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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깡이 (특별판) ㅣ 특별한 서재 특별판 시리즈
한정기 지음 / 특별한서재 / 2020년 8월
평점 :
결혼해서 둘째가 네살이 될때까지 부산에서 살았다. 어릴때 새벽이면 재첩국 사이소~라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들렸던 날 아침 상에는 부추가 동동 떠 있는 재첩국이 상에 올라오곤 했다. 저녁이면 빨간 대야에 쓰레기를 이고, 지고 쓰레기차 앞에서 줄서 있는 엄마의 모습, 은색 스탠 물통을 가지고 수돗가에 줄을 서서 물을 받아 나르는 엄마의 기억도 있다. 7살 기억에 집마당에 있는 수돗가에서 물장난하던 기억이 나는걸 보면 더 어릴때의 기억인 것 같다. 아빠는 개인택시를 하셨고, 엄마는 집에서 5자매를 키우셨다. 딸만 다섯인 집에 셋째로 자랐다. 늘 부족한듯 살았지만 불행하지는 않았던 어린 시절을 보냈다. '깡깡이'를 읽으니 어린 시절이 계속 오버랩되었다.
이 책의 배경은 영도구 대평동2가 143번지다. 그곳에는 정은, 동식, 정희, 정애, 동우 5남매와 선장인 아빠와 엄마가 살아가고 있다. 아빠는 이제 겨우 국민학교 6학년인 정은이에게 우리 집 살림 밑천 기특한 맏딸이라는 말을 하곤했다. 그 말이 정은이를 옥죄는 족쇄가 되었는지는 모르고. 육성회비도 못내고 있는 형편에 중학교는 갈 수 있을지 걱정해야 했던 맏딸, 아빠가 사고를 내서 배가 출항할 수 없을 때 깡깡이를 하며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엄마대신 6개월된 동우와 3명의 동생을 엄마 대신 봐야 했던 맏딸, 공부가 하고 싶었지만 그럴수 없었던 맏딸로 자란 정은이를 보며 큰언니 어깨의 무게감이 느껴지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든다.
대평동과 봉래동 일대 바닷가에는
선박을 수리하는 작은 조선소가 촘촘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깡깡이 아지매들은 낡은 배를 수리하거나 새로 페인트칠할 때
배의 녹을 떨어내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짠 바닷바람에 노출된 배들은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녹이 슬었고
바닷물에 잠긴 아랫부분에는 따개비나 담치 같은 해양생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그런 것들은 배의 속도를 느리게 할 뿐 아니라 쇠를 부식시키기 때문에
정기적으로 벗겨내고 새로 페인트를 칠해야 했다.
깡깡이 아지매들은 끝이 납작한 끌처럼 생긴 망치로 쇠를 두드려 녹을 떨어낸 다음
쇠 솔로 다시 한 번 더 물질러 남은 녹까지 깨끗하게 털어내는 일을 했다.
수리하는 배의 안과 밖 구석구석까지
깡깡이 아지매들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은 없었다.(P.46-47)
남편의 가출과 죽음, 여섯 살 때 읽어버린 막내아들, 평생 짊어져야 했던 경제적 책임이 무거워서일까, 너무 힘든 삶의 기억을 잊고 싶어서였을까 치매에 걸린 엄마. 그런 엄마를 보호자로 지켜보는 맏딸 정은이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져서 가슴이 메어온다. 동식이는 아버지를 잃은 엄마에게는 세상 전부나 마찬가지였다. 깡깡이 망치 하나로 공부시켜 가까스로 회계사를 만들었지만 결혼하자마자 처가 식구들을 따라 미국으로 이민을 가버렸다. 엄마의 부담감의 무게가 그만큼 컸으리라. 아버지를 대신한 엄마의 노동을 지켜보며 아이답게 자라지 못한 정은이의 어린 시절을 보면서 겨우 6학년이었던 아이를 안아본다. 아무 걱정없이 학교다니며 친구들과 추억을 쌓으며, 아름답고 찬란하게 보내야 했던 시절에 새벽에 일어나 신문배달을 해야했던 정은이의 삶을 본다. 학교 가는 친구들을 마주칠때면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자연스럽게 숨게 되는 자신을 어떻게 바라봤을까? 어릴때 힘겹고 가난하게 살았지만 지금은 어엿한 화가로 자신의 그림으로 전시회를 여는 성인이 되었다. 자신이 하고 싶어하는 것을 하면서 살아가는 정은이에게 박수를 보낸다.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누군가는 물질적으로 힘든 또 다른 정은이가, 심적으로 가난한 정은이가, 기댈수 있는 존재가 없음으로 외로워하는 정은이가, 수없이 많은 정은이가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어딘가에 있을 정은이가 이 책을 통해 위로받기를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