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 아이야, 가라>를 읽기 전부터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이 책에 대해 내가 갖고 있는 기억에 대한 정서적인 반응이 그랬었다. 비록 한 번 읽은 것이 전부였지만 뼛속까지 스며든 피비린내는 그 한 번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욕조에 죽어 있는 여덟살짜리 작은 아이. 그리고 그 아이가 묶여 있던 침대. 침대 위에 얼룩져 있는 피와 체액들, 분비물들. 글자로 그려진 장면은 머릿속에서 스스로를 건축해 올렸다. 어두운 벽들. 뿌려진 피들. 그리고 마음은 그 속에서 인물이 되어 역겨운 냄새와 고통의 비릿함을 느끼게 된다. - 이것이 내가 이 책에 대해 갖고 있었던 정서적인 기억이었다. 끔찍함이었다.


어쨌거나 시리즈 순서대로 읽고 있어서인지, 초반에 사건을 맡기 전까지, 켄지와 제나로가 보여주는 '괴상한 변화'는 어쩐지 웃기면서도 무척이나 공감되는 것이었다. 앞선 세 작품 속에서 인물들이 어떤 대우를 받았고, 어떤 위험과 고통 속에 놓어 있었는지, 그리고 그것들이 그들에게 어떤 상흔을 남겼는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입장에서는, 고작 '이구아나'를 찾기 위해 골프장이나 헤매고 다니는 그들을 보면서, 짠하고 말랑해지는 마음이 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고통에 대한 두려움.


"우리 겁쟁이라도 된 걸까?"

"설마"


앤지의 물음에 대한 켄지의 대답은 그러나 '설마가 사람 잡는다'였을 테다. 그들은 두려웠다. 잃어버린 아이를 찾기 위해 나섰다가 아이의 시체를 발견하게 될까봐. 아니면 영혼까지 유린당한 아이를 발견하게 될까봐. 아직 G에 대한 기억이 생생한 이들에게, 그런 식의 반응은, 충분히 납득할 만한 것이다. 인간적인 것이다.


이야기에 빠져 들면서부터는, 두 번째 읽는 것이라 그랬을 테지만, 전보다는 덜 울렁거리는 기분으로, 벌어지는 사건들을 관찰해 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관찰이 쌓여 나가면서 조금씩 정서적인 충격도 가시기 시작했고 이야기에 가 있는 미세한 균열들이 신경쓰이기 시작했다. 지금껏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생각이었지만, 결국 하게 된 것은, 어쩐지 '끔찍한 사건에 시달려 피로해진 것이, 비단 켄지와 제나로만은 아니구나' 하는 것이었다.


데니스 루헤인에게서 부쩍 느껴지는 피로감.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아무래도 인간이라는 어두운 책 들여다보기, 정도가 되겠다. 사회라는 메커니즘으로는 절대로 해결할 수 없는, 인간이 안고 있는 본질적인 모순, 어두운 상처)와 장르가 갖고 있는 힘으로 인해 밀려 나고 끌려 가고 있는 이야기(는 어쩌면 반전을 염두에 둔 설정-<신성한 관계>-이라든가, 이해 불가능한 인간의 면모가 드러내 보이는 복합성-<어둠이여 내 손을 잡아라>) 사이에서 조금쯤 갈팡질팡 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스포일러 하고 싶지 않아서 두루뭉술 얘기하고 있는 것이 답답한 노릇이지만.

<신성한 관계>의 키워드("흑이 백이고, 백이 흑이며, 그래서 아무도 믿지 말아야 한다")야 추리소설, 탐정소설 같은 것들에서 빈번하게 보이는 룰 같은 것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보이는 대로 믿지 마라!-이라 크게 신경쓸 것은 없지만. <어둠이여 내 손을 잡아라>에서 보여주었던 '아버지의 이면'1은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의 모습을 드러내 보인다는 점에서 훨씬 복합적이고 효과적인 장치로 보인다. 전자와 후자는 각각의 작품 속에서 좋은 장치로 제역할을 충분히 했다. 그러자니 작가에게 욕심이 생겼던 것일까? <가라, 아이야, 가라>에서는 두 개의 키워드가 충돌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두 개의 사건을 꼬아 놓았는데 각각의 사건이 효과적으로 융합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가라, 아이야, 가라>는 전작들보다 물리적으로 이야기의 양이 늘어났고 화학적으로도 훨씬 더 복잡하게 꼬여 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정서적으로 가장 혹독하고 감각적으로도 충격적인 장면을 수반하는 인물군이, 켄지&제나로가 풀어나가고 있는 사건과 밀접하고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은, 어떤 변명으로도 납득될 수 없는 결함이다, 틈새다. - 애정을 걷어내고 말한다면, 사건에 감정이입하며 따라가고 있던 사람들에 대한, 기만이고 우롱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욕심이 과했던 탓이겠지. 아니면 기대가 과했거나.


 켄지는 바로 윗단락에서 말한 '정서적으로 가장 혹독하고 감각적으로도 충격적이 장면을 수반하는 인물군'들을 처치하고 나서, 그 작업에 동참했던 사람과 함께 놀이터 같은 곳에 앉아 서로의 상처 받은 마음을 나눈다. 처음에는 너무나 잔혹해서 누구에게도 전할 수 없었던 장면들 때문에 겪게 된 고통에 대해, 끔찍함에 대해 이야기가 오고가지만 술이 조금 더 들어가고 나서부터 이야기는 뜻밖에도 놀라운 '실언'으로 이어지게 된다. 켄지는 그리고 그 사람의 말 속에서 무언가 찜찜한 것, 이상한 것, 섬뜩한 어떤 것을 느끼게 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취기 탓에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서도 잠이 들지 못한 채로, 대체 무엇이 이상했던가를 골몰하기 시작한다.


그 대답이 인도하는 곳은 어쩔 수 없이 느끼게 되는 서글픔이다.

 

아마도 우리 모두2 엿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소심한 불모의 4인조. 무자식에다가 부모의 역할을 떠맡을 용기도 희생정신도 하나 없는 인생 떨거지들. 황야의 염탐꾼들.


원칙은, 논리는, 조금도 인간적이지 않다는 사실에 대한 재인식이다. 켄지는 그 사실 앞에 어쩔 수 없이 무릎을 꿇고 만다. 그가 알아차리게 된 사실이 아무리 끔찍하고 외면하고 싶고 고통스럽더라도, 그는 자신이 갖고 있는 인간으로서의 또 탐정으로서의 원칙 탓에, 어쩔 수 없이 사실을 만천하에 드러내 보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됐지? 우리가 웨스트베케트의 어느 집 부엌에서 저지른 것은 법적 양육권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부모의 손에서 아이를 강탈한 파렴치한 범죄가 아니었던가.


원칙적으로는 옳지만, 거기 어디 한 군데 인간적인 고려가 들어갈 여지가 없는 탓에, 그것을 고수하는 일은 고통스럽다, 쓸쓸하다, 회한에 차게 만든다. 그것들은 그렇게 울림이 크다.


 이전 작품들에서 데니스 루헤인이 들여다 보았던 것이 '증오와 분노(전쟁 전 한 잔)', '(아버지의) 얼굴이 숨기고 있던 이면(어둠이여 내 손을 잡아라)' 같은 것이었다면, 이번 작품에서 그가 들여다 본 것은 '사랑의 아이러니함'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이야기 속에서는 아이들이 사라진다. 아이들은 성욕이라든지 물욕이라든지 하는, 어른들의 추악한 욕망을 충족시켜주기 위해 사라지기도 하지만 때로는 전혀 다른 것에서 기반한 욕망으로 인해 사라지기도 한다. 아이를 구해주고 싶다거나 아이를 사랑으로 키워내고 싶다는 욕망. 다시 말해 사랑이다. 아이에 대한 사랑.


작품이 시작하자마자 성스럽도록 아름다운 장면을 그려 보여주는 모자母子가 등장한다. 어머니의 이름은 레이첼이다. 그녀는 이야기의 마지막도 장식하는데, 그녀가 하는 이야기는 이렇다.


"사람들은 매일 죽어요. 푼돈 5달러 때문에도 죽고, 잘못된 인연을 맺었다는 이유 때문에 죽고, 새우 때문에도 죽지 않나요? 죽는 것 가지고 사람을 평가해선 안 되죠."

"그럼 뭘로 평가해?"

누군가 외쳤다.

"죽이는 거요."

(몇 줄 생략)

"그래, 살인을 무릅쓸 정도의 일이 뭐지, 레이첼?"

레이첼이 미소짓는다. (한 줄 생략)

"가족이죠. 오직 가족뿐이에요."

(한 줄 생략)

"주저해도 안 되고, 후회해도 안 돼요."

레이첼이 말한다.

일말의 동정도 없이 죽여야 하죠.


레이첼이 드러내 보이고 있는 사랑은 물론 가족주의가 아니다. 그녀는 아이를 보호하고 잘 키워내야 한다는 강한 모성 본능에 기반해 거기에 거치적거리는 모든 것을 해치워버리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아이에 대해 드러내 보이고 있는 모성은 분명 일정 부분 숭고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랑에 기반하고 있으면서도 무자비하고 냉혹한 본능에 또한 기대고 있다. 사랑의 아이러니한 얼굴. - 켄지가 '법적 양육권이 없다고 부모에게서 아이를 강탈한 것이 아닌가' 하고 회의하게 되는 지점도 여기 어디에 그 근거를 두고 있어 보인다.  



+ 오탈자 있는 거야 그렇다고 쳐도, 시리즈 번역을 한 사람이 맡았고 또 한 출판사가 했으면, 인물들 이름은 좀 통일시켜 주어야 하지 않을까? 이루 말할 수 없이 사소하기는 하지만, 이런 것 하나 거르면, 얼마나 성의가 없어 보이는지, 좀 알아주셨으면 좋겠다. 



1. 이 표현은 당연히 켄지의 아버지에 대한 것이면서 동시에 아버지와 비슷한 역할을 담당하는 인물군에 대한 것이다.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한 스포일러가 되고 있어 마음이 편하지 않다. 추리소설에 스포일러라니!


2. 우리라고 지칭된 것은 켄지와 앤지, 데빈과 오스카다. 그들은 사랑과 평화로 화목한 울타리를 두르고 있는 가정의 한 저녁 시간-부엌-을 들여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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