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은 서두르지 않는다 - 빛과 바람이 들려준 삶의 문장들
김산들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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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른 것이 미덕인 시대입니다. 더 빨리 결과를 내고, 더 빨리 성공하고, 더 빨리 채워야 한다는 압박이 공기처럼 우리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스마트폰은 24시간 우리를 세상과 연결하고, 그 연결이 끊어지는 순간 불안해집니다.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감각, 뒤처지고 있다는 두려움. 이 속도의 문화 안에서 우리는 점점 지쳐가고 있습니다. 그 지침이 어디서 오는지조차 생각할 여유를 잃어버린 채로.


김산들의 『계절은 서두르지 않는다』는 그 반대편에 서 있는 책입니다. 스페인 산골의 작은 마을에서 자연의 시간에 기대어 살아가는 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저자는 한국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하고 무역회사에 다니다가 IMF를 겪으며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인도로 떠났습니다. 낯선 땅에서 스페인인 남편을 만났고, 결혼 후 스페인에 정착해 지중해 작은 마을에서 살며 자연의 시간 안에서 삶을 기록해 온 사람입니다. 이 책은 그 기록입니다.



책은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계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각 계절마다 그 계절이 가져다주는 자연의 변화와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일상이 담겨 있습니다.

봄은 기다림 끝에 서로를 알아보는 계절, 여름은 뜨거울수록 더 깊이 뿌리내리는 계절, 가을은 조금 덜 가져도 충분한 계절, 겨울은 비워야 다시 타오를 수 있는 계절로 불립니다.

계절 하나하나에 붙인 이 소제목들만으로도 저자가 자연을 어떤 눈으로 읽는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봄 챕터에서 저자는 아무도 몰랐던 나무가 데려온 봄을 이야기합니다. 겨우내 죽은 것처럼 보였던 나무가 봄이 되자 아무도 모르게, 아무도 기대하지 않은 방식으로 꽃을 피웁니다.

저자는 그 장면 앞에서 멈춥니다. 자연은 서두르지 않는다는 것을, 기다림이 곧 준비의 시간이었다는 것을 그 나무가 보여준다고 말합니다.

새들에게도 보릿고개가 있다는 챕터에서는 봄이 오기 직전 먹이가 가장 귀해지는 시간을 이야기합니다. 가장 아름다운 계절의 문턱에서 가장 힘든 시간을 통과하는 새들. 그 장면이 인간의 삶과 겹쳐집니다.




여름 챕터에서는 고산 평야의 물의 법칙, 발끝 아래의 세계, 이 숲은 처음부터 푸르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뜨거운 여름 햇살 아래 뿌리를 더 깊이 내리는 나무처럼, 가장 혹독한 계절이 오히려 가장 깊은 성장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저자는 자연에서 배웁니다.

고슴도치가 알려 준 것이라는 챕터도 인상적입니다. 작고 느린 존재가 자신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모습에서 저자는 속도가 아닌 방향의 문제를 생각합니다.

가을에는 덜어내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가을을 열매는 선착순, 친애하는 사냥꾼 아저씨에게, 점점 작아지는 우리들의 식탁.

가을은 채우는 계절이 아니라 비워내는 계절임을, 덜 가져도 충분하다는 것을 자연이 먼저 보여준다고 말합니다. 저자의 식탁은 작아지고, 그 작아진 식탁 위에서 오히려 더 깊은 맛을 발견합니다.




겨울 챕터는 이 책에서 가장 조용하고 가장 깊은 부분입니다. 장작이 타는 동안 나에게 묻다, 그리움에서 시작된 손맛, 못 가르친 게 아니라 기다린 것. 비워야 다시 타오를 수 있다는 겨울의 언어가 사람의 언어가 됩니다.

가지지 않아도 즐길 수 있다는 챕터에서 저자는 가장 단단한 말을 가장 조용하게 합니다. 많이 갖는 것이 아니라 깊이 누리는 것. 그것이 겨울이 가르쳐 준 삶의 방식이라고 말합니다.




이 책이 가진 가장 큰 힘은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연 속에서 살아야 한다고, 느리게 살아야 한다고, 덜 가져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저자는 다만 자신이 본 것을, 자신이 느낀 것을, 자신이 살아낸 것을 담담하게 씁니다. 그 담담함이 오히려 더 깊이 독자 안으로 들어옵니다. 설득하지 않으면서 설득하는 글입니다. 주장하지 않으면서 생각하게 하는 글입니다.

문장도 그렇습니다. 정갈합니다. 꾸미지 않습니다. 자연을 묘사하는 문장들이 자연을 닮아 있습니다. 과잉이 없고, 여백이 있습니다. 한 챕터가 끝날 때마다 잠시 멈추게 됩니다. 다음 챕터로 바로 넘어가지 않고 방금 읽은 문장 하나를 조용히 되새기게 됩니다. 이런 독서 경험을 주는 책이 많지 않습니다.

각 계절의 끝에는 그 계절에 어울리는 요리가 실려 있습니다. 봄날의 들풀 밥상, 어름을 이겨 내는 맛 가스파초, 고산에서 배운 버섯 요리, 비스타베야의 겨울 수프. 레시피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음식이 만들어진 계절과 사람과 이야기가 함께 있습니다.

음식이 단순한 조리법이 아니라 삶의 방식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이 작은 코너들이 잘 보여줍니다.




책을 덮고 나서 한동안 스마트폰을 손에 쥐지 않았습니다. 창밖을 보았습니다. 바람이 나뭇잎을 흔들고 있었습니다. 언제부터 그 장면을 이렇게 오래 바라보지 않았나 생각했습니다.

이 책이 한 일이 그것입니다. 속도에 함몰된 시선을 잠깐 멈추게 하는 것. 우리가 잊고 있던 느린 것들을 다시 보게 하는 것. 자연의 시간이 인간의 시간보다 더 오래되고 더 깊다는 것을 조용히 상기시켜 주는 것.

김산들의 『계절은 서두르지 않는다』는 서두르지 않으면서도 언제나 곁을 내어주는 자연을 이야기합니다. 봄은 반드시 오고, 여름은 뜨겁게 타오르고, 가을은 조용히 비워내고, 겨울은 다시 타오를 준비를 합니다.

그 계절의 리듬 안에서 한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도 그렇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아니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이 책은 말하지 않으면서 말합니다.

속도를 잠깐 내려놓고 싶은 분에게, 지금 무언가에 지쳐 있는 분에게, 자연 속에서 사람답게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보고 싶은 분에게 권합니다. 이 책은 달리기가 아니라 산책입니다. 그 산책의 끝에 조금 더 넉넉해진 자신을 만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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