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으로는 초월자와의 연결입니다. 자신보다 더 큰 존재와 연결된다는 것은 언제나 가슴 벅차고 떨리는 일입니다. 때로는 두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저자는 기도를 통해 초월자와 연결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신학대학원 출신답게 기도의 네 가지 영역을 소개합니다. 찬양, 회개, 감사, 간구입니다.
기도라는 말을 들으면 어딘지 모르게 거북함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종교성, 특별히 기독교의 이미지가 강한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실제 기도는 기독교의 전유물은 아닙니다. 거의 모든 종교에 기도와 같은 종교행위가 있습니다. 이 행위를 통해 저마다 자신의 사랑하고 섬기고 두려워하는 초월자를 찾습니다. 초월자와 연결되려고 합니다. 기독교에서 기도의 행위가 더 강하고 자연스럽게 나타날 따름입니다.
실은 이것도 꼭 그렇지 않습니다. 무슬림을 보면 단번에 이해할 수 있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무슬림은 하루 다섯 번 메카를 향해 기도합니다. 정한 시간에 정한 장소를 향해 그들만의 의식적인 행위를 하면서 기도합니다. 리추얼입니다. 기도라는 리추얼을 통해 더 큰 대상과 연합을 추구합니다. 그것도 매우 열정적이며 규칙적으로 행합니다.
저자는 기도를 통해 초월자와 연결되는 것은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고 주장합니다. 사람은 예배하는 존재이며 종교심이 디폴트 값이라면 당연한 일입니다. 저자는 주기도문으로 기도하기를 즐긴다고 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기가 못내 불편해서 타로 카드를 사용 "하늘에 계신 우리 늑대님"으로 부르기도 한다고 합니다.
나는 이 지점이 너무 재밌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이 성차별적인 요소로 보아야 하는지 의심이 생겼습니다. 하늘에 계신 늑대님으로 부르는 것이 더 편하다는 이유로 아버지가 아니라 늑대님으로 부르는 것이 더 우습고 더 초라한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초월자로서 하나님이 실존하신다면 하나님의 이름을 내 마음이 편하다는 이유로 내가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는 것은 그야말로 위험천만한 일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알맞은 이름을 부르는 것이야말로 바른 행위일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