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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와일드 작품선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22
오스카 와일드 지음, 정영목 옮김 / 민음사 / 2009년 9월
평점 :
<행복한 왕자> - 루비를 들고 있고 사파이어 눈동자를 갖고 있으며 금박을 입은 ‘행복한 왕자 동상’은 제비와 인연을 맺게 됩니다. 두 눈을 잃은 그를 위해 제비가 이집트 등지의 신기한 이야기를 해주자, 왕자는 제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나한테 놀라운 것들을 이야기해 주는구나. 하지만 무엇보다 놀라운 건 저 사람들이 겪는 고통이란다. 저 고통보다 큰 수수께끼는 없어. 내 도시 위를 날아다녀 보렴, 귀여운 제비야. 그리고 거기서 본 걸 나한테 이야기해 줘.”
일견 이 작품은 우화적으로 ‘인간이 갖추어야 할 도덕성과 진정한 행복’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도 같습니다. 하여 교과서처럼 고루하기만 할 뿐 재미도 없고 전형적이기만 오지게 전형적인 이야기로 보일 수 있는 면도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제비와 왕자가 다시금 재회하는 장면을 보면서 느끼게 되는 ‘씁쓸하면서도 뜨거워지는 감정’의 묘한 결합은, 이 작품을 단순히 ‘도덕적인 우화’로 치부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 왕자가 도시를 내려다보며 고통스러워한 까닭이 무엇인지, 왕자와 제비가 스스로를 희생하여 얻은 것이 무엇인지가 동시적이고 복합적으로 엄습하기 때문입니다.
<아서 새빌 경의 범죄> - 운명이 그에게 죄를 뒤집어씌운 걸까요, 아니면 그가 운명에게 죄를 뒤집어씌운 걸까요. ‘살인’이라는 한 마디가, 아서 새빌 경의 삶 속으로, 뜬금없고 괴상한 양상을 하고 파고듭니다. 그 단어는 손톱 밑에 끼어 계속 통증을 유발시키는 이물질같이, 그의 삶에 끼어들어 아서 새빌 경을 고통스럽게 만듭니다. 하여, 그는 ‘당당하고’도 ‘용감하게’ 그의 고통과 대면해 승리를 쟁취합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정말 어이없는 결론이지만, 이토록 고결하고 순수한 캐릭터가 나타나 그러한 결론에 속절없이 다다르는 것을 볼 때마다, 작가의 역량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분명 그 결론이 어처구니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그 캐릭터에게 그 결론은 합리적이다 못해 타당하다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게 되니 말입니다. 생각할수록, 참, 괴상한 메커니즘입니다.
<비밀 없는 스핑크스> - 몇 장 되지 않는 이야기 속에 ‘특정 캐릭터’가 내밀하게 갖고 있는 비밀에 대해서 생각해 보도록 만듭니다. 어떤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 갖고 있는 최대의 비밀이 ‘바로 그것’이었다는 점이 다소 황당하기도 하지만, 어떤 면에서 참 슬프기도 해서, ‘이건 뭥미? 헐~’ 하고 넘겨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 어떤 은밀한 수수께끼도 없다는 건, 참 외로운 일이니까 말입니다.
<캔터빌의 유령> -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어?!” 이 소설을 읽고 있는 도중에 절로 튀어나온 말입니다. 물론, 이 말은 캔터빌의 유령이 했을 법한 말이기도 하지요.
물질주의적이고 실용주의적이며 유럽의 전통적인 것을 약간은 ‘불필요한 것들’로 치부하는 듯한 미국 목사 가족이, 유령이 살고 있는 캔터빌의 저택으로 이사 오면서 생기는 다양한 일들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유령은 그 자신의 본분을 다하기 위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더러는 죽음까지 이르게도 만들어왔습니다. 역사적인 맥락을 갖고 있는 다양한 분장을 동원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목사의 가족들은 미국의 실용적인 용품들을 통해 유령을 당황하게 만듭니다. 또 쌍둥이 꼬마들의 장난은 유령으로 하여금 깊은 실의에 빠지도록 만듭니다.
사실 유령은 사악한 캐릭터였습니다. 아내를 죽이기도 했지요. 그렇지만 읽는 내내 얄미운 미국 목사 가족 때문에 유령이 불쌍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너무나 애처로워서, 미국 가족이 좀 겁에 질려주었으면 속이 다 시원하겠다! 라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생각보다 착한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권위라는 권위는 다 잃은 불쌍한 유령에게 평화가 깃들게 되는 것이지요. 매우 흥미롭고, 웃기기도 하며, 한편으로는 애처롭고, 다른 한편으로는 풍자 때문에 키득거리게도 되는, 놀라운 작품입니다. 고전적이면서도, 절대로 따분하지 않습니다.
<모범적인 백만장자> - 'millionaire models'와 'model millionaires'를 두고 말장난을 한다고 치면, 이런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요? 그렇지만 이 작품은 말장난에서 나온 재미있는 이야기로 치기에는,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너무 많습니다.
무엇보다도 가난하지만 죽도록 아름답고, 성품 또한 온화하고 고결하기 짝이 없어, 그 자신은 전차 대신 걸어서 다닐지언정 모델로서 1실링을 버는 가난하고 늙은 거지 노인에게 자신의 차비인 금화 한 닢을 내미는 데 주저하지 않을 지경입니다. 그럼에도 그를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속에는 어떤 우월감이라든지 선행에 대한 의식이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비극적인 운명에 대한, 처지에 대한 안타까움만이 느껴질 뿐입니다. 그 점이 바로 휴기를 더욱 고상하게 만드는 요인이 아닐까 합니다. 게다가 노인의 정체를 알게 되었을 때 화를 내기도 하고 부끄러워하기도 하며 이내 정중하고도 진심어린 사과를 하는 것을 볼 때,
백만장자의 변덕으로 거지 분장을 하고 있던 남작이, 휴기에게 반한 것은 자연스럽고도 당연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모델 백만장자였던 이 노인 역시 백만장자 모델로서 전혀 부족함이 없어 보입니다. 그 사이에서 그들을 맺어주는 역할을 하게 되는 예술가 친구도 매우 흥미롭습니다. 사연을 알고 나서 호탕하게 웃어대는 그 호방함도 시원시원하고 말입니다.
단순한 이야기를 단순한 이야기로 그치지 않게 해주는 것은, 바로 이 캐릭터들의 생생함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아, 정말, 예뻐요, 예뻐.
<살로메> - 작품을 읽기도 전에 접하게 되는 삽화 때문일까요, 읽는 내내 그로테스크한 분위기에 압도당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분위기는 온통 음산하고, 무언가 불길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으며, 죽음의 신이 옷자락을 풀럭거리며 다니는 듯합니다.
헤롯의 조카이자, 현재 헤롯의 아내인 헤로디아의 딸인 살로메는 자신을 야릇하게 바라보는 헤롯왕 때문에 연회장에서 빠져 나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우물에 갇힌 예언자 요카난을 만나게 됩니다. 그녀는 그에게 사랑을 고백하지만, 요카난은 그녀를 죄악과 동일시하여 피합니다. 그녀는 그에게 반드시 그 입술에 입을 맞추고 말겠다고, 이야기 합니다. 애초에 부탁이었던 그녀의 그 ‘조름’은 반복을 통해 반드시 실현시키고야 말겠다는 무서운 저주처럼 들립니다. 그리고 마침내 헤롯이 그녀에게 춤을 춰달라고 부탁했을 때,
요카난의 머리는, 이미 은쟁반 위에 올려진 것과 다름없었지요.
성경에서 읽은 바 있는 매우 익숙한 이야기입니다만, 이 작품 속에서의 요카난은 성경 속 예언자 세례 요한이 아니라 다른 캐릭터로 느껴집니다. 뭐랄까…… 살로메에게 그러지 말라고(사랑을 고백하지 말라고), 저리 가라고 말할 때의 그 말투가 마치, 거룩한 성자나 예언자의 그것이 아니라 연약하고 겁 많은, 그래서 조금은 비겁하기도 한 연인의 그것 같이 느껴진다고나 할까요.
살로메는 매우 창백한 얼굴을 하고 나타나는데, 이 창백한 얼굴은 처녀의 아름다움을 갖고 있는 달과 유사하게 그려집니다. 그녀를 사랑하는 근위대장은, 달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그녀를 비유에 끌어들이기도 하지요. 하여, 이 작품에서 ‘달’과 ‘살로메’는 아름답고도 불길한 존재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고 보아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달에게서, 헤로디아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시종일관 ‘이상한’ 모습을 발견합니다. 죽음의 그림자를 읽는 것이지요.
작품 초반에 묘사된 대로 죽음을 부르는 달은, 살로메 자신이었고, 하여 그녀는 자신을 사랑하던 근위대장과 자신이 사랑하게 된 요카난의 죽음을 야기합니다. 그녀는, 두 사람의 피 웅덩이 위에, 여신처럼 맨발을 듣고 선 것이지요.
특히 작품 후반에서 요카난의 입술에다 대고 사랑과 비극을 읊는 살로메의 고백은, 연약하고 겁 많은 연인을 폭력적으로 쟁취해낸다는 점에서 어딘지 모르게 불경스러운 에로틱함을 풍기는 것 같습니다. 넘쳐흐르는 ‘피의 끈적거림’을 ‘체액의 비릿한 끈적거림’으로 바꾸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헤롯의 ‘마지막 처단’은, 살로메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
살로메의 목소리 아! 나는 당신에게 입을 맞추었어. 요카난, 당신 입에 내 입을 맞추었어. 당신 입술에서는 쓴 맛이 나네. 피의 맛인가? ……아니, 어쩌면 사랑의 맛일지도 몰라……. 사람들은 사랑에서 쓴 맛이 난다고 하지……. 하지만 무슨 상관인가? 무슨 상관인가? 나는 당신에게 입을 맞추었는데. 요카난, 당신의 입에 내 입을 맞추었는데.
달빛은 구원처럼 내려와 그녀를 비춥니다.
헤롯이 더 이상 그녀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이미 그녀는 이렇게 도발적이고 에로틱한데 말입니다.
<진지해지는 것의 중요성> - 모범적인 백만장자에서도 언어유희에 기반을 둔 작품 구성이 보였습니다만, 이 작품만큼 언어유희와 작품이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작품은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어니스트라는 이름을 두고 벌어지는 희극은 상류 사회에 대한 풍자를 기본으로 합니다. 허례와 허식에 쌓여서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사람들에 대하여 한 방 먹이는 것이지요. 물론 그 한 방의 주체는 진실함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니, 이 경우에 있어서는 진지해지는 것이라고 해야겠군요.
똑같이 반복되는 행위들이 갖고 있는 코믹함과 희극성, 그리고 그 저변에 흐르는 풍자성은 작품을 매우 재미있게 해줍니다. (회사에서 읽는 게 아니었으면, 떠나가라고 깔깔거리며 봤을 겁니다. 아, 회사에서 읽고 있는 게 참 안타깝네요.) 그리고 극 말미에 이르러 잭과 앨저넌이라는 남자들이 왜 그렇게 똑같은 행위를 반복했는지를 알게 해주는 심리적인 근거가 등장하게 되면, 행복은, 이제 클라이맥스를 이룹니다. 정말 유쾌하고 재미있는 작품입니다. 비록 좀 짓궂기는 하지만, 사랑스럽기도 하고 말이죠.
+++ “신고할 것이라고는 내 천재성밖에 없다”는 말이 그의 말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에 대한 설명이라고는 분명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과연 이 작품들이 19세기 작품들이 맞나 싶을 정도로, 세련되고 풍부한 블랙코미디 요소를 품고 있으니 말입니다. 두고두고 읽어도, 두고두고 재미있을 작품입니다.
오스카 와일드,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