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잠
최제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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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세 번째 작품이다.

<퀴르발 남작의 성>도 발칙하니 재미 있었고, <일곱개의 고양이 눈>은 지하철에서 몇 번이나 못 내릴 뻔 했었다.

눈이 빠지게 기다리던 세 번째 작품이 나왔다.


"흥분하지 마세요. 이제 시작인데."


얼마나 도발적인 문구인가.

나는 이 문구만으로도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본격적인 게임의 시작을 알리면서, 제대로 어퍼컷을 날려주겠다는, 저 예의바르고도 옹골찬 다짐.


이야기는 매우 어지럽게 진행되지만.

힌트가 있다. 제목이다. '나비잠' - 이야기의 시작이 꿈이라는 것까지 참고한다면, 자연스럽게 '호접몽'을 떠올리게 된다.

주입식 교육이 낳은 폐해 아닌 폐해라고나 할까. 

나비와 꿈과 잠이 연결해서 만들어내는 '내가 나비를 꿈꾸는 것인가, 나비가 나를 꿈꾸는 것인가.'


이야기는 매우 어지럽게 진행되지만.

힌트는 노골적이다. '나'라는 일인칭과 '요섭'이라는 삼인칭이, 길 잃을 걱정 따위, 훅 불어 가볍게 날려 버린다.


이야기는 매우 어지럽게 진행되지만.

힌트는 그러고도 또 있다. 이 작가가 누구인가. <일곱개의 고양이 눈>의 그 작가가 아닌가.

치밀한 이야기를 짜는 데 재주가 있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소용돌이처럼 다른 줄기에서 시작된 한 물의 흐름이 한 꼭지점에서 매우 흥미롭게 만나 뒤엉킨다.


그렇다고 수월하게 읽을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물론 이 작가는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어서 가독성이 매우 뛰어나다. 이야기는 흡인력 있고 도저히 책을 내려놓지 못하게 한다.

예정된 몰락의 발길을 한발 한발 따라가야 하는 입장으로서는 그 괴로움 또한 떨쳐낼 수 없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최요섭이라는 인물이 갖고 있는 속물성은 그가 당하는 '예정된 몰락'을 인과응보로 생각하도록 만든다.

하지만 또한 이 작가가 누구인가. 그는 뛰어난 재능으로 읽는 사람들의 뒤통수를 후려친다.


과연 인과응보인가.

나는 여기에 대해서 그렇다고 말할 자신이 없다.

내가 보기에 최요섭이 당하는 예정된 몰락은 어딘지 모르게 부조리하다. 

그런데 그 부조리함의 쓴맛을 인정하게 되는 순간, 읽는 사람 역시도, 부도덕한 공범으로 몰리게 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처치 곤란한 씁쓸함. 그래서 과연 인과응보인가.


기억과 꿈과 현실이 어디가 어디서부터 기억이고, 꿈이고, 현실인지를 구분할 수 없게 만드는 이야기의 소용돌이.

꿈에서 깨어난 것 같은 혼란스러운 뒷맛은, 이 작가의 다음 작품을 또 기다리게 만든다.


별 다섯개.


흥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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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요법의 기본문제 Grundwerk C.G.Jung 융 기본 저작집 1
칼 구스타프 융 지음, 한국융연구원 C.G. 융 저작 번역위원회 옮김 / 솔출판사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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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지금은 망해버린) 서점에서 사서 쟁여뒀던 책.

십여년 만에 꺼내서 읽고 있습니다만. 왜 십여 년이나 묵혀 놨을까 싶네요.


일단 이부영 교수가 쓴 분석 심리학을 시작으로 융이 직접 쓴 개론서라고 할 수 있는 인간과 (무의식의) 상징, 한길사에서 나온 분석심리학 입문서 그림자, 아니마와 아니무스, 자기 실현을 비롯해 융의 자서전까지 여러 번 읽고 나서 그런지, 기본 저작집 1권은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기본저작집의 도입부로서 적절한 것 같다고나 할까요. (뭐래~)


어디에서 검색해 보기로는 발표된 순서대로 읽으면 좋다고 나와 있길래 처음에는 그렇게 읽었었어요. 그렇게 읽는 게 낫다는 생각이 타당해 보였으니까요. 문제는 이 책이 크게 정신 치료와 꿈과 심리학적 유형론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거였습니다. 발표된 순서대로 읽다보니 정신치료에 관한 글과 꿈에 관한 글을 정신 없이 섞어 읽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나중에는 게재되어 있는 순서대로 읽었습니다. 크게 정신치료에 대해 다루고 있는 글들과 꿈에 대해 다루고 있는 것들, 유형론은 하나이지만 양이 많아서 쭉 읽고, 정신분열증을 읽어 마무리 했습니다. 여러 번 읽어서 충분히 익숙해진 사람에게는 발표 순서대로 읽는 것이 유의미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희미하게 남아 있기는 합니다만. 1권 안에서 입장 표명이 크게 변화된 부분이 있는지에 대해서 좀 회의적이라 저런 식으로 읽는 것이 얼마나 효과적일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1권에서 다루고 있는 부분 중 심리학적 유형은 전집 내용에서 한 챕터만 수록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분량은 1권에서 가장 많습니다. 분량이 너무 많아서 다 수록할 수가 없으니 필요한 사람은 독일어본이나 영역본을 구해서 읽으면 될 거라고 해요. 저는 이미 이부영 선생님의 입문서를 통해서 이 부분은 충분히 읽었던 터라 더 구해보지는 않기로 했습니다. (딱히 더 땡기는 주제가 아니라서요.) 한 챕터만 읽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이부영 선생님이 심리학적 유형론에 대해서 정리해 놓으신 게 엄청 체계적이고 알기 쉽게 잘 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걸로 목이 마른 분이시라면 이부영 선생님의 분석 심리학을 읽어보시거나 독일어본, 영역본을 읽으시면 되겠습니다.




추신> 곁가지로 아쉽다고 생각했던 것.


'피에르 자네'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번역자들끼리 '자네'와 '쟈네'가 통일되지 않은 것은 그래도 이해할 만 하지만. 같은 페이지 안에서 한 번역자가 '자네'라고 쓴 다음 몇 글자 뒤에 '쟈네'라고 쓰고 있는 것은 교열을 보는 과정에서 충분히 잡아낼 수 있었을 거 같은데 안 잡혀 있어서 아쉬웠습니다. 약간의 오타가 있지만, 뭐. 거슬리지는 않아요. 사실 뭐 자네나 쟈네나 딱히 신경 쓰일 것도 없긴 하지만. 만듦새가 그렇다는 거죠.


기본저작집이 아니라 전집이 나왔으면 더 좋았을 거 같지만. 그랬으면 비용도 후덜덜하고 번역 기간도 훨씬 더 길었겠죠? 여튼 번역위원회 덕분에 기본저작들 편하게 (번역본으로) 읽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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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가지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 지음, 이용대 옮김 / 한겨레출판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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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내 생각이 맞다면' 하고 운을 뗀 뒤 사례를 모아 차곡차곡 원하는 곳으로 논지를 이끌어가는 게 몹시 흥미진진 합니다. 613쪽 이후 등장하는 두엇의 誤字는 옥에 티. 이거 빼면 매우 잘 만들어진 책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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