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미 (출간 15주년 기념 백일홍 에디션) - 박완서 산문집
박완서 지음 / 열림원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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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농부의 아들입니다. 일평생 농부로 살아오신 부모님을 보면서 농부의 삶이 무엇인지 목격했고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농부가 사용하는 농기구 역시 익숙한 물건이며 이름입니다. 집 뒤양간에는 농기구가 늘 제자리에 놓여 있었습니다. 곡괭이, 낫, 쇠스랑, 삽, 갈쿠리(쇠갈퀴), 그리고 호미. 모두가 나에겐 익숙한 이름, 농기구입니다. 손에 익을 때까지 사용해 보기도 했고, 농기구로 장난치다가 다치기도 했던 조금은 살벌한 추억도 있습니다.

익숙함. 무언가에 익숙하다는 것은 반가운 마음을 주기도 하며, 추억을 되살리기도 합니다. 익숙하기 때문에 가볍게 흘려보내는 경우도 있지만, 오랜만에 마음을 두드리는 익숙함은 환한 미소와 함께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젖히기도 합니다. 고 박완서 작가님의 책 [호미]를 만났을 때 저의 마음이 딱 그랬습니다. 반갑고, 미소를 지었고, 마음이 부드럽고 따뜻해졌습니다.




일전 고 이어령 선생님의 책 [너 누구니]를 읽을 때 느꼈던 감정을 박완서 작가님의 [호미]를 읽으면서 다시금 느꼈습니다. 이어령 선생님은 탁월한 지성과 깊은 관찰로 젓가락에 관한 사유를 글로 담아냈습니다. 책을 읽기 전 설마 책 한 권이 모두 젓가락 이야기는 아니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책은 나의 이 생각을 가볍게 날려버렸습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젓가락을 이렇게 오래, 자세히, 깊이 들여다보았는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글의 모양과 느낌, 결은 사뭇 다르지만 박완서 작가님의 [호미]를 읽으며 비슷한 감정을 느꼈습니다. 물론 이 책에서 호미는 이어령 선생님의 젓가락과는 달리 한 꼭지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박완서 작가님 역시 호미를 오래, 자세히, 그리고 깊이 들여다보았고 그 생각을 단아한 글로 담아냈습니다. 호미뿐 아니라 마당에서 피는 꽃 하나하나를 그렇게나 오래, 자세히, 깊이 들여다보고 그 감정을 곱게 담아낸 것은 일상을 오래, 자세히, 깊이 들여다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쉽게 놓치거나 간과하기 쉬운 자연의 변화와 일상의 소소한 일을 이렇게나 오래, 자세히, 깊이 들여다보고, 그들만의 문체와 언어로 정갈하고 깊게 담아내는 이 두 거장의 글을 읽을 때마다 자연스럽게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 떠오릅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박완서 작가님의 글을 읽고 나면 언제나 일상을 제대로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이 일렁입니다. 사랑하는 아내의 얼굴, 하나씩 둘씩 생기는 흰머리와 주름을 더 깊이 오래 보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사랑하는 아들과 딸이 훌쩍 자라는 모습을 아껴보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아이들과 보내는 일상의 시간, 함께 자전거를 타고, 걷고, 이야기 나누는 시간, 함께 저녁 식사를 먹으며 식구임을 확인하는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다시금 깨닫습니다.

일상을 소중하게 여기고, 일상에서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가고,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삶이야말로 아름다운 삶이며 우리가 살아내야 할 삶이겠지요.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과 목격하는 자연의 변화와 경험하는 소소하고 작은 일을 톺아보면서 그 안에서 사랑을 발견하고 의미를 찾아내면서 우리 삶은 부요해지고 아름다워지며 의미와 재미로 차오르는 법이겠지요.




언제나 그랬듯 박완서 작가님의 글을 읽으면 마음이 차분해집니다. 지금 내가 살아가는 삶에 대한 고마운 마음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에 대한 고마운 마음이 자라납니다. 환경이 많이 달라졌고 훼손되었지만 여전히 계절을 알리는 풀과 꽃과 나무에 대한 고마운 마음이 생깁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생명을 주신 하나님, 자연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 여기저기에 은혜의 흔적을 남기신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아마도 박완서 작가님의 글이 하나님을 향한 나의 신앙의 어느 부분을 자극하기 때문이겠지요.

책을 읽으며 여기저기 밑줄을 그었습니다. 따라 써보고 싶은 문장도 자주 만났습니다. 그중에 내 마음에 콕 박힌 문장을 소개하며 고마운 책 리뷰를 마치겠습니다.

"글 쓰는 일이란 몸의 진액을 짜는 일이니까."

박완서, 호미, 59

박완서 작가님도 글 쓰는 일을 어렵게 느끼셨다는 점이 새삼스러웠습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인데 말이죠. 글쓰기의 대가도 글쓰기 위해 진액을 쏟아낸다고 하니 일종의 고마운 마음까지 생겼습니다. 나와 같은 사람은 당연한 일이라는 위로까지 얻었습니다.

상상력은 남에 대한 배려, 존중, 친절, 겸손 등

우리가 남에게 바라는 심성의 원천이다.

그리하여 좋은 상상력은 길바닥의 걸인도 함부로 능멸할 수 없게 한다.

박완서, 호미, 110

예수께서는 무엇이든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상상력이 차고 넘치는 분이 예수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박완서 작가의 문장을 따라가다 보니 지금 우리 살아가는 세상이 이렇게나 배려가 없고, 무례하고, 사납고, 거만한 이유가 무엇인지 진단할 수 있었습니다. 상상력 결핍의 시대입니다. 엉뚱한 것이나 상상하고 있는 우리네 민낯을 드러내는 문장이기도 하지요. 우리 사는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살맛 나는 곳으로 바꾸어가려면 상상력을 회복하는 일이 우선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문장이기도 하지요.

거룩한 상상력을 기르기 위해 침묵의 시간을 가져야겠습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그분 앞에서 그분의 말씀으로 내면과 마음을 채우며 상상력을 길러야겠습니다. 발 딛고 살아가는 한 모퉁이라도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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