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속 나의 마을
다시마 세이조 지음, 황진희 옮김 / 책담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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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이야기해 주세요!"

매일 밤 잠자리에 들기 전 아들과 딸이 저에게 하는 말입니다. 이야기에는 몇 가지 카테고리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성경 이야기, 두 번째는 아빠 군인시절 이야기, 세 번째는 아빠의 옛날이야기. 몇 달 동안 거의 일주일에 4-5회 이상 이야기를 하다 보니 이야기가 바닥나고 말았습니다. 성경 이야기는 한 바퀴 더 돌기 시작했고, 군 생활 이야기는 쥐어짜내기 시작했으며, 옛날이야기는 나의 이야기에서 아이들과 함께 한 이야기로 범위가 확대되었습니다.

옛날이야기를 하다 보니 옛날에 살았던 마을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동차 도로가 없었고, 선착장도 지금보다 훨씬 작았고, 바다엔 모래가 더 많았던 때였습니다. 산에는 들짐승이 있었고, 소를 몰고 산으로 올랐던 때가 떠올랐습니다. 바다에서 놀다가 거의 죽을 뻔한 경험과 배고플 때 남의 밭에서 고구마나 감자를 서리해 구워 먹었던 일과 무와 양파까지 뽑아먹었던 기억이 돋았습니다.

이야기란 대단한 힘을 가진 것 같습니다. 나의 옛날이야기를 하고 들으면서 아들딸과 낄낄대며 웃기도 하고, 공감대를 형성하기도 하며, 우리도 뭔가를 시도해 보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하니 말입니다. 이야기 하나로 세월을 뛰어넘고 공간을 뛰어넘어 서로에게 연결되는 기분을 느낍니다.


다시마 세이조의 [그림 속 나의 마을]이란 책을 읽으면서 부모님이 들려주신 옛날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더불어 나의 어린 시절이 저절로 떠올랐습니다. 저수지에서 얼음을 지치며 놀던 일, 볏짚단에 불을 질러 불기둥이 하늘로 치솟아 동네가 발칵 뒤집어진 일, 서리하다 주인에게 잡혀 된통 혼난 일, 바다에서 잡은 고동과 해산물을 구워 먹었던 일까지... 그리고 그 안에 얽히고설킨 형들과 친구들과 동생들의 얼굴까지 떠올랐습니다.



이 책은 다시마 세이조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가 자란 시대 배경과 마을 풍경이 눈과 마음에 그려진다고 해야 할까요. 다시마 세이조가 1940년 생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의 옛날이야기는 꽤나 옛날이야기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아직 발전하지 않은 촌스러움과 정겨움이 가득하고, 조금은 과격하고 세련되지 못한 이야기까지 담겨 있습니다. 발가벗고 수영한 일이나, 너무나 억울했던 학교 선생님, 그것도 교장 선생님의 폭력에 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달리기 하나 때문에 자존심을 몽땅 걸었던 이야기, 먹을 것이 부족해서 산에 올라가 새를 잡았던 이야기도 있습니다.

나 역시 어릴 때 새총과 활과 화살을 들고 산으로 들도 다니며 토끼와 꿩을 잡아보려고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우연한 계기로 비둘기를 잡았을 때도 있었고, 집으로 가져가다가 윗동네 아저씨에게 강탈당한 기억마저 떠올랐습니다. 학교 선생님에게 폭력에 가까운 린치를 당한 기억이 돋아 오르기도 했고, 수영하다 물풀에 감겨 식겁했던 저 아래 숨어 있었던 기억까지 솟아올랐습니다.




나와 다시마 세이조는 시대적으로도 상당한 시간차가 있습니다. 게다가 그는 일본인이며 나는 한국 사람입니다. 무작정 사이가 좋을 수는 없는 관계라고 해야 할까요. 게다가 그 역시 어릴 때 자기 동네에 살았던 한국 부부를 향해 돌팔매질을 하며 조센징이라 불렀던 이야기를 꺼내놓습니다. 그 시간과 그 이야기를 자신의 아프고 부끄러운 기억으로 회상했다는 점에서 일종의 안도감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다시마 세이조가 그저 막되 먹은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한 지점이기도 했습니다.

사실 그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그가 얼마나 힘겨운 시간을 보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게다가 그에게서 인간미를 한껏 느낄 수 있고, 그의 이야기에서 일종의 공감과 연민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접촉점이라곤 하나도 없을 것 같은 다시마 세이조의 이야기를 읽으며 나의 이야기를 되돌아보게 되었고, 과거를 떠올렸으며, 나의 고향의 옛 풍경까지 마음과 머릿속에서 그려보기도 했습니다. 독특하고 특별한 독서였다고 말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책의 끝자락에서 다시마 세이조가 그가 자란 마을을 다시 찾는 장면이 나옵니다. 안타깝게도 마을은 너무나 달라져 있었습니다.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말입니다. 도로가 생기고, 길이 달라졌습니다. 산과 들은 깎여나가 흉물스럽게 변했습니다. 그의 추억, 그의 삶이 잘려나간 기분을 느낍니다. 오지 말 것을... 하는 안타까움마저 느낍니다. 그의 삶이 녹아 있고, 그의 추억이 오롯이 담긴 마을은 말 그대로 그림 속에만 존재할 따름입니다.

포클레인은 사람이 만든 가장 흉물스러운 기계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종종하곤 합니다. 산을 파헤치는 광경을 볼 때마다 이 생각을 하곤 합니다. 포클레인으로 먹고 사시는 분에겐 죄송하지만 생각마저 안 할 수는 없으니 이해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4대강 이야기나, 깎여나간 임야, 산과 밭을 뒤덮은 태양열 집열판을 보면 숨이 턱턱 막힐 때가 있습니다. 다시마 세이조의 책을 읽으며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풍경과 환경 문제까지 한 번 더 생각해 보기도 했습니다. 뾰족한 대안이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작은 실천이 필요하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 이웃과의 평화와 공존, 환경 문제까지 두루두루 생각하게 만들어 주며, 한걸음 더 나아가 마음까지 따뜻하게 만들어 주는 다시마 세이조의 [그림 속 나의 마을] 즐거운 마음으로 추천합니다. 오늘 밤 아들과 딸에게 나의 옛날이야기 하나 더 꺼내들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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