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 없는 영웅들
퍼디아 레넌 지음, 최리외 옮김 / 다산책방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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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로마 시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라는 점이 먼저 눈길을 끌었습니다. 『영광 없는 영웅들』은 아일랜드 작가 퍼디아 레넌의 장편소설 『Glorious Exploits』를 최리외 번역가가 우리말로 옮긴 것으로, 다산책방에서 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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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로마 시대라고 하면 흔히 영웅들의 시대, 혹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같은 철학자들의 시대로 어렴풋이 떠올리기 마련인데, 『영광 없는 영웅들』은 그 시대를 살아간 아주 평범한 사람들의 하루하루를 들여다보게 해 주어서 색다르게 다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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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디아 레넌은 1988년 더블린에서 아일랜드인 어머니와 리비아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더블린 대학교에서 역사와 고전학을 공부했고, 이스트앵글리아 대학교에서 소설 창작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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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부터 고대 그리스에 매료되었던 그는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읽던 중, 시라쿠사 외곽의 채석장에 던져진 약 7천 명의 아테네 포로들의 이야기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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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플루타르코스의 『니키아스의 생애』에서, 귀향한 포로 몇몇이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을 기억하여 낭독한 덕분에 시라쿠사인들로부터 음식과 음료를 얻어 살아남았다는 짧은 기록을 발견했고, 이 한 줄의 역사적 사실을 자신의 이야기로 풀어내기로 결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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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첫 문장부터 마지막 문장까지 7년에 걸쳐 완성한 『영광 없는 영웅들』은 그의 데뷔작임에도 워터스톤스 데뷔소설상, 루니 아일랜드 문학상, 볼린저 에브리맨 우드하우스 희극문학상, 작가클럽 최고 데뷔소설상 등 다섯 개의 문학상을 동시에 수상하며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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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배경은 기원전 412년,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 시켈리아 원정에 실패한 아테네 병사 수천 명이 시라쿠사의 채석장에 갇혀 서서히 죽어 가던 시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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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람포와 겔론은 영웅도 철학자도 장군도 아닌, 그저 시를 좋아하는 두 도공입니다. 이들은 굶주린 포로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는 대신 에우리피데스의 시구를 대가로 받으러 채석장을 드나들다가, 급기야는 포로가 된 아테네인들을 배우로 세워 『메데이아』를 무대에 올리자는 무모한 계획을 세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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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죽음이라는 거대한 역사의 한복판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여전히 시를 읊고 연극을 꾸미고 술잔을 기울이며 살아갔다는 사실이 『영광 없는 영웅들』을 읽는 내내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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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그리스 로마 시대를 떠올릴 때면 늘 페리클레스나 소크라테스, 알키비아데스 같은 이름들을 먼저 생각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영광 없는 영웅들』은 그 유명한 이름들 곁에서, 이름조차 남지 않았을 도공과 상인과 술집 주인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그 시대를 통과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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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책은 전쟁의 승패와 지도자들의 결단을 기록하지만, 그 전쟁을 몸으로 살아 낸 것은 결국 이런 이름 없는 사람들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덕분에 그 시대가 단순히 영웅담이나 철학의 계보로만 남아 있던 제 머릿속 지도에, 술 냄새와 채석장의 먼지와 시 구절이 오가는 생생한 골목 하나가 새로 그려진 느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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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포와 겔론이 살아가는 방식도 그랬습니다. 이들은 전쟁의 결과를 바꿀 힘도, 역사에 이름을 남길 야심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저 하루하루 술 한 잔과 시 한 구절을 놓치지 않으려 애쓰는 이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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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바로 그런 사람들이, 굶어 죽어 가는 포로들 앞에서 연극을 무대에 올리겠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누군가에게는 무모하고 우스운 발상이었겠지만, 저는 그 장면에서 오히려 역사의 거대한 흐름 앞에 무력한 개인이 그럼에도 손에 쥘 수 있는 유일한 것, 바로 예술과 이야기의 힘을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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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쿠사의 채석장은 죽음의 냄새로 가득했지만, 그 안에서도 에우리피데스의 대사를 주고받는 목소리는 끊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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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작가가 아일랜드 특유의 위트와 구어체 대화를 과감하게 고대 시라쿠사의 무대 위에 얹어 놓은 점도 인상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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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착오적으로 느껴질 법한 현대적인 말투와 욕설이 오히려 이 인물들을 멀리 있는 고대인이 아니라, 지금 우리 곁의 누군가처럼 가깝게 느껴지게 만들었습니다. 비극적인 소재를 다루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균형감이 『영광 없는 영웅들』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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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아쉬운 점을 꼽자면, 채석장의 참상과 인물들의 유머 사이를 오가는 톤의 변주가 어느 순간에는 다소 급작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시켈리아 원정은 아테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 감행한 원정 가운데 가장 참혹한 패배로 꼽히는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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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키디데스의 기록에 따르면 원정에 나선 아테네군 대부분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고, 살아남은 이들 중 다수가 채석장에서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어 갔습니다. 소설은 이 냉정한 역사적 사실을 배경에 그대로 세워 두면서도, 그 위에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이야기를 얹어 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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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영광 없는 영웅들』을 읽고 나면, 역사 교과서 한 줄로 남았을 사건이 훨씬 구체적인 얼굴을 갖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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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전쟁의 비극 한복판에서 시와 연극을 붙들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인간이 가장 참혹한 순간에도 무엇으로 살아가는가를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영광 없는 영웅들』은 그리스 로마 시대를 새로운 눈으로 보게 해 준, 뜻밖의 발견 같은 소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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