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여우눈 에디션) - 박완서 에세이 결정판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22년 1월
평점 :
품절


"글이 마음을 이렇게나 흔들어 놓을 수 있다니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고인이 된 박완서 작가의 글을 읽으며 느낀 나의 감정이다. 본디 글이란 것은 단어의 조합이다. 생각과 감정, 또는 상상과 개념을 포착해 내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단어를 찾아내고 조합해서 만드는 것이 문장이다. 그 문장이 모이고 모이면 결국 책이 되는 법 아닌가. 지극기 기계적인 계산과 생각에 따르면 별로 특별할 것이 없는 일이 글 쓰는 일일게다.

그것이 과연 진실일까?

글은 글쓴이를 닮기 마련이다. 글쓴이의 생각과 상상과 인격과 지성과 상상이 글로 태어난다. 글은 단어의 조합, 문장의 조합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동시에 글이란 글쓴이의 마음과 생각과 상상과 인격의 산물이라는 데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글을 읽으며 저자의 이야기를 듣고, 마음을 엿보고, 생각에 동참하게 되며, 격렬할 정도로 공감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부끄럽다고 해야 할까?

나는 박완서 작가의 글을 읽지 않았었다. 그렇다고 박완서 작가를 모른다는 뜻은 아니다. 대단한 작가라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이번에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라는 책을 읽었다. 왜 박완서라는 작가가 대단한 작가인지 단박에 이해할 수 있었다. 왜 이제서야 박완서 작가의 글을 읽었는지 아쉬운 마음은 물론 죄송한 마음까지 생겼다. 글을 읽는 동안 묘한 기분을 자주 느꼈다. 나의 필력으론 담아내기 어려운 감정과 생각이 꿈틀거렸다.




때로는 가슴에 콕콕 박히는 문장을 만나기도 했다. 몇몇 문장을 소개하는 것이 미덕이리라.

"길은 사람의 다리가 낸 길이기도 하지만 누군가의 마음이 낸 길이기도 하다. 누군가 아주 친절한 사람들과 이 길을 공유하고 있고 소통하고 있다는 믿음 때문에 내가 그 길에서 느끼는 고독은 처절하지 않고 감미롭다." (15p)

"이 세상 사람들이 다 나보다는 착해 보이는 날이 있다. 그날도 그런 날이었고, 그런 날은 살맛이 난다." (20p)

"그도 꽃다운 시절이 있었고 결혼을 했다. 천지신명께 백년해로를 맹세했고 친척 친구들에게 앞날의 축복받으며 착한 여자의 지아비가 되었고, 지금 이 구걸도 그 무겁고 무서운 지아비 노릇이다라는 생각이 뭉클하니 내 심장 언저리를 뜨겁게 했다." (43p)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은 건물로서의 집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편안하고 따뜻한 대화가 있고, 자유와 구속이 적당히 조화된 가정으로서의 집이었다." (46p)

"실제로 눈물을 흘리지 않았지만 조용히 흐느끼고 싶은 잔잔한 서러움이 목구멍까지 치올랐다." (64p)

"조금 덜 바빠져야겠다. 너무 한가해 밤이나 낮이나 꿈만 꾸게는 말고, 가끔가끔 단꿈을 즐길 수 있을 만큼만 한가하고 싶다." (67p)

"너무 잘해주는 친척 집보다 불친절한 여관방을 차라리 편하게 여기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74p)

"가장 궁핍했던 시절을 넉넉한 마음 하나로 가장 부자스럽게 살게 해주신, 그래서 그 시절만 회상하면 저절로 환한 미소가 떠오르게 해주신 어머니가 새삼스럽게 자랑스럽다." (91p)

"그건 이미 단풍이 아니었다. 고향 마을의 청결한 공기, 낮고 부드러운 능선, 그 위에 머물러 있던 몇 송이 구름의 짧고 찬란한 연소의 순간이 거기 이었다." (115p)

"예사로운 아름다움도 살날보다 산 날이 많은 어느 시기와 만나면 깜짝 놀랄 빼어남으로 빛날 수 있다는 신기한 발견을 올해의 행운으로 꼽으며, 안녕." (118p)


책을 펼쳐들고 읽으면서 박완서 작가가 곁에서 읊조리는 기분을 종종 느꼈다. 아마도 은밀한 그녀의 마음을 박완서 다운 필체로 담아냈기 때문일 것이다. 분명한 자기만의 색깔과 삶의 방향으로 농도 짙은 삶을 살아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생각과 삶을 언어로 담아낼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기 때문일 것이다.

모종의 까칠함과 어딘지 모를 불편함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을 숨기려 하거나, 실제보다 조금 더 나은 사람으로 묘사하려 들지 않았기 때문에 느끼게 된 감정이 아닐까 싶다. 자신의 까탈스러운 면과 자신조차 마음에 들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담담하게 글로 담아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역시 박완서 다운 필력으로 단어를 조합하고, 읽는 이로 하여금 상상하게 만들어 놓았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가 아닐까 싶다.

묘하게도 그 지점이 사람 마음을 쥐로 흔든다. 박완서라는 사람에게 끌리게 하고, 그녀의 글을 더 읽게 만든다. 심지어 따라 써보아야겠다는 생각까지 들게 하고, 곱씹어 읽어야겠다는 생각마저 들게 만들었다. 박완서의 다른 책을 읽어도 같은 감정을 느낄지 궁금하다. 가려운 곳이 있지만 정확하게 어디가 가려운지 몰라 안달하는 마음과 비슷한 감정으로 박완서 작가의 다음 글이 가렵게 다가온다.




교만하게도 나는 같은 책을 반복해서 읽지 않는다. 어지간해서는 절대로 반복해서 읽지 않는다. 다시 읽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책이 없는 것은 아니다. 반드시 다시 읽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책이 있지만 무슨 고집인지 이상하게도 같은 책을 읽지는 않는다. 그저 언젠가 다시 읽을 날이 올 것이라는 생각을 할 따름이다.

박완서의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는 다시 읽고 싶다. 반복해서 읽으면서 박완서라는 작가를 더 깊숙하게 만나고 싶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싶고 대화를 나누고 싶다. 질문하고 싶고 책 속에서 그녀의 대답을 들어보고 싶다. 읽어야 할 여러 책이 나를 기다리고 있고, 다시 읽고 싶은 책도 여러 권 있다. 다시 읽어야 할 책 중 단연코 가장 먼저 뽑아들 책으로 꼽고 싶다. 박완서를 읽으며 나의 삶을 더 깊이 들여다보고 세상을 아껴서 바라보고 싶다. 함께 살아가는 나의 사랑하는 가족을 더 오래도록 바라보고 싶고 더 많이 사랑하고 싶다.

삶을 더 사랑하게 만들어주는 책이라니... 기가 막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