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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치-22 2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7
조지프 헬러 지음, 안정효 옮김 / 민음사 / 200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요사리안은 부상을 당해 병원에 다시 입원한 후에 정신과 의사의 상담을 통해서 ‘미쳤다’는 진단을 공식적으로 받습니다만, 아주 어이없는 진행과정에 의해 그 대신 다른 군인이 자국으로 돌아가 버리고 맙니다.
요사리안은 자신이 출격 할당량을 모두 채워도 할당량은 계속 늘어날 것이고, 다음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나간 출격에서 자신이 살아 돌아올 수 없을 가능성이 언제나 매우 높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자꾸만 출격을 강행하는 캐스카드 대령을 죽일 음모에 동의하기로 합니다. 그렇지만 출격 할당량을 코앞에 둔 동료, 그것도 음모를 제의한 동료들까지도 정작 음모를 실행할 생각은 없었고, 당연한 일로, 할당량은 점점 더 늘어납니다.
일흔 한 번이나 출격한 요사리안은 네이틀리와 그의 친구들이 출격 나갔다가 죽고 난 이후로, 이제는 더 이상 출격하지 않기로 합니다. 지휘부는 요사리안을 처벌하고 싶었지만, 그가 충분한 할당량을 채웠고, 또 영웅이었기 때문에 -그러나 본질적으로 그를 처벌할 근거가 없었기 때문에- 처벌하지 못한 채 협박과 회유를 일삼습니다.
네이틀리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요사리안을 살해하기 위해 쫓아다니던 네이틀리의 여자친구가 로마에서 쫓겨났다는 소식을 듣고, 요사리안은 로마로 달려갑니다. 거기에서 그는 그녀들을 내쫓은 것의 정체가 바로, 캐치-22인 것을 알게 됩니다. 존재하지도 않으면서, 존재한다고 믿어지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극성맞게 사람들을 억압하는 캐치-22의 부조리함을, 요사리안은 점점 더 치열하게 느끼는 한편,
네이틀리의 꼬마 여동생이 아는 사람 하나도 없는 도시의 거리로 내몰린 것을 깨닫고는, 그녀를 구하기로 합니다. 그녀를 찾아다니는 동안 요사리안은 로마라는 도시가 그늘에 숨겨둔 극악한 폭력을 목격합니다. 그리고 이내 하녀를 강간하고는 떨어뜨려 죽인 알피와 만나게 됩니다. 그렇지만 헌병은 그들이 있는 방에 들어와 알피에게 사과하고는, 출장증 없이 돌아다녔다는 이유로 요사리안을 체포해 갑니다. 체포된 요사리안은 캐스카드 대령에게 끌려갔고, 그는 요사리안을 귀국시키기로 했다는 말을 하지요.
그러나 그 말은 캐치-22만큼이나 함정을 가득 담고 있는 말이었습니다. 캐스카드 대령과 콘 중령은 교묘한 말장난으로 그들 자신을 국가와 동일시 한 후에, 그들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치지 않는 행위는 모두 국가에 반하는 행위라고 단정 짓습니다. 요사리안을 ‘반국가적인 인물’로 낙인찍기 위한 어수룩한 수작이었던 것이지요.
이 허튼 수작의 진심은 요사리안을 이용해 장군과 대령이 되고 싶은 그들의 욕망이었습니다. 요사리안은 자신의 안위를 위해 그들과 합의해 친구가 되기로 했고, 그들은 그를 귀국시켜주기로 합니다. 즐겁게 돌아 나오는 길에 요사리안은, 네이틀리의 여자친구가 휘두른 칼에 상처를 입고 정신을 쓰러집니다.
병원에서 어느 정도 회복한 요사리안은 굴욕적인 협의에 따르지 않기로 합니다. 죽은 줄 알았던 오르가 초인적인 인내로 스웨덴에 가닿은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소식을 전해준 군목과 함께 요사리안은 ‘끊임없는 인내’로 자신의 목숨과 존엄을 지켜 마침내 승리하고 말겠다는 또 다른 목적을 향해 나가기로 합니다. 군목은 군에 남아 자신을 짓누르던 모든 사람들을 향해 정당한 분노의 주먹을 날리기로 하고, 요사리안은 오르를 따라 스웨덴으로 가기로 한 것이지요.
유쾌한 탈주를 꿈꾸는 요사리안이 네이틀리의 여자친구가 휘두른 칼을 피해 달아나면서 작품은 끝이 납니다.
♨ 조각 퍼즐 같은 이중 구조…?
이 작품은 사람의 이름 혹은 지명을 통해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이러한 구조는 마치 조각 퍼즐과 같습니다.
우선 퍼즐의 조각은 전체적인 맥락에서 이야기 구조를 갖게 됩니다. 즉 두 개의 조각이 같은 모양의 선을 공유하면서 서로 아귀를 맞춰가면서 전체의 구조를 이루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 작품에서 ‘퍼즐 조각의 전체적인 맥락’의 역할을 하는 것은 사람의 이름 혹은 지명으로 진행되는 커다란 이야기입니다. 한 사람의 이름 혹은 한 곳의 이름으로 진행되는 이야기가 하나의 퍼즐 조각을 이루게 되는 것이지요. 이 조각의 선을 이루는 것은 이 전 조각의 선이 끝나는 부분에서 언급된 사람 혹은 장소 내지 사건과 관계된 부분입니다. 즉, 그 논리가 퍼즐과 퍼즐을 이어주는 ‘같은 모양의 선’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 커다란 이야기를 통해서 독자들은 이야기의 틀을 잡게 됩니다.
그런데 퍼즐의 조각은 전체적인 모양만 갖는 것이 아니라 그 조각 안에 그려진 그림을 통해서 또 하나의 이야기를 갖게 됩니다. 즉 두 개의 조각이 공유하는 선을 통해서 전체적인 이야기가 맞아 떨어져 나간다면, 퍼즐 조각 안에 그려진 그림은 전체적인 이야기 맥락 안에서 더 깊이 들어가 세부적인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부연하자면 이야기 구조를 통해 전체 맥락을 맞춰 가는 퍼즐의 조각이 ‘모양’을 맞추는 것이었다면, 여기 퍼즐 조각에 그려진 그림은 전체 맥락이라는 커다란 틀 안에서 진행되는 세부적인 이야기를 이끌어가게 된다는 말입니다.
정리하자면, 퍼즐의 모양을 통해 전체적인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구조가 ‘공간’에 대한 것-사람 혹은 지명을 통해서 어떤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그림-이라면, 퍼즐에 그려진 그림을 통해서는 이야기가 진행되는 과정, 즉 ‘시간’을 통해서 이야기를 이끌어나간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의 사건, 그러니까 요사리안의 천막에서 죽은 남자에 대한 사건을 보자면, 애초에 그 남자에 대한 이야기는 공간적으로 여러 사람의 입을 통해서 등장하게 됩니다. 그 남자와 관련되었거나, 그 남자를 직접 보았거나 한 인물들이 그 남자에 대한 언급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때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이 남자에 대한 이야기는 시간적으로 뒤섞여 있습니다. 그들은 공간적으로 관계적으로 죽은 남자와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이야기 당시에 그 사람이 속한 시간 하에서 그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조각 A의 이야기’, ‘조각 B의 이야기’…. 하는 식으로 나오는 전체적인 맥락 안에서의 이야기이지요.
그런데 이미 앞에서 여러 번 언급되었지만 한 번도 <진행>된 적이 없었던 죽은 남자에 관한 이야기가, 그 남자를 행정적으로 처리했어야 했으나 그러지 못했던 인물(조각 C)이 나오면서 비로소 <진행>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죽은) 그 남자가 어떻게 그곳에 가서, 어떤 과정을 통해 죽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지요. 이 때 이 이야기는 다른 인물들에게 알려지지 않거나 비밀로 부쳐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어쨌거나 그들은 전쟁 중이니 당연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혹은 전쟁을 빌미로 잘못된 일을 암암리에, 공공연하게 덮는 것일 수도 있지요.
♨ 혹은 편집되지 않은 채 촬영된 순서대로 돌아가는 필름…?
여러 곳에서 여러 사람이 언급을 하는 어떤 인물, 어떤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데, 그 당시에는 아직 진행되지 않았거나, 혹은 이미 진행되어 결과가 나타나 버렸거나 한 상태로 등장합니다. 그러다가 비로소 그 열쇠를 쥐고 있는 인물이 나오면 언급된 내용의 전모가 온전한 시간 순서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영화를 상황과 여건이 되는 대로 찍어 놓기만 한 채, 편집되기 이전의 필름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 같습니다.
영화는 일단 장소나 스케줄에 따라서 ‘어떤 장면 A’을 찍게 됩니다. 그런데 그 장면에서 ‘어떤 사건 B’는, 이야기 속에서 시간적으로 ‘어떤 장면 A’보다도 선행할 수도 있고, 후행할 수도 있으며, 혹은 감추어졌거나 알려지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배우들은 이미 그러한 상황을 숙지한 상태로 그 장면에 맞는 역할을 연기하게 됩니다.
그 필름을 그저 순서대로 보는 사람은 ‘어떤 사건 B’의 전모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저 그 사건의 전조라든가 그 사건의 결과나 파장을 볼 뿐인 것이지요. 그러다가 ‘어떤 사건 B’를 찍은 필름을 만나게 되면, 그 때에야 비로소 그 사건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전에 보았던 ‘어떤 장면 A’ 속에서 가졌던 ‘어떤 사건 B’의 의미를 뒤늦게 알아차리고, 그 의미에 따라 그 장면의 의미를 다시금 재구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 퍼즐 혹은 필름이 담고 있는 ‘정신없는 구조’가 폭로하는 것
장면과 장면이 품고 있는 상황이 매우 재미있고, 거기에서 드러나는 캐릭터들의 성격과 재담도 상당히 뛰어나게 구현/구사되고 있기 때문에, 장면과 장면을 읽는 데에는 커다란 부담이 없습니다. 다만 뒤늦게 밝혀지거나 언급되는 내용을 통해서 이전 장면과의 관계나 성격을 얽는 것이 조금 부담스러울 뿐이지요. 그렇지만 이 부담스러움이야말로 이 작품이 지니고 있는 개성과 본질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전쟁’이라는 것이 국가가 선정하는 대로 ‘국가라는 우리의 이익집단을 위해 어떤 숭고한 희생을 감행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이라는 것은 ‘참으로 두서없고’, ‘논리라고는 조금도 없으며’, ‘소수 인간의 추악한 욕망을 채우기 위해 다수의 인간이 ‘도무지 영문도 모른 채’ 스스로의 생명을 희생하거나 희생할 것을 강요당하고 있는 부조리극’이라는 사실을, 이 작품은 폭로하고 싶은 것입니다. 아니 폭로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부조리를 ‘체험’시키고 싶은 것에 가까운 지도 모르겠습니다.
♨ 캐치-22 : 제 잇속을 차리기 위해 사람들이 빚어 놓은 절대 권력
작품 초반에 언급되는 ‘캐치-22’는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전쟁이라는 과업을 수행하리오’라는 전제 하에, 멀쩡한 사람들로 하여금 (죽기 전에는) ‘절대로’ 전쟁에서 빠져나갈 수 없도록 만드는 규율로 존재했습니다. 그런데 작품 후반에 이르면, 로마에 있는 창녀들을 몰아내는 군인들이 또다시 ‘캐치-22’를 언급하는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이 때 등장하는 ‘캐치-22’는 이전에 등장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업그레이드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잠깐 언급된 부분을 인용해 보도록 하지요.
“캐치-22요. 캐치-22에서 밝히는 바로는 우리들이 말릴 수 없는 것은 무엇이나 다 할 수 있는 권리가 그들이게 있다오.”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시는 거예요?” 요사리안은 당황하고 화가 나서 그녀에게 소리쳤다. “그것이 캐치-22인 줄은 어떻게 알았나요? 그것이 캐치-22라고 도대체 누가 얘기를 하던가요?”
“딱딱하고 하얀 모자를 쓰고 몽둥이를 든 군인들요. 여자들은 울고 있었다오. ‘우리가 뭘 잘못했나요?’ 하고 그들이 물었죠. 남자들은 아니라고 그러면서 몽둥이 끝으로 그들을 문 밖으로 밀어냈다오. ‘그렇다면 왜 우릴 몰아내나요?’ 여자들이 물었어요, ‘캐치-22요.’ 남자들이 말했죠. ‘무슨 권리로 이래요?’ 여자들이 물었어요. ‘캐치-22요.’ 남자들이 말했고요. 그들이 자꾸만 하는 얘기라곤 ‘캐치-22, 캐치-22’뿐이었다오. 캐치-22라니, 그게 대체 무슨 뜻인가요? 캐치-22가 뭐예요?”
“그것을 당신들한테 보여 주지 않던가요?” 분노와 실망을 느끼며 오락가락하던 요사리안이 물었다. “그것을 읽어달라고 하지도 않으셨어요?”
“그들은 우리한테 캐치-22를 보여 줄 필요가 없다오.” 늙은 여인이 대답했다. “그럴 필요가 없다고 법에 정해져 있으니까요.”
“그럴 필요가 없다고 어떤 법이 그래요?”
“캐치-22요.”
“아, 염병할!” 요사리안은 고통스럽게 소리를 질렀다. “그런 건 아마 있지도 않았을 거예요,”
이제는 그것이, ‘우리들이 말릴 수 없는 것은 모든지 할 수 있도록 규정되어 있는 법률’로서 등장하게 된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지경에 이르면 누구도 ‘캐치-22’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는 없지요. <그것이 무엇인지도, 또 무엇에 근거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명령하는 것은, 그 명령의 권한으로, 누구도 어길 수 없다.>는 절대적인 경지의 ‘폭-권력’이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지닌 부조리함은, 논리적 모순이라는 위태로우면서도 공고한 원리에 기반하고 있던 초반의 그것을 훌쩍 뛰어넘습니다. 너무나 말도 안 되는 것이 너무나 말이 잘 되는 양 행세하는, <숨 막히는 경지>를, 독자는 온몸으로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가만히 보면, 그들이 주장하는 캐치-22의 논리는 ‘국가’를 위한 희생을 강요하는 논리와 기가 막히게 닮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국가와 자기 자신을 동일시 해서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치라고 요구하는 파렴치한 캐스카드 대령과 콘 중령의 주장이 터무니 없이 들리지만도 않는 것이지요. 그러고 보면 이 작품이, 캐치-22라는 명백한 논리적 모순을 통해서 드러내고자 한 것은,
“국가 혹은 집단을 위한 맹목적인 희생은 결국 소수의 탐욕스러운 배를 불려줄 뿐이다. 인간은 그러한 ‘있지도 않은 허상’을 거부하고 그 자신의 자존을 위해, 행복을 위해 살 권리가 있다.”라는 주장은 아니었을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