그가 어떤 병에 걸렸는지 알게 되었다면서, ‘그는 빛 속에서 부활하든지 아니면 증오 속에서 파멸할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12편 오심>은 드미트리의 공판을 보기 위해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부인들, 법조인들, 부인의 남편들 등-이 모여 있는 놀라운 장면을 보여주면서 시작됩니다. 네 사람의 주요 증인(미우소프, 막시모프, 호흘라코바 부인, 고 스메르쟈코프)를 제외한 사람들이 모였고 공판이 시작됩니다. 

검사 측 증인들은 모두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미챠에게 불리한 온갖 증거들과 증언들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 공고한 증언들에 대해 미챠의 변호사 페츄코비치는 도덕적이거나 증인에 대한 의혹을 제기함으로써 증언의 신빙성을 떨어뜨리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들의 증언이 끝나고 의사들은 나와서 미차에 대한 정신감정을 증언합니다만, 세 사람의 의사가 모두 제각각의 의견을 내놓았기 때문에 검사 측도 변호사 측도 별다른 영향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어 알료샤가 증인으로 등장해서는 그가 가슴께-그것도 특이할 만큼 목에서 가까운 부분-을 두드리면서 '절반의 치욕'을 토로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기억해 냅니다. 이 증언은 미챠의 주장-가슴에 1500을 숨겨두었고, 그것으로 마지막 파티를 열었다-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증거는 없었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이 분위기를 이어 카체리나 이바노브나가 증인으로 등장합니다. 그녀는 그가 얼마나 고귀한 심성을 가진 사람인가를, 자신의 치욕을 드러내면서까지 증언합니다. 비록 이들의 증언은 결정적인 것은 되지 못했지만 재판의 분위기를 바꾸는 데에는 충분한 영향을 끼치는 듯 했습니다. 카체리나 다음에 등장한 그루셴카는 이렇다 할 이야기를 내놓지 못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반 표도로비치가 증인으로 나옵니다. 그는 일단 병색이 완연해 보였는데요, 나와서는 차갑게 '특별한 것이 없다'고 말하더니, 갑자기 태도를 바꿔서는, 스메르쟈코프가 주었던 3000을 내밀면서, 진짜 범인은 스메르쟈코프이고 자신이 아버지의 살해를 교사했다고 말합니다. 그는 증인으로서 자신을 방문하는 악마를 댔으며, 미망에 사로잡혀 소동을 부리다가 실려나갑니다. 이 꼴을 본 카체리나는 자신이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깨달으며, 미챠에게 결정적으로 불리한 증거-아버지를 살해하겠다는 편지-를 재판정에 제출합니다. 그러고 나서는 히스테리를 부리다가 쓰러져 나갑니다. 분위기는 급반전 되었습니다. 미챠는 꼼짝없이 죄를 뒤집어써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검사인 이폴리트 키릴로비치는 자신의 심리학적인 특성에 따라서 어째서 미챠가 아버지를 살해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또한 어째서 스메르쟈코프가 범인일 수 없는지를 또한 (매우 사실적인 부분까지도 지목해가면서도 결정적으로는 어긋나게) 논리적으로 증명합니다.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았지만 훗날 키릴로비치의 이 논고는 비웃음을 사고 맙니다. 

변호사 페츄코비치는 이폴리트 키릴로비치의 심리학적 분석을 그대로 뒤집어 어째서 미챠가 살인자가 아닌지를 조목조목 반박합니다. 그렇게 검사의 논리가 소설에 가까울 만큼 허점이 많다는 사실 - 정황증거는 수북하지만 그 무엇도 결정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게다가 피해자라는 이름에 갇혀 있던 표도로 파블로비치가 어떤 아버지였는지, 그에게 미챠가 어떤 대우를 받고 자랐는지를 설명하면서 미챠의 고통과 증오에 관한 이야기를 하자 사람들은 완전히 감동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죄가 선고될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미챠에게는 유죄 선고가 내려졌습니다.  

<에필로그>는 재판 후 병이 나 병원으로 옮겨진 미챠를 수송 과정에서 탈출시키기 위한 (이반), 알료샤,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의 계획이 드러납니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의식불명에 빠져든 이반을 대신해 카챠가 미챠의 탈출 계획을 진두지휘 합니다. 알료샤도, 심지어는 알료샤도 그들을 적극적으로 돕고 미챠를 설득해 탈출에 동의하도록 설득하기 위해 애씁니다. 

한편 스네기료프의 아들 일류샤는 결국 재판이 끝나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 죽고 말았습니다. 바쁘게 뛰어다니느라고(그러고 보면 알료샤는 1권 처음부터 3권 마지막까지 정말 바쁘게 뛰어다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부르고 그를 필요로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장례식에 늦기는 했지만 참여할 수는 있었습니다. 일류샤를 묻고 스네기료프와 가족들이 슬픔을 털어내기를 기다리면서 알료샤와 초등학생들-콜랴를 비롯한 소년들-은 일류사가 묻히길 원했던 바위 앞에서 처음에는 돌을 던졌지만 곧 무척 사랑하게 된 소년 일류샤를, 그리고 그 때 그들이 나눠가졌던 따뜻한 마음을 잊지 않기로 맹세합니다. 

소년들은 이 따뜻한 맹세에 감격해 '카라마조프 만세'를 외치며 일류사의 추도식에 참석하러 갑니다. 


♨ 동물적인 격정과 함께 드높고 고결한 양심이. 


드미트는 그가 해온 행위에 대한 평판과 상관없이 고결하고 과민한 양심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애기’를 위해서라면 그가 비록 아버지를 죽이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애기들을 위해서, 시베리아로 유형 가야 한다는 말을 듣고 나서야 조시마 장로가 대단한 혜안을 갖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드미트리의 말대로라면, 그는 비록 격정을 다스릴 수 없어서 비열한 짓거리를 하게 되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그는, ‘대속’하는 자, 즉 그리스도에 가까운 자가 되니까 말입니다. 놀랍게도 조시마는 그 지경에 처한 드미트리 속에서도 생생하게 살아 있는 그리스도다운 면모, 그러니까 그의 강렬하고 과민하리만큼 예민한 양심을 보았던 것입니다. 

냉철하고 관념적인 이반 역시도 카라마조프이기는 해서, 과민한 양심 때문에 고뇌합니다. 그 자신은 아버지가 죽을 때 비록 모스크바에 있었지만, 아버지가 살해될 것을 알고 있었고, 또 어느 정도 기대하고 있었고, 게다가 누군가(스메르쟈코프)에게 사주한 것만 같은 기분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살인자처럼 여기고 있었고, 그런 까닭으로 알료샤는 그에게 ‘형은 살인자가 아니야!’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그저 아버지의 장례식에 늦게 온 냉담한 아들일 뿐이었지만, 그 속에서 그 자신은 아버지의 피를 바라고 피를 손에 묻힌 자가 되어 고통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놀라울 만큼의 양심인 것이지요. 

비록 이 두 카라마조프가 ‘모든 것이 허용된다.’라고 말하고 다닐지언정 그들은 정작 스스로에게 ‘모든 것을 허용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런 말을 하지 않고 신 앞에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보다도 이 카라마조프들은 지독하게 양심적이고 지독하게 종교적이며 그래서 격정적으로 방황할 수밖에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 ‘모든 것이 허용된다’ - 인물들을 사로잡은 단 하나의 문장.

조시마 장로의 암자에서 카라마조프들이 모였을 때 누군가 이반 표도로비치에 대한 일화를 전하면서 그의 생각을 간략하게 정리합니다. 옮겨보면 이렇습니다. 

“이반 표도로비치는 마치 괄호를 치듯, 바로 여기에 자연법칙의 핵심이 들어 있으므로 인류에게서 불멸에 대한 믿음을 없애 버린다면 그 즉시 사랑뿐만 아니라 세상의 삶을 지속시키기 위한 온갖 생명력이 고갈될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그뿐입니까. 그렇게 되면 이미 부도덕인 것이란 개념 자체가 없어져서 모든 것이, 심지어 식인마저도 허용될 거랍니다. 하지만 이것으로도 부족하여 그는 결론 삼아 주장하길, 각각의 개인, 예를 들어 우리처럼 신도, 자신의 불멸도 믿지 않은 인물들에게 있어서 자연의 도덕법칙은 예전의 종교적인 것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것으로 즉각 바뀌어야 하며, 악행에 가까운 이기주의조차도 인간에게 허용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런 상태에서는 가장 이성적이고 불가피하면서도 거의 가장 고귀한 귀결로 인정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여기에서 도출되어 끊임없이 인물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명제는 그야말로 인물들을 사로잡아 버립니다. 대다수의 주요 인물들은 하나 같이 이 명제의 포로가 되어 있는데 다만 이 명제를 해석하는 방식에 따라 크게 두 분류로 나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일단 카라마조프들(드미트리, 이반, 알료샤)에게 이 명제는 ‘양심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잠재적으로 알료샤까지 포함한 카라마조프들은 그 이름의 의미 그대로 악의 구렁텅이에 빠진 자들로 동물적이고 비열한 욕망에 대한 열정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이 인물들은 다른 인물들과는 다른 고결함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매우 두드러지는 양심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카라마조프들은 ‘모든 것이 허용되’지만 양심에 반하는 그 무엇도 하지 못하거나(알료샤), 설사 양심에 반하는 행동을 하게 되었다고 할지라도 그로 인한 극심한 고뇌에 시달리거나(이반), 육체적․사회적․심리적으로 수난을 당하는(드미트리) 사람들입니다. 얄료샤에서부터 이반, 드미트리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양심은 과민할 정도로 예민해서 그들의 행동을 다른 인물들의 것과 확연하게 다른 것으로 만들어줍니다. 알료샤는 양심과 혼연일체가 되어 대내외적으로 양심을 지키기 위한 투쟁의 선두에 서 있습니다. 이반은 자신이 아버지를 죽이지 않았지만 아버지가 죽기를 기대했다는 그 생각 하나만으로도 스스로를 살인자로 여겨서 거의 미치기 직전까지 이릅니다. 광적이고 불한당이기까지 한 드미트리조차도 그 자신이 흘리지 않은 피라고 할지라도, 배가 고프고 가난한 ‘애기들’ 그러니까 그 순수하고 순결한 존재들을 위해서라면, 시베리아로 유형 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지경입니다. 아버지를 죽인 패륜아로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고 있지만, 기실 그는 그리스도적인 인물에 가까운 것입니다. 

이에 대립되는 축에 스메르쟈코프가 있습니다. 스메르쟈코프는 아버지가 표도로 파블로비치로 추정되는 한편 그의 집에서 오랫동안 하인노릇을 해왔습니다. 똑똑하면서도 비열한 심성을 갖고 있는 스메르쟈코프는 이반을 거의 숭배합니다. 그는 이반의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는데, 그것도 아주 ‘심각하고 진지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이반의 말 속에 담겨 있는 (양심의) 고뇌를 읽지 못했고 그의 사상의 저변에 얼마나 많은 고통이 깔려 있는지, 또 그 고통이야말로 그 사상을 지지해주는 유일하고도 정당한 근거라는 사실을 전해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하여 그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이 문구로부터 어떤 자유를 읽어냅니다. 카라마조프들에게 있어 이 문구는 양심의 문제로 귀결되고 양심의 문제는 곧 책임에 대한 물음이기도 해서 상당히 무거워지는 것이었음에 반해 스메르쟈코프는 모든 것을 -특히 그에게 결핍된 양심이라든지 도덕이라든지 고상한 형이상학 같은 것- 뛰어넘어 책임으로부터의 자유, 도덕과 양심으로부터의 자유를 읽어낸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그는 표도로 파블로비치와 같은 유형의 인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에서 매우 아이러니한 점은 카라마조프들의 아버지인 표도로 파블로비치는 매우 동물적이고 부도덕하며 물질적이어서 쾌락을 위해서라면 양심 따위는 똥통에 기꺼이 쳐 넣을 인물인데 반해서 아들들은 하나 같이 자신들에게서 그러한 속성을 발견하고 그 속성 때문에라도 더욱 혐오스럽게 양심의 문제에 골몰하게 되는 특성을 보인다는 점입니다. 

여기에서 또 반대로 스메르쟈코프의 어머니인 스메르쟈쉬야는 유로지브이라고 할 만큼 순수하고 성스러우며 속세나 물질적인 욕구로부터 완전히 초월한 인물임에 반해 그의 아들은 물질적인 욕망이 매우 강하고 속세에서 어둡게 살아남는 데에도 기가 막힌 재주를 가진 비열하고도 부정적인 인물이라는 점입니다. 아버지와 아들들, 어머니와 아들이 보여주는 상반되는 특성은 매우 아이러니한 한편 ‘그렇기 때문에 더욱 발버둥 치게 되는 인간의 비극적이고 처절한 노력’을 연상시켜서 머릿속을 다시 한 번 복잡하게 만들어줍니다. 

♨ 아버지와 아버지, 아들과 아들.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문구를 두고 카라마조프와 스메르쟈코프가 대립을 이룬 것처럼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관계를 두고서 이번에는 카라마조프와 스네기료프가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표도로 파블로비치와 카라마조프들의 관계는 생물학적으로는 아버지와 아들이 분명하지만 그들이 맺고 있는 관계는 이보다 더 파렴치하게 파탄나기도 어려울 만큼 산산조각이 나 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들을 키우지도 않았고 숫제 귀찮아하며 오로지 자신의 쾌락을 채우는 데에만 급급합니다. 아들들은 이러한 아버지를 보면서 혐오감과 분노를 감추지 못하거나 다스리지 못해서 고통에 빠집니다. 하여 이 카라마조프들은 몰락과 파멸을 피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부자 관계에 있어 알료샤는 제외된다고 하겠습니다. 그는 어디에 있든 사람들에게 사랑 받는 재주를 갖고 태어났으니까 말입니다.) 

이에 반해 스네기료프 부자가 보여주는 사랑은 가히 대단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선 아들은 치욕과 모욕으로 더러워진 아버지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반의 모든 아이들과 싸우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고, 그 자신이 돌을 맞고 외톨이가 되는 지경에 이른다고 하더라도 결코 아버지를 배신하지 않고 아버지를 불쌍하게 여기며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버지의 괴로움을 헤아려) 괴로워합니다. 조숙한 이 아들은 남들이 아버지를 바라보는 시선이 어떻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알았기 때문에 괴로웠고, 또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를 더욱 아끼고 사랑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된 것은 그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뜨거운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아들을 위해서라면, 그러니까 자신의 명예를 지켜주기 위해 고군분투 하는 아들을 위해서라면 아들의 병을 낫게 해줄 수 있는 돈, 그러니까 너무나 절실하게 필요한 돈까지도 울면서 웃으면서 실성한 것처럼 꼬깃꼬깃 버릴 수 있을 만큼 아들을 사랑했습니다. 이런 극적인 장면이 아니더라도 아들과 함께 제방을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이란 가슴을 뜨겁게 해주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마지막 에필로그에서 카라마조프가 '일류샤를 사랑했던 순간을 잊지 말자'고 맹세하는 장면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것 같습니다. 미챠나 이반과 같은 비극적인 인물들이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인간다운 따뜻한 마음씨와 자긍심'이 필요한데, 이 마음씨와 자긍심은 특히 어렸을 때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고 또 그 사랑하고 사랑받았던 그 기억을 소중히 간직하는 데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적어도 알료샤의 입을 빌린 작가의 생각이 아닌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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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55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음, 김연경 옮김 / 민음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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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편 러시아의 수도승>은 조시마 장로의 임박한 죽음으로 시작됩니다. 그는 알료샤에게 말했던 대로 그가 돌아올 때까지 살아 있었고, 자신이 알료샤를 어떤 이유로 사랑했는지, 왜 미차의 발에 입을 맞췄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장로가 죽고 알료샤가 정리한 내용을 토대로 조시마 장로의 생에 있어 중요했던 인물들, 장면들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조시마의 형은 착하고 냉소적이었지만 죽음이 임박해 오자 아주 다른 사람으로 변합니다. 그는 세상의 것에 대해서 감사했고, 그를 돌봐주는 하인에게까지 송구스러울 만큼 감사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자신은 죄인 중의 죄인이고, 그것도 가장 극악한 죄인인데, 사랑 받는 것은 너무나 감사한 일이다’라는 식의 말을 하는 것이었지요. 이 생각은 조시마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칩니다. 형은 조시마에게 자기 대신 살아달라며 숨을 거둡니다. 

청년 시절에 그는 어떤 여자에게 반해 그 약혼자에게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결투를 신청합니다. 그러나 정작 결투 전날 밤 하인을 때린 일로 괴로움을 느낀 조시마는 곧 형의 말을 기억해 냅니다. 커다란 감동을 느낀 그는 결투장에서 상대방의 총알을 견딘 후에 자신의 총을 내버립니다. 

그 일로 유로지브이 취급을 받게 된 조시마의 앞에 신비스러운 방문객이 나타납니다. 그는 사회적으로도 성공했고 재산도 있으며 좋은 일을 많이 해 존경도 받는 인사였습니다. 매일 밤 밤 조시마를 방문하던 그는 어느 날 자신이 살인을 저질렀다는 이야기를 꺼냅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저지른 일을 고백하고 났을 때 가족들이 당할 고통 때문에 고백하기가 주저된다는 뜻을 비춥니다. 조시마는 그에게 가서 모든 것을 고백하라고 합니다.  

마음을 정한 것 같으면서도 계속 조시마를 방문하던 그는 어느 날 ‘정말로 고백하겠다.’고 말하고 나서는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왔습니다. 그는 이상하게도 조시마를 껴안고 입을 맞추더니 자신이 ‘두 번 자네(라고 처음 불렀습니다)를 찾아왔었네’라고 말하며 이 사실을 기억해 두라고 합니다. 

그는 정말로 그 일을 고백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에게 정신이상 소견이 내려집니다. 그 커다란 일을 한 끝에 그는 병이 나고 맙니다. 사람들은 유로지브이가 사람을 홀려서 이상하게 만들어 놨다고 하면서 조시마를 비난합니다. 그의 상태가 악화되었을 때 찾아온 조시마에게 그는, 자신이 두 번째로 방문했던 건 그를 죽이기 위해서였다고 고백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숨을 거둡니다. 

이어 러시아적 상황에서의 수도승과 하인의 문제, 지옥의 불길에 관한 문제 등 종교적인 견해가 제시되면서 2부가 끝이 납니다. 

<7편 알료샤>의 시작은 조시마 장로의 시체가 풍기는 당혹스러운 썩은 내가 장식합니다. 성인이 죽었으니 무언가 기적이 일어날 것으로 기대했던 사람들을 무지하게 실망시키는 일이었습니다. 동시에 조시마의 적들의 기세를 등등하게 만들어준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장로를 무척이나 사랑한 알료샤는 신앙에 도전을 받지는 않았지만 당혹스러움은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그 역시도 어떤 기적이 일어날 것으로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는 장로가 뒤집어 쓴 치욕과 불명예 때문에 깊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이 때 나타난 라키친은 알료샤를 조롱하더니 그를 데리고 그루셴카의 집으로 향합니다. 오년 전 애인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던 그녀는 몹시 긴장한 상태에서 그들을 맞이합니다. 매우 급작스러운 방문이었음에도, 또 그녀나 알료샤의 심리적인 상태가 좋지 않았음에도 두 사람은 어딘지 모르게 서로에게 따뜻한 애정을 보여줍니다. 알료샤는 그루셴카의 다정한 마음을 꿰뚫어 보았고, 그녀의 심술 역시 알료샤의 순수한 마음을 뚫지는 못했습니다. 

그루셴카의 집에서 나온 알료샤는 곧장 수도원으로 돌아갑니다. 그곳에서 낭독되는 성경을 읽으며 반은 졸고 있었는데, 꿈에서인지 환상에서인지 예수가 물로 포도주를 만든 그 잔치의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조시마 장로가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고통 때문에 잠에서 깨어난 그는 조시마 장로의 관을 들여다보다가 밖으로 나가서는 열락에 사로잡혀 땅에 입을 맞춥니다. “그 시각, 누군가가 내 영혼을 찾아 주었던 것이다.”라고 훗날 말하게 된 것처럼 이 장면은 알료샤의 생애에 커다란 방점이 됩니다. 

<8편 미챠>가 되어서야 드디어 우리의 드미트리가 등장합니다. 그는 새로운 삶을 위해 3000루블이 필요했는데, 이 돈을 구하러 쿠지마에게 갔다가 그만 속임수에 넘어가 랴가브이를 찾아 떠납니다. 중요한 일-그녀가 자신을 선택하게 된다는 것-이 일어날 밤에 멀리 떠나는 게 저어됐지만 돈을 구하는 일은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는 떠났고, 생각보다 먼 곳에서 그만 밤을 새우고 맙니다.  

한편 스메르쟈코프는 비열하고 야비한 계획대로 그 중요한 밤에 간질을 일으키고, 쿠지마에게 속았다는 것을 깨달은 드미트리는 호흘라코바 부인에게 돈을 꾸러 갑니다만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합니다. 

그루셴카는 드미트리를 따돌리기 위해 자신을 쿠지마의 집에 데려다 달라고 했고, 그가 떠난 즉시 자신의 집으로 달아났습니다. 그녀를 데리러 온 드미트리는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광분해서 그녀의 집으로 쳐들어갑니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모크로예로 떠나버린 뒤였습니다.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드미트리는 그녀가 표도로 파블로비치의 집으로 갔다고 생각했지요. 그루셴카의 집을 나서면서 드미트리는 절구의 놋쇠 공이를 들고 나왔습니다. 

과연 그는 아버지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그러나 아직 그녀는 오지 않은 것이 틀림없는, 아버지를 보자 드미트리는 혐오감을 참지 못하고 ‘그루셴카가 왔다’는 신호로 창문을 두드립니다. 표도르가 내다보는 사이 드미트리는 호주머니에서 공이를 꺼냅니다. 

장면은 끊어지고 그 시각 잠에서 깨어난 그리고리 노인은 쪽문에 자물쇠를 채우지 않은 것을 기억해 내고는 정원으로 나옵니다. 그러다 표도르 파블로비치의 방에 창문이 열린 것을 보았지요. 그리고 달아나는 그림자도 보았습니다. 그는 그림자에게 달려들며 ‘아비를 죽일 놈’이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드미트리는 놋쇠 공이를 꺼내 그리고리의 머리를 내려치고는 피를 흘리는 그의 머리에 손수건을 대주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그는 다시 그루셴카의 집으로 갔고, 피투성이가 된 그를 보고 놀란 그녀의 하녀에게서 그녀가 어디로, 누구를 향해 떠났는가 하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그녀의 집에서 나온 드미트리는 표트르 일리치 페르호친에게 가 그의 말에 따라 손을 씻고, 갑자기 생긴 돈으로 아까 저당 잡혔던 자신의 권총을 찾았으며, 꼬마 하인을 시켜 엄청난 양의 파티 음식을 장만하라는 말을 전합니다. 그리고 마차에 잔뜩 싣고, 미차는 그루셴카가 있는 모크로예로 떠납니다. 

모크로예에서 드미트리는 그루셴카와 그녀가 사랑했던 장교와 그를 지키는 다른 한 폴란드인과 지주 막시모프, 그리고 칼가노프를 만나 카드놀이에서부터 술 파티를 즐기고, 그 와중에 그루셴카와 폴란드 장교, 드미트리와 폴란드 장교가 대립각을 세우기도 합니다. 어쨌거나 그녀는 자신의 옛 사랑이 변했다면서 드미트리에게 희망을 주는 말을 합니다. 그는 이미 손에 피를 묻힌 지경에 이르렀지만 기대도 할 수 없었던 희망에 -그는 그녀를 놓아주러 모로코예에 왔으니까요- 기뻐하는 한편으로 깊이 절망하기도 합니다. 

아침이 오고 술을 많이 마신 그녀를 진정시키는 드미트리에게 드디어 경찰서장과 검사시보, 예심판사가 들이닥칩니다.  

<9편 예심>은 그들이 드미트리에게 오기까지 무슨 일이 있었던가를 보여주면서 시작됩니다. 표트르 일리치가 페냐에게 갔던 일, 호흘라코바 부인을 거쳐 경찰서장의 집까지 가게 된 일, 다친 그리고리를 발견한 그의 아내가 죽은 표도르 파블로비치 역시 발견하고 경찰에 알리게 된 일 등을 독자에게 알려줍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주의할 것은 ‘괴상할 정도로 오래 가는, 그래서 내일을 넘길 수 있을 지 알 수 없을 만큼 심한’ 스메르쟈코프의 간질에 의사가 주목했다는 사실입니다. 

장면은 다시 드미트리와 그들이 만난 모로코예로 돌아옵니다. 드미트리는 자신이 아버지 살해 혐의를 받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자, 자신이 죽인 것은 아버지가 아니라 그리고리라고 항변합니다. 아버지 피에는 무죄요, 노인의 피에는 유죄라고 강하게 주장하지요. 그러나 그리고리가 죽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듣자 드미트리는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할 환희를 느낍니다. 그 피 때문에 그루셴카와 새로 시작할 삶이 끔찍한 것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그 피가 죽음으로 연결되지 않은 것은 하늘이 자신을 도운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는 급격히 친절해져서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를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자신이 아버지를 죽이려고 정원에 들어가 창문을 두드렸지만 죽이지 못했고 자신을 본 아버지는 흥분해서 소리를 질렀으며 그 때 그리고리가 나타나서 달아나는 자신의 다리를 잡았고, 그는 놋쇠 공이를 휘둘렀으며, 그가 죽은 줄 알았다고 이야기 합니다. 세부적인 이야기를 기억하지 못하거나, 또는 기억하지 못할 만한 순간에서 매우 세부적으로 기억하고 있는 등 그의 상태는 매우 기묘했습니다. 게다가 예심판사와 검사시보의 집요한 질문은 모든 것을 털어놓고 싶어 하는 드미트리의 이야기를 자꾸만 끊었고, 상호 신뢰하는 관계라고 생각하고 있던 드미트리의 생각을 회의적인 것으로 만듭니다. 그는 커다란 슬픔에 잠기지요. 

심문이 끝나고 그들이 조서를 작성하는 사이에 드미트리는 잠이 들었다가 괴상한 꿈을 꿉니다. 울고 있는 애기가 나오는 꿈인데 그 애기와 어머니는 찢어지게 가난한 상태에서 집에 불이 나 꼼짝없이 굶어죽거나 얼어죽거나 혹은 둘 다인 상황에 몰려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막무가네로 그들을 도우려는 드미트리의 귀에 ‘당신과 함께 하겠다’는 그루셴카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그는 새로운 빛을 향해 가다가 잠에서 깨어납니다. 상황에 맞지 않도록 그의 영혼이 투명해질 수 있었던 것은 이 꿈 덕분이었습니다. 

그랬어도 그는 기소되어 마차에 실린 채 호송됩니다. 그에게 인사를 한 유일한 인물인 칼가노프는 ‘정녕 사람들이란 이것밖에 안 된단 말인가, 이러고서도 과연 진정한 사람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라며 절망에 빠져 웁니다.  

♨ 매우 러시아적인 인물 - 드미트리 표도로비치.

처음에 드미트리의 발 아래 엎드려 입을 맞춘 조시마를 보았을 때에는 그저 그가 겪을 고난 때문에, 그 고난에, 조시마가 경의를 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예심 편을 통해서 그의 영혼이 드러나고 나자, 그가 얼마나 고결한 인물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의 광증이란 고결함에서 나오는 지나친 예민함 때문인 것이지요.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는 방탕한 인물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언뜻 보면 지극히 모순적인 두 요소를 동시에 아무렇지 않게 지니고 있는 것이 드미트리라는 캐릭터입니다. 동시에 도스토예프스키적인 캐릭터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지극히 러시아적인 캐릭터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1편에서 이해할 수 없게 굴었던 행위들의 맥락이 드러나는 2편에 이르러서야, 그의 진가를 알아보게 된 것 같아서 부끄럽기도 합니다. 

미챠 편에 이르러서 조금 지루해지기도 했지만 (쿠지마에게 속아서 랴가브이에게 가 있었던 일이나 돈을 구하러 다닌 일이나, 모로코예에서 농민들을 데려다가 파티를 하는 장면 등) 예심판사, 검사시보 등이 도착하고 나서 사건에 속도가 붙기 시작하자 또 정신없이 빨려 들어갑니다. 

이 기세를 몰아 3편으로 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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