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라이트 마일 밀리언셀러 클럽 85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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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라이트 마일>에서 눈에 띄는 변화는, 단연 세월의 흔적이다. <가라, 아이야 가라>의 아만다 맥크레디 사건을 해결한 지 12년이 지났다. 켄지와 앤지는 부부가 되어 있고 딸내미도 하나 키우고 있다. 그리고 켄지와 앤지 위로는 피로한 생활의 무게가 짙은 그림자가 되어 드리우고 있다. 켄지는 '정규직'이 되어야 할 의무가 있는 가장의 책임을 다 하느라 파김치가 되어 있다. 그를 움직이는 것은 더 이상 '놀이'가 아니라 '의무와 책임, 생활'이다.


관계에서의 변화뿐만 아니라 배경의 변화에도 눈이 가지 않을 수 없다. 컴퓨터를 갖고는 있지만 컴맹에 다름 아니어서, 컴퓨터 관련된 일이라면 허구헌 날 리치 콜맨에게 신세를 지던 켄지는, 이제 랩탑을 들고 다니고 트위터 정도는 가볍게 이해하는, '비정규 직장인'이다. 그를 둘러싼 세계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그 세계와 매우 흡사하고 속도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흥미로운 것은 '계급적 갈등'이 드러난다는 점이다. 켄지가 '정규직'이 되지 못하는 것은, 그가 상위 계급에 대한 분노를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가 속해 있는 회사의 인사 담당자는 말)한다. 비위脾胃 맞춰주어야 할 때 맞춰주지 못하기도 하지만, 비위非違에 눈감아야 할 때 감지 못하기도 하는 탓이다. '정규직'들의 시선으로 보자면, 켄지는 한 번쯤 유용하게 써 먹을 수 있는 사람이지만 곁에 두기에는 너무 위험한 사람이다. 암암리에 용인되는 것들을 용인하지 않기 때문에. 그러면서도 켄지는 '비정규직'들에게 이미 '거칠게 놀기에는 간이 작아진 놈'이면서 '정규직들의 세상에 알랑거리는 놈'으로 평가된다. 한때는 무서운 놈이었고 잘 나가는 놈이었지만, 그 모든 것이 과거형이 되어버린 것이다. - 켄지는 '정규직의 세계'에도 끼지 못하고 그렇다고 '비정규직의 세계'에도 끼지 못하는, 어중간하고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적어도, '맥크레디'라는 성을 가진 사람과 다시 얽히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그저 그런 상태였던 것이다.


어느 날 밤 걸려온 술 취한 베아트리체 맥크레디의 전화 한 통, 그리고 그녀와의 만남. 그러나 적어도 그는 이 때까지만 해도 자신의 불안정한 일상을 깨뜨릴 생각이 없었다. 현실적인 부담이 그의 두 어깨를 누르고 있었던 탓이다. 그러한 부담을 더해주는 한편 떨치게도 만들어준 것은 작은 도박, 작은 도발이었다. 노숙자가 켄지의 랩톱 가방을 훔쳐갔고 그것을 찾으러 갔다가 '된통' 당하게 된 것이다, 아직 하려고 마음 먹지도 않은 '맥크레디 일'에서 손을 떼라는 명목으로 말이다.


켄지의 뚜껑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는 랩톱을 찾고 싶었다. 그는 부바와 함께 랩톱을 찾으러 가고, 거기에서부터 지긋지긋한 맥크레디와의 인연이 다시 그의 발목을 칭칭 감아들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인연에 있어 켄지는 분명 '수동태'가 아닌 '능동태'다. 켄지와 제나로는 12년 전 그들이 아만다 맥크레디에게 저지른 일을 두고서, 그날 그때까지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켄지를 사건으로 끌어들인 것은 호기심(탐정 놀이)이기도 하면서, 스스로 오랫동안 붙들고 있었던 물음에 대한 답변을 구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아만다 맥크레디로 대명되는 이 물음은 해결하기 어려워 보이는 모순이다.


"착한 유괴"


<가라, 아이야 가라>에서 벌어진 아만다 납치 사건은 '착한 유괴'라고 할 수 있었다. 아이를 학대 수준까지 방임하는 부모에게서 아이를 구출해 아이를 정말로 사랑하는 가정에 데려다 주는 것. - 이것이 바로 착한 유괴다. 켄지와 제나로 커플을 한 번 찢어 놓았던 문제이기도 했고, 그들을 한 번도 놓아준 적이 없는 (=그들이 한 번도 놓아본 적이 없는) 문제이기도 했다. 켄지는 12년 전, '착한'에 방점을 찍은 제나로와 갈라서면서, 그 행위에 대해 '유괴'라는 의미를 부여했었다. <가라 아이야 가라>가 끝나면서도, 또 <비를 바라는 기도>에서도, 그는 스스로의 행위가, 잘 한 것인지 아니면 잘못한 것인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물론 이 혼란은, 이 고민은, 켄지의 것이면서도 동시에 데니스 루헤인의 것이었으리라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다.


12년 전 내 판단은 틀렸다. 4400일이 지나는 동안 난 매일 그 사실을 확신했다.

하지만 동시에 내 판단은 옳았다. 아만다를 납치범들에게 남겨두었다면, 아무리 잘 돌봐준다 해도 납치범들일 뿐이다. 그녀를 되찾은 후 4400일 동안 이 이론 역시 사실임을 확신했다. 그럼 뭐가 남는 거지?


<가라 아이야 가라>에서 이 문제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밝힐 수 없었던 아만다는 다 자라서 똑같이 '착한 유괴'의 문제에 당면해, '아이 입장'에서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넌 그 애를 납치했어."

"아저씨도 날 납치했잖아요."

목소리 하나 높이지 않았지만 그런데도 사방 벽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그녀의 입술이 떨리고 눈이 붉어지고 전율이 두 손을 훑었다. 극도로 통제된 분노 외에 내 앞에서 감정을 드러낸 것은 처음이었다.

내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납치했어요. 패트릭 아저씨. 정말로요." 그녀가 코로 습한 공기를 빨아들이고 한동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아저씨가 무슨 자격으로 내 집이 어디인지 결정하죠? 도체스터는 내가 태어난 곳이에요. 나를 낳은 건 헬렌이지만 난 분명 *과 **** **의 아이였어요."


그녀는 켄지에게 어째서 자신을 돌려 보냈느냐고 묻는다. 거기에 대한 켄지의 대답은 '상황 윤리냐 사회 윤리냐에서 후자를 택한 것'이라고 답변한다. 그에게도 무기력하게 들리는 답변. 켄지는 아직까지도 '착한 유괴'라는 모순에 찢기고 있을 뿐 어떤 선택을 내려야하는지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아만다는, 고작 16살이지만, 거기에 대해 분명한 대답을 알고 있다.1 그녀는 <가라, 아이야 가라>에서 처했던 상황 때문에, 누구보다도 그러한 대답을 주장할 권리가 있다.


"아이를 포기할 생각이 없지?"

"놈들이 내 몸의 뼈를 산산조각낸다 해도 끝까지 싸울 거예요. 혀를 잘라내면 잘린 혀로 비명을 지르고, 한눈을 파는 놈이 있으면 눈을 물어버릴 거예요."

"그래도, 저 아이를 포기하지 않을 거지, 아만다?"

그녀가 미소지었다.

"아저씨는요? 나 혼자 싸우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죠?"


켄지는 여기에서 처음으로 '머리로만 이해했던' 것, 그러니까 자신이 선택할 수 없었던 '착한 유괴'의 모순 너머의 어떤 것을, 선택할 수 있게 된다. 헬렌은 처참하게 실패했지만, 바로 그 실패 때문에, 누구보다도 강하고 헌신적인 어머니가 된 아만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 앞에서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다. '아이'보다도 더 소중한 가치는 없는 것이다. '착한 유괴'라는 선악의 뫼비우스 띠, 그는 이번에는 그것을 끊지 않기로 한 것이다. 모순인 것을 두고서 논리적인 결단을 내리는 대신 삶 자체로 끌어안기로 한 셈이다.   


♣ '늙는다는 건 정말 엿같은 일이다' - 켄지의 말대로, 우리의 주인공은, 주인공들은, 나이가 들어 벌써 사십대 초반이고, 가정도 이뤘으며 지켜야 하는 아이도 있다. 그들은 더 이상 위험을 무릅쓸 수 없다. 그들 자신만으로는 상관이 없었을지 모르지만, 그들이 지켜야만 하는데도 채 지킬 수 없는 존재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들은 더 이상 용감할 수가 없다. 부바 말대로 범생이가 될 수밖에 없다. 현실적으로야 십분 이해하고도 남는다. 암믄, 그래야지. 하지만 그 씁쓸함이란. 쓸쓸함이란. : 작가의 리얼리티는 트위터니 10대들이나 하는 현실의 반영뿐만 아니라 주인공들이 처해 있는 위치로도 뛰어나게 살아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켄지와 제나로는 분명 허구이지만, 우리와 똑같은 현실에 발을 딛고 서 있기 때문에. 


세월과 함께 흘러가버린 우리의 영웅 탐정들.

그들로 하여금, 이제, 그들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게 해야 할 것 같다, 개비의 바로 옆 자리에.

그래도, 인사는 제대로 해야지. 나름 한참 달려온 시리즈인데.


입으로 매를 버는 재간둥이 켄지, 안녕!

터프하고 똘똘한 매력으로 뭉친 제나로, 안녕!


+ 아이와 여자 앞에서 먹통이 되는, 뒷골목 건달 부바도 안녕!

+ 술집으로 잘 벌어먹고 산다는 데빈과 오스카도 안녕!


안녕.



이 대답을 알고 있는 것은 앤지도 마찬가지이다. 그녀는 여기에서 켄지와 결혼해 개비라는 네살짜리 딸아이를 두고 있다. 그 탓에 그녀는 수사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없고 이전처럼 매력적이고 멋진 모습을 뽐내지 못한다. 그녀는 엄마고 엄마 노릇으로 너무 바쁘다. - 그리고 이 설정은, 그녀의 팬이라면 다소 서운할 만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커다란 틀에서 볼 때 적절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착한 유괴'라는, 켄지가 (논리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모순에 대해, 엄마들은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심지어는 그 자신을 다 바쳐가면서까지도, 아이를 위한 답을 고수해 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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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를 바라는 기도 밀리언셀러 클럽 48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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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를 바라는 기도>가 시작되면 다소 고통스러운 장면이 안부를 전해온다. 켄지는 앤지와 헤어졌고 때때로 부바와 함께 다니며 누군가를 패거나 누군가에게 맞고 다닌다. 켄지의 인간에 대한 피로감은 이제 절정에 달해 있다. 그는 직업이나 일이라고 생각하기보다 놀이라고 생각해 빠져들었던 탐정 노릇에도 지쳐 있고, 큰일을 겪어 나가는 동안 보아야만 했던 인간의 추악한 모습과 그 속에 숨어 있는 인간적인 면모 때문에 고통 당하고 있다. 혼란스럽고 의욕도 없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한 여인의 전화 메시지를 지워버린다. 그리고 그 여인은 6개월 후 도시의 고층 빌딩에서 벌거벗은 채로 뛰어내린다. 


'그녀에게 대체 무슨 일이 생겼던 것일까'


사건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시리즈에서 처음으로, 의뢰인이 의뢰하지 않은 사건이, 윤리적인 목적에서부터 비롯되어, 수사되기 시작한 것이다. 탐정 사업이, 정말, 탐정 노릇 혹은 탐정 놀이(what's next?)로 변모되는 순간이다. 그리고 그 순간은 초심으로 돌아가기처럼 순수한 순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순간, 원칙과 윤리 사이의 갈등 때문에 자리를 비웠던 제나로도, 켄지의 곁으로 돌아온다. 그래서 때때로 켄지가 앞서 일어난 사건을 두고서 '과연 옳은 일을 한 것일까'라고 회의하는 장면은, 그것의 물리적인 크기와 상관없이, 퍽 중요한 장면으로 보이는 것이다. 제나로 역시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또 그때 그곳-<가라 아이야 가라>에서 그들이 다투었던 숲속, 웨스트베케트의 어느 집 부엌-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안해."

내가 말했다.

"뭐가?"

"작년에 숲에서 생긴 일들. 그리고 그 아이도."

"이젠 내가 옳았는지도 확신이 안 서는걸."

그녀가 내 눈을 보고 말했다.

"그건 왜?"

"글쎄. 신이 될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다는 생각 때문일까? 도우 부부를 봐."

내가 미소를 지었다.

"왜 웃어?"

나는 앤지의 오른손을 잡았다. 그녀는 눈을 깜빡였지만 손을 빼내지는 않았다.

"그냥... 지난 아홉 달 동안 조금씩 자기 입장에서 사건을 돌아보고 있었어. 어쩌면 상대적인 문제일 거야. 어쩌면 그 애를 그 집에 놔뒀어야 했는지도 몰라. 다섯 살이었고 행복해 보였으니까."

앤지가 어깨를 으쓱이고는 내 손을 쓰다듬었다.

"결국 우린 모르겠지?"


원칙과 윤리. 켄지와 제나로는 사립탐정들이지만, 그들이 고작 사립탐정에 지나지 않는 사람들이 아닐 수 있는 것은, 그들의 형이상학적 고민 때문이다. 사건은 단지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겪는 사건이며, 그래서 그것은 인간적인 문제가 된다. 형이상학적 고민이 싹트는 기반은 바로 거기인 셈이다.


 블록버스터급의 액션, 치사하도록 집요한 대결, 코너로 몰아넣고 턱 끝에 칼을 들이민 것 같은 긴장감. - 이야기는 여전히 엄청나게 재미 있었지만. 솔직히 말해 이 작품은 켄지&제나로 시리즈 중에서 가장 별로였다.


<어둠이여 내 손을 잡아라>의 G는 분명 싸이코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싸이코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맥락이 있었다. 그는 큰 판을 읽을 줄 아는 싸이코였다. 살인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그는 살인을 예술로 승화시킬 수 있는 그런 싸이코였다. 하지만 여기 <비를 바라는 기도>에서 나오는 속 싸이코는 어떤가. 그는 누구보다도 뛰어난 두뇌를 가졌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취할 수 있는 사악한 능력도 가졌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그저" 자신의 배를 불리는 데 이용했을 뿐이다. 그는 싸이코이되, 그저 조금 많이 똑똑한 싸이코에 지나지 않는다. 큰 판을 읽고 무언가 (그러니까 그것이 엄청나게 사악한 것이든 파괴적인 것이든) 강렬한 어떤 것을 창조해 낼 수 있을 만큼 뛰어난 싸이코는 못 되는 것이다. 그가 갖고 있는 능력이 아깝도록, 그들을 처치하기 위해 동원된 '블록버스터급의 액션'이 무색하도록, 쪼잔한 범죄자들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게다가 무술을 하고 심리전에 능하며 영혼을 꿰뚫어 볼 것 같은 매력을 갖고 있는 캐릭터가 고작 꼭두각시 허수아비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에, 그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었던 캐릭터가 갖고 있는 힘과 매력이 너무나 적다. 1000억짜리 회사를 먹은 것이 고작 1억짜리 회사였다더라, 하는 얘기를 듣고 앉아 있는 것만큼이나, 비현실적이어서 맥이 빠진다. 허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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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 아이야, 가라>를 읽기 전부터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이 책에 대해 내가 갖고 있는 기억에 대한 정서적인 반응이 그랬었다. 비록 한 번 읽은 것이 전부였지만 뼛속까지 스며든 피비린내는 그 한 번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욕조에 죽어 있는 여덟살짜리 작은 아이. 그리고 그 아이가 묶여 있던 침대. 침대 위에 얼룩져 있는 피와 체액들, 분비물들. 글자로 그려진 장면은 머릿속에서 스스로를 건축해 올렸다. 어두운 벽들. 뿌려진 피들. 그리고 마음은 그 속에서 인물이 되어 역겨운 냄새와 고통의 비릿함을 느끼게 된다. - 이것이 내가 이 책에 대해 갖고 있었던 정서적인 기억이었다. 끔찍함이었다.


어쨌거나 시리즈 순서대로 읽고 있어서인지, 초반에 사건을 맡기 전까지, 켄지와 제나로가 보여주는 '괴상한 변화'는 어쩐지 웃기면서도 무척이나 공감되는 것이었다. 앞선 세 작품 속에서 인물들이 어떤 대우를 받았고, 어떤 위험과 고통 속에 놓어 있었는지, 그리고 그것들이 그들에게 어떤 상흔을 남겼는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입장에서는, 고작 '이구아나'를 찾기 위해 골프장이나 헤매고 다니는 그들을 보면서, 짠하고 말랑해지는 마음이 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고통에 대한 두려움.


"우리 겁쟁이라도 된 걸까?"

"설마"


앤지의 물음에 대한 켄지의 대답은 그러나 '설마가 사람 잡는다'였을 테다. 그들은 두려웠다. 잃어버린 아이를 찾기 위해 나섰다가 아이의 시체를 발견하게 될까봐. 아니면 영혼까지 유린당한 아이를 발견하게 될까봐. 아직 G에 대한 기억이 생생한 이들에게, 그런 식의 반응은, 충분히 납득할 만한 것이다. 인간적인 것이다.


이야기에 빠져 들면서부터는, 두 번째 읽는 것이라 그랬을 테지만, 전보다는 덜 울렁거리는 기분으로, 벌어지는 사건들을 관찰해 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관찰이 쌓여 나가면서 조금씩 정서적인 충격도 가시기 시작했고 이야기에 가 있는 미세한 균열들이 신경쓰이기 시작했다. 지금껏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생각이었지만, 결국 하게 된 것은, 어쩐지 '끔찍한 사건에 시달려 피로해진 것이, 비단 켄지와 제나로만은 아니구나' 하는 것이었다.


데니스 루헤인에게서 부쩍 느껴지는 피로감.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아무래도 인간이라는 어두운 책 들여다보기, 정도가 되겠다. 사회라는 메커니즘으로는 절대로 해결할 수 없는, 인간이 안고 있는 본질적인 모순, 어두운 상처)와 장르가 갖고 있는 힘으로 인해 밀려 나고 끌려 가고 있는 이야기(는 어쩌면 반전을 염두에 둔 설정-<신성한 관계>-이라든가, 이해 불가능한 인간의 면모가 드러내 보이는 복합성-<어둠이여 내 손을 잡아라>) 사이에서 조금쯤 갈팡질팡 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스포일러 하고 싶지 않아서 두루뭉술 얘기하고 있는 것이 답답한 노릇이지만.

<신성한 관계>의 키워드("흑이 백이고, 백이 흑이며, 그래서 아무도 믿지 말아야 한다")야 추리소설, 탐정소설 같은 것들에서 빈번하게 보이는 룰 같은 것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보이는 대로 믿지 마라!-이라 크게 신경쓸 것은 없지만. <어둠이여 내 손을 잡아라>에서 보여주었던 '아버지의 이면'1은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의 모습을 드러내 보인다는 점에서 훨씬 복합적이고 효과적인 장치로 보인다. 전자와 후자는 각각의 작품 속에서 좋은 장치로 제역할을 충분히 했다. 그러자니 작가에게 욕심이 생겼던 것일까? <가라, 아이야, 가라>에서는 두 개의 키워드가 충돌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두 개의 사건을 꼬아 놓았는데 각각의 사건이 효과적으로 융합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가라, 아이야, 가라>는 전작들보다 물리적으로 이야기의 양이 늘어났고 화학적으로도 훨씬 더 복잡하게 꼬여 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정서적으로 가장 혹독하고 감각적으로도 충격적인 장면을 수반하는 인물군이, 켄지&제나로가 풀어나가고 있는 사건과 밀접하고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은, 어떤 변명으로도 납득될 수 없는 결함이다, 틈새다. - 애정을 걷어내고 말한다면, 사건에 감정이입하며 따라가고 있던 사람들에 대한, 기만이고 우롱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욕심이 과했던 탓이겠지. 아니면 기대가 과했거나.


 켄지는 바로 윗단락에서 말한 '정서적으로 가장 혹독하고 감각적으로도 충격적이 장면을 수반하는 인물군'들을 처치하고 나서, 그 작업에 동참했던 사람과 함께 놀이터 같은 곳에 앉아 서로의 상처 받은 마음을 나눈다. 처음에는 너무나 잔혹해서 누구에게도 전할 수 없었던 장면들 때문에 겪게 된 고통에 대해, 끔찍함에 대해 이야기가 오고가지만 술이 조금 더 들어가고 나서부터 이야기는 뜻밖에도 놀라운 '실언'으로 이어지게 된다. 켄지는 그리고 그 사람의 말 속에서 무언가 찜찜한 것, 이상한 것, 섬뜩한 어떤 것을 느끼게 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취기 탓에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서도 잠이 들지 못한 채로, 대체 무엇이 이상했던가를 골몰하기 시작한다.


그 대답이 인도하는 곳은 어쩔 수 없이 느끼게 되는 서글픔이다.

 

아마도 우리 모두2 엿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소심한 불모의 4인조. 무자식에다가 부모의 역할을 떠맡을 용기도 희생정신도 하나 없는 인생 떨거지들. 황야의 염탐꾼들.


원칙은, 논리는, 조금도 인간적이지 않다는 사실에 대한 재인식이다. 켄지는 그 사실 앞에 어쩔 수 없이 무릎을 꿇고 만다. 그가 알아차리게 된 사실이 아무리 끔찍하고 외면하고 싶고 고통스럽더라도, 그는 자신이 갖고 있는 인간으로서의 또 탐정으로서의 원칙 탓에, 어쩔 수 없이 사실을 만천하에 드러내 보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됐지? 우리가 웨스트베케트의 어느 집 부엌에서 저지른 것은 법적 양육권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부모의 손에서 아이를 강탈한 파렴치한 범죄가 아니었던가.


원칙적으로는 옳지만, 거기 어디 한 군데 인간적인 고려가 들어갈 여지가 없는 탓에, 그것을 고수하는 일은 고통스럽다, 쓸쓸하다, 회한에 차게 만든다. 그것들은 그렇게 울림이 크다.


 이전 작품들에서 데니스 루헤인이 들여다 보았던 것이 '증오와 분노(전쟁 전 한 잔)', '(아버지의) 얼굴이 숨기고 있던 이면(어둠이여 내 손을 잡아라)' 같은 것이었다면, 이번 작품에서 그가 들여다 본 것은 '사랑의 아이러니함'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이야기 속에서는 아이들이 사라진다. 아이들은 성욕이라든지 물욕이라든지 하는, 어른들의 추악한 욕망을 충족시켜주기 위해 사라지기도 하지만 때로는 전혀 다른 것에서 기반한 욕망으로 인해 사라지기도 한다. 아이를 구해주고 싶다거나 아이를 사랑으로 키워내고 싶다는 욕망. 다시 말해 사랑이다. 아이에 대한 사랑.


작품이 시작하자마자 성스럽도록 아름다운 장면을 그려 보여주는 모자母子가 등장한다. 어머니의 이름은 레이첼이다. 그녀는 이야기의 마지막도 장식하는데, 그녀가 하는 이야기는 이렇다.


"사람들은 매일 죽어요. 푼돈 5달러 때문에도 죽고, 잘못된 인연을 맺었다는 이유 때문에 죽고, 새우 때문에도 죽지 않나요? 죽는 것 가지고 사람을 평가해선 안 되죠."

"그럼 뭘로 평가해?"

누군가 외쳤다.

"죽이는 거요."

(몇 줄 생략)

"그래, 살인을 무릅쓸 정도의 일이 뭐지, 레이첼?"

레이첼이 미소짓는다. (한 줄 생략)

"가족이죠. 오직 가족뿐이에요."

(한 줄 생략)

"주저해도 안 되고, 후회해도 안 돼요."

레이첼이 말한다.

일말의 동정도 없이 죽여야 하죠.


레이첼이 드러내 보이고 있는 사랑은 물론 가족주의가 아니다. 그녀는 아이를 보호하고 잘 키워내야 한다는 강한 모성 본능에 기반해 거기에 거치적거리는 모든 것을 해치워버리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아이에 대해 드러내 보이고 있는 모성은 분명 일정 부분 숭고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랑에 기반하고 있으면서도 무자비하고 냉혹한 본능에 또한 기대고 있다. 사랑의 아이러니한 얼굴. - 켄지가 '법적 양육권이 없다고 부모에게서 아이를 강탈한 것이 아닌가' 하고 회의하게 되는 지점도 여기 어디에 그 근거를 두고 있어 보인다.  



+ 오탈자 있는 거야 그렇다고 쳐도, 시리즈 번역을 한 사람이 맡았고 또 한 출판사가 했으면, 인물들 이름은 좀 통일시켜 주어야 하지 않을까? 이루 말할 수 없이 사소하기는 하지만, 이런 것 하나 거르면, 얼마나 성의가 없어 보이는지, 좀 알아주셨으면 좋겠다. 



1. 이 표현은 당연히 켄지의 아버지에 대한 것이면서 동시에 아버지와 비슷한 역할을 담당하는 인물군에 대한 것이다.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한 스포일러가 되고 있어 마음이 편하지 않다. 추리소설에 스포일러라니!


2. 우리라고 지칭된 것은 켄지와 앤지, 데빈과 오스카다. 그들은 사랑과 평화로 화목한 울타리를 두르고 있는 가정의 한 저녁 시간-부엌-을 들여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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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 아이야, 가라 2 밀리언셀러 클럽 47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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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말하고 싶은 메시지와 탐정 소설이라는 장르 사이의 미세한 불협화음이 신경을 건드리는데도 나는 밤새 읽고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미 읽었던 작품이고. 기억이 생생한데도. 그런데도 재밌게 읽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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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 아이야, 가라 1 밀리언셀러 클럽 46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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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들보다 덩치도 커지고 복잡해지기도 하면서 이야기가 훨씬 흥미진진해졌다. 장르적인 특성과 작가의 욕심 때문에 이야기의 미세한 균열이 감지되는 듯도 하지만. 여전히 엄청나게 끔찍하고, 엄청나게 재미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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