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를 바라는 기도 밀리언셀러 클럽 48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6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비를 바라는 기도>가 시작되면 다소 고통스러운 장면이 안부를 전해온다. 켄지는 앤지와 헤어졌고 때때로 부바와 함께 다니며 누군가를 패거나 누군가에게 맞고 다닌다. 켄지의 인간에 대한 피로감은 이제 절정에 달해 있다. 그는 직업이나 일이라고 생각하기보다 놀이라고 생각해 빠져들었던 탐정 노릇에도 지쳐 있고, 큰일을 겪어 나가는 동안 보아야만 했던 인간의 추악한 모습과 그 속에 숨어 있는 인간적인 면모 때문에 고통 당하고 있다. 혼란스럽고 의욕도 없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한 여인의 전화 메시지를 지워버린다. 그리고 그 여인은 6개월 후 도시의 고층 빌딩에서 벌거벗은 채로 뛰어내린다. 


'그녀에게 대체 무슨 일이 생겼던 것일까'


사건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시리즈에서 처음으로, 의뢰인이 의뢰하지 않은 사건이, 윤리적인 목적에서부터 비롯되어, 수사되기 시작한 것이다. 탐정 사업이, 정말, 탐정 노릇 혹은 탐정 놀이(what's next?)로 변모되는 순간이다. 그리고 그 순간은 초심으로 돌아가기처럼 순수한 순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순간, 원칙과 윤리 사이의 갈등 때문에 자리를 비웠던 제나로도, 켄지의 곁으로 돌아온다. 그래서 때때로 켄지가 앞서 일어난 사건을 두고서 '과연 옳은 일을 한 것일까'라고 회의하는 장면은, 그것의 물리적인 크기와 상관없이, 퍽 중요한 장면으로 보이는 것이다. 제나로 역시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또 그때 그곳-<가라 아이야 가라>에서 그들이 다투었던 숲속, 웨스트베케트의 어느 집 부엌-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안해."

내가 말했다.

"뭐가?"

"작년에 숲에서 생긴 일들. 그리고 그 아이도."

"이젠 내가 옳았는지도 확신이 안 서는걸."

그녀가 내 눈을 보고 말했다.

"그건 왜?"

"글쎄. 신이 될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다는 생각 때문일까? 도우 부부를 봐."

내가 미소를 지었다.

"왜 웃어?"

나는 앤지의 오른손을 잡았다. 그녀는 눈을 깜빡였지만 손을 빼내지는 않았다.

"그냥... 지난 아홉 달 동안 조금씩 자기 입장에서 사건을 돌아보고 있었어. 어쩌면 상대적인 문제일 거야. 어쩌면 그 애를 그 집에 놔뒀어야 했는지도 몰라. 다섯 살이었고 행복해 보였으니까."

앤지가 어깨를 으쓱이고는 내 손을 쓰다듬었다.

"결국 우린 모르겠지?"


원칙과 윤리. 켄지와 제나로는 사립탐정들이지만, 그들이 고작 사립탐정에 지나지 않는 사람들이 아닐 수 있는 것은, 그들의 형이상학적 고민 때문이다. 사건은 단지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겪는 사건이며, 그래서 그것은 인간적인 문제가 된다. 형이상학적 고민이 싹트는 기반은 바로 거기인 셈이다.


 블록버스터급의 액션, 치사하도록 집요한 대결, 코너로 몰아넣고 턱 끝에 칼을 들이민 것 같은 긴장감. - 이야기는 여전히 엄청나게 재미 있었지만. 솔직히 말해 이 작품은 켄지&제나로 시리즈 중에서 가장 별로였다.


<어둠이여 내 손을 잡아라>의 G는 분명 싸이코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싸이코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맥락이 있었다. 그는 큰 판을 읽을 줄 아는 싸이코였다. 살인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그는 살인을 예술로 승화시킬 수 있는 그런 싸이코였다. 하지만 여기 <비를 바라는 기도>에서 나오는 속 싸이코는 어떤가. 그는 누구보다도 뛰어난 두뇌를 가졌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취할 수 있는 사악한 능력도 가졌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그저" 자신의 배를 불리는 데 이용했을 뿐이다. 그는 싸이코이되, 그저 조금 많이 똑똑한 싸이코에 지나지 않는다. 큰 판을 읽고 무언가 (그러니까 그것이 엄청나게 사악한 것이든 파괴적인 것이든) 강렬한 어떤 것을 창조해 낼 수 있을 만큼 뛰어난 싸이코는 못 되는 것이다. 그가 갖고 있는 능력이 아깝도록, 그들을 처치하기 위해 동원된 '블록버스터급의 액션'이 무색하도록, 쪼잔한 범죄자들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게다가 무술을 하고 심리전에 능하며 영혼을 꿰뚫어 볼 것 같은 매력을 갖고 있는 캐릭터가 고작 꼭두각시 허수아비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에, 그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었던 캐릭터가 갖고 있는 힘과 매력이 너무나 적다. 1000억짜리 회사를 먹은 것이 고작 1억짜리 회사였다더라, 하는 얘기를 듣고 앉아 있는 것만큼이나, 비현실적이어서 맥이 빠진다. 허탈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라, 아이야, 가라 2 밀리언셀러 클럽 47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6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작가가 말하고 싶은 메시지와 탐정 소설이라는 장르 사이의 미세한 불협화음이 신경을 건드리는데도 나는 밤새 읽고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미 읽었던 작품이고. 기억이 생생한데도. 그런데도 재밌게 읽을 수밖에 없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라, 아이야, 가라 1 밀리언셀러 클럽 46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6년 9월
평점 :
품절


전작들보다 덩치도 커지고 복잡해지기도 하면서 이야기가 훨씬 흥미진진해졌다. 장르적인 특성과 작가의 욕심 때문에 이야기의 미세한 균열이 감지되는 듯도 하지만. 여전히 엄청나게 끔찍하고, 엄청나게 재미있는 작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둠이여, 내 손을 잡아라 밀리언셀러 클럽 10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10월
평점 :
절판


<어둠이여 내 손을 잡아라>는, 개인적으로 <가라 아이야 가라>만큼이나, 심리적인 충격을 준 작품이었다. 사소하고 별것 아닌 것처럼 시작된 사건이, 과거에 그 탯줄을 대고 있고, 그리고 거기에서부터 업의 인연처럼 현실을 얽고 들어가는 이야기가, 무척이나 두렵고 서늘하게 느껴졌다. 그러니까 이 작품에서 느낀 심리적인 충격은, 루헤인이 그려낸 인물의 악랄한 냉정함 같은 것 때문이 아니라, 그 이야기가 켄지의 '영웅 아버지'에 탯줄을 대고 있기 때문이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아버지의 피를 켄지가 물려 받았으며, 그러므로 그 자신에게도, 아버지다운 특성-다시 말해 폭력성, 순수하게 증오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하다.


합법과 불법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던 인물이기 때문에, 켄지가 순전히 '선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렇지만 전쟁 전 한 잔의 후반부에서 보여줬던 모습이라든지, 어둠이여 내 손을 잡아라에서 보여준 어떤 모습들은, 그가 분명히, 그의 아버지의 피를, 그리고 그의 아버지의 특성을 물려 받았다는 것을, 선명하게 드러내 보여준다. 그리고 거기에서 켄지라는 인물이, 단순히 재기 발랄한 사립 탐정에서, 어느 정도는 고뇌하는 어두운 영웅의 모습까지도, 갖춰 입게 되는 것이다. 그는 검고 뜨거운 피를 물려 받았다. 그는 속에 괴물을 품고 있다. 그가 밖으로 뿜어내는 에너지는 그리고 바로 그 괴물의 에너지에 다름 아니다. - 켄지라는 인물은 그렇기 때문에 매력적이다. 그가 어떤 헛소리를 하든 간에, 그에게, 동의와 동조의 고갯짓을 끄덕여 보일 수 있다.


♣ 앤지의 남편 필립에 대해서는, 앞뒤에서 조금 읽기는 했는데, 직접 작품 전면에 드러난 것은 처음 보았다. 그의 장례식 후에 켄지와 앤지가 나누는 대화는 퍽 인상적이었다.

(켄지) "그가 죽은 이유는, 우리를 너무도 사랑했는데 우리가 그만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앤지) "왜 그런 생각을 했어?"

나는 꽁꽁 언 땅의 묘지자리를 들여다보았다.

(켄지) "그의 싸움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싸웠잖아. 우리를 위해서. 하지만 우리의 사랑이 더 컸다면 그가 끼어들지 못하게 했을 거야."


 이 이야기를 읽고 난 후에는, 켄지의 이 말에도 절로 동의하게 된다. 유사 우울증에 걸리는 것이 아닐까 싶도록, 이야기는 인간의 어두컴컴하다못해 시꺼무죽죽한 부분을, 가감없이, 드러내 보인다. 씁쓸하고 쓸쓸하다. 

(켄지) "우울증은 알지만 지금 당장은 어쩔 도리가 없어요. 또 벗어나고 싶지도 않고."

(의사) "그건 왜지?"

(켄지) "그게 자연스러우니까요. 가을처럼. 내가 겪은 일을 겪어 보세요. 그런데도 우울증에 걸리지 않는다면 박사님은 인간이 아닙니다, 제 말이 틀렸습니까?"

다 읽고 나니, 켄지의 저 말이 글자 그대로 와 닿았다. 가슴은 서늘해지고 마음은 무너져 내리고.

재밌게 놀자고 읽기 시작했던 것들인데. 어쩐지 나는 켄지&제나로 시리즈를 읽으며, 계속, 공부를 하고 있는 기분이 든다. 인간이라는 어두운 책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끔찍한데도 눈을 뗄 수 없다. 거기에는 인간이라는 어두운 책에 대한, 데니스 루헤인의 집념 같은 것이 어느 정도 작용하고 있지는 않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쟁 전 한 잔 밀리언셀러 클럽 4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전쟁 전 한 잔>은 시리즈의 첫 편으로서 켄지와 제나로의 관계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또 서로 어떤 맥락을 갖고 있는 인간들이었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그런데도 이 작품에서 눈에 들어왔던 것은, 그들의 아슬아슬하면서도 아릿아릿한 관계가 아니라, 뜻밖에도 집요한 의문이었다. 그것은 아마도 켄지와 제나로와 더불어 루헤인을 괴롭히는 의문이 아니었을까도 싶은, 그런 의문이었는데, 어쨌거나, 그것은 바로 "증오와 분노"에 대한 것이었다. 폭력적인 아버지로 대변되는, 사회에 대한 증오와 분노.


켄지와 마찬가지로, 아버지가 저지른 폭력으로 인해, 세상의 혹독하고 참혹하며 비정한 면을 봐버린 롤랜드는, 그래서 켄지의 그림자와도 같이 여겨진다. 켄지가 '문명'쪽이라면, 그 인물은 '폭력'쪽에 서 있다. 그래서 하나는 스스로의 증오와 분노를 의식적으로 알고 있고, 다른 하나는 그것을 무의식적으로 느끼고 있다. 짜안하기는 둘 다 마찬가지고 비극적이기 또한 둘 다 마찬가지이다. 편하게 늙어 두 다리 뻗고 자기는 틀렸다는 점에서도 둘은 마찬가지의 신세다.


어쨌든 간에 그런 인물들을 도드라져 보이도록 만들어주는 것은 "증오와 분노"라고 할 수 있을 듯한데, 그래서 작품 중간 중간에, 그것에 대한 루헤인의 '의문'을 들여다 볼 수 있다. 그것이 어디에서 오고, 그것이 어떻게 스스로를 드러내며, 그것은 어떻게 잦아들어 가는가(혹은 그럴 수 있는가). 이 물음은 이야기의 틈새에 자꾸만 끼어들어, 한낱 추리 소설에 불과한 것을, 적어도 그 이상의 어떤 것이 되도록 끌어올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덧붙여서, 켄지와 제나로의 농담 따먹기는, (이상하게도 뒷쪽 작품들을 읽을 때는 -아마도 잘 몰라서 그랬겠지만- 크게 그런 느낌을 받지 못했는데, 시리즈를 시작하는 이 작품에서 그것들은 도리어) 썩 괜찮은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그들이 처해 있는 지긋지긋하도록 냉혹하고, 지긋지긋하도록 혐오스러운 환경 속에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툭툭 던져내는 시답잖은 소리들이, 그들이 처해 있는 냉혹하고 혐오스러운 현실을 두드러지게 강조해주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시답잖은 농담들이, (작품의 무게를 가볍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작품의 스타일을 더 하드보일드하게 만들어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말이다. - 너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을, 똥그란 눈으로 말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머쓱하고도 머쓱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