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보이는 건축
방명세 지음 / 나비의활주로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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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보이는 건축
사람이 보이는 건축
방명세2026나비의활주로


건축가가 쓴 책이라고 해서 집이나 공간에 관한 이야기를 기대하셨다면, 이 책은 그 기대를 조용히 빗나갑니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어느 순간 건물보다 사람이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그것이 저자 방명세가 평생 건축을 통해 하려 했던 말이고, 이 책이 독자에게 조용히 건네는 핵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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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다섯 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Root, Field, Essence, Legacy, Sketch. 뿌리에서 현장으로, 현장에서 사유로, 사유에서 유산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펜끝의 풍경으로 흘러갑니다. 목차 자체가 한 건축가의 삶의 결을 따라 설계되어 있습니다. 이 순서를 따라 읽다 보면 어느새 저자의 걸음을 함께 걷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저자는 성북동 산동네 골목을 누비며 공간 감각을 익혔고, 낙서하다가 건축을 만났다고 고백합니다. 그 고백이 퍽 자연스럽습니다. 대단한 출발이 아니었습니다. 골목의 질감,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 햇볕이 드는 방향, 그런 것들이 몸에 먼저 새겨졌고, 그것이 나중에 건축가의 눈이 되었다고 합니다.


화려한 수식 없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담담하게 펼쳐놓는 방식이 이 책 전체의 문체입니다.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읽다 보면 설득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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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정림건축에 공채로 입사해 설계, 기획, CM까지 한 조직에서 여러 자리를 옮기며 건축의 다른 면들을 두루 보았습니다. 보통의 건축가라면 설계실 안에 머물렀을 시간을, 저자는 현장으로 나갔습니다.


코이카 사업을 통해 아이티, 콩고, 볼리비아, 에티오피아, 파라과이, 과테말라 등 10여 개국의 현장을 다니며 출장 수첩에 메모하고 스케치했습니다. 20년간 쌓인 수첩이 20권이 넘는다고 했습니다.


그 수첩들은 2025년 개인전 '또 다른 시선'이 되었습니다. 건축가이기 전에 기록하는 사람이었고, 기록하는 사람이었기에 그 현장에서 건물이 아닌 사람을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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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eld 챕터의 소제목들을 보면 그 눈이 어디를 향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광양, 처음으로 사람이 보이다', '아산, 집을 짓고 함께 울다', '파라과이, 팬데믹에도 떠나지 않은 사람', '콜롬비아, 다시 일어서는 사람들'.


나라 이름 뒤에 건물 이름이 아니라 사람의 이야기가 옵니다. 건축 현장 기록이라기보다 사람 현장 기록에 가깝습니다. 볼리비아 해발 4,150미터에서의 약속, 에티오피아에서 70년 전 은혜를 돌려주는 이야기. 그 소제목들만으로도 읽는 이의 마음이 먼저 움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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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중반부에 소명, 성품, 역량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저자는 이것을 전문 건축가의 3C라고 부릅니다.


역량에 난 구멍은 경험으로 막을 수 있고, 성품에 난 구멍은 사람을 만나며 깎이고 다듬어져 막힌다고 합니다. 그리고 역량과 성품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자리를 막는 것이 소명이라고 했습니다.


건축 이야기인데, 읽는 내내 내 이야기처럼 느껴졌습니다. 어떤 일을 하든, 결국 사람은 이 세 가지 앞에 서게 된다는 것을 이 건축가는 현장에서 배웠고, 책에서 조용히 나눠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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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 신앙이 책 곳곳에 스며 있습니다. 그러나 설교하지 않습니다. 신앙을 내세우거나 증명하려 들지 않습니다. 다만 그가 현장에서 사람을 대하는 방식, 소명을 이해하는 태도, 역량만으로는 부족하다고 고백하는 자리에서 그 신앙의 깊이가 자연스럽게 배어납니다.


소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그는 거창한 언어로 답하지 않습니다. 그저 자신이 살아온 방식으로 보여줍니다. 그것이 이 책의 가장 큰 미덕 중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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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부터 본문까지 저자가 직접 그린 펜 드로잉이 곳곳에 담겨 있습니다. 글과 그림이 따로 놀지 않습니다. 글이 담지 못한 현장의 온기를 그림이 채워주고, 그림이 설명하지 못한 맥락을 글이 붙들어 줍니다.


Sketch 챕터에 담긴 필드 스케치와 출장 수첩의 장면들은 단순한 삽화가 아닙니다. 수십 년을 현장에서 눈으로 보고 손으로 기록한 사람의 시간이 그 안에 쌓여 있습니다. 그림 한 장 한 장에서 정성이 느껴지는 이유입니다.


Legacy 챕터도 인상적입니다. 목양교회, 시드볼트, 평창 개폐회 식장, 삼일빌딩. 각각의 건축 이야기가 단순한 프로젝트 소개에 머물지 않습니다. 영혼을 위로하는 건축, 다음 세대에 건네는 건축, 오래된 건물에 내일을 잇는 건축.


건축을 유산의 언어로 읽어내는 시선이 담겨 있습니다. 짓는 것이 단지 공간을 만드는 일이 아니라 시간을 잇고 사람을 남기는 일임을 저자는 알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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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의 제목이 '겨울을 난 보리'입니다. 뒤표지의 추천사에도 비슷한 문장이 있습니다. 가을에 파종한 보리처럼, 추위를 견뎌내어 더 단단해진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책 전체가 그 문장을 향해 걸어가는 느낌입니다. 화려하게 성공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거절 못 하는 성격이 만든 길을 뚜벅뚜벅 걸어온 사람, 쓰이지 않은 경험은 없었다고 말할 수 있게 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정성이 가득한 책이라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잘 만들어진 책이기도 하지만, 잘 살아온 사람이 쓴 책이라는 느낌이 더 강하게 남습니다. 사람이 보이는 건축은 결국 사람이 보이는 삶에서 나온다고, 이 책은 말하지 않고 보여줍니다.


건축가의 이야기이지만, 자기 자리에서 소명을 붙들고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건네는 따뜻한 격려이기도 합니다. 읽고 나서 한동안 조용히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게 되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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