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추얼의 힘 - 하버드 신학대학원 펠로우가 찾아낸 관계, 연결, 일상 설계의 기술
캐스퍼 터 카일 지음, 박선령 옮김 / 마인드빌딩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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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지않아 세상에서 종교는 사라질 것이다."

과학이 발전하고, 교육이 확대되고, 교양 수준이 높아지는 것을 보며 한때 많은 사람이 목소리 높여 주장했던 이야기입니다. 계몽주의 시대를 지나면서 서양세계를 주도해 왔던 기독 신앙과 성경에 대해 의구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기독 신앙이 과학을 가능하게 했지만 과학이 기독 신앙을 앞질렀을 뿐 아니라 벗어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인간 이성을 숭배하면서 자연스럽게 신앙이나 종교는 위축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질주의와 그 아류가 널리 퍼지기 시작하면서 이 현상은 더 가속화되었습니다. 아니 더 이상 사람의 내면과 삶의 방향에 개입하지 못하게 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종교가 사라질 것이라는 이야기가 허황된 말이 아닌 것처럼 보였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21세기를 지나는 지금 지구촌을 채우고 있는 사람은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종교심으로 가득합니다. 신앙의 대상, 예배의 대상이 달라진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예배하지 않는 사람, 신앙을 가지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각기 다양한 방식으로 각기 다양한 곳에서 영성을 추구합니다. 영성이란 단어가 지금처럼 다양한 영역에서 다양한 사람에 의해 사용된 적이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닙니다. 종교성 가득한 이 단어가 일상의 단어가 되었습니다. 무슨 말일까요? 사람에게 종교성(종교심)은 디폴트 값이며, 종교성 없는 사람 없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가진 종교심을 조금 더 일상의 언어로 설명할 수 있다면 어떨까요?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일상을 새로운 시선으로 보고 해석할 수 있다면 흥미롭지 않을까요? 그것이 인간의 본성을 담아내고 있을 뿐 아니라 삶을 풍성하게 하고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면 호기심을 사로잡을 수 있지 않을까요? 여기 바로 그 책이 있습니다. 하버드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캐스퍼 터 카일의 [리추얼의 힘 - The Power of Ritual]입니다.





서구 문명을 너무나 빠르게 흡수한 나머지 놀랍게도 서구 사회 보다 더 개인적이고 더 이기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공동체가 축소될 뿐 아니라 와해되는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공동체 없이 살아갈 수 없습니다. 소속감이 필요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딘가에 소속해 있다는 것은 큰 안정감을 줍니다. 공동체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척도입니다. 가정이 붕괴되고 공동체가 위축되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공동체를 형성하고 찾습니다. 지금의 우리나라의 모습은 고작해야 정치 성향으로 똘똘 뭉치거나 지연이나 학연 따위로 공동체를 형성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 같습니다. 안타깝다는 말 외에 적합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을 정도입니다.

캐스퍼 터 카일은 [리추얼의 힘]에서 이런 우리의 숨기고 싶은 부분을 정확하게 타격하고 들어옵니다. 우리가 고립과 산만함의 위기에 처해 있다고 진단합니다. 고립과 단절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은 본능적으로 누군가에게 연결되려고 합니다. 고립과 단절의 위기를 극복하고, 고립과 산만함이 아닌 연결과 집중된 삶을 다양한 방식으로 추구합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종교단체가 아닌 다른 곳(크로스핏, 소울사이클과 같은 운동을 목적으로 모인 단체)에서 소속감을 얻을 뿐 아니라 종교심을 채우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말 그대로 새로운 공동체가 출현한 셈입니다.

저자는 이 지점에서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고립과 단절을 본능적으로 거부할 뿐 아니라 어딘가 또는 누군가에게로 연결되기 원하며 그런 삶을 추구한다는 점입니다. 오랜 연구와 실천을 통해 리추얼(항상 규칙적으로 행하는 의례, 행동과 같은 일)을 통해 서로에게 더 잘 연결될 뿐 아니라 충만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캐스퍼 터 카일은 삶의 전 영역을 크게 네 가지 영역으로 나누고 그 안에서 우리가 어떻게 리추얼을 실천할 수 있는지를 통해 고립과 단절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어떻게 서로에게 더 잘 연결되고 더 충만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지 풀어냈습니다. 네 가지 영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자신과의 연결

둘째, 주변 사람들과의 연결

셋째, 자연과의 연결

넷째, 초월자와의 연결


나에게 무척 흥미로웠던 부분은 자신과의 연결이었습니다. 나와의 연결에 가장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으로 독서와 안식의 시간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깜짝 놀랐던 것은 해리 포터를 신성한 독서를 위한 텍스트로 삼았다는 사실입니다. 해리 포터가 신성한 독서 텍스트라고요? 네 맞습니다. 해리 포터를 한 챕터씩 읽으면서 그게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 무엇을 가르쳐 줄 수 있는지 묻습니다. 이 생각을 (해리 포터와 신성한 텍스트)라는 이름의 팟캐스트로 송출까지 했습니다. 지금까지 무려 2,200만 회 이상 다운로드를 기록했고, 해마다 투어를 다니며, 7만 명의 정규 청취자까지 보유하고 있다고 하니 그저 웃어넘길 수준이 아닙니다.

책을 읽으면 그 문장이 나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그 문장 이면에는 무엇이 흐르고 있는지 살핍니다. 행간을 살피고 맥락을 살펴봅니다. 상상의 나래를 펼쳐야 할 필요가 있다면 주저하지 않고 상상의 날개를 펼칩니다. 마치 성직자가 경전을 읽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해리 포터를 읽습니다. 단순한 예로 해리 포터를 들었지만 제인 에어를 읽기도 합니다. 어떤 책이라도 상관없다고 말합니다. 모든 책을 신성한 텍스트로 삼고 읽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 일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더 깊숙이 들여다보고, 자신과 더 잘 연결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리추얼의 힘을 빌려 규칙적으로 이 일을 한다면 당연히 자신과 더 잘 연결될 뿐 아니라 자신을 더 잘 알게 되고,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충격적이면서도 매우 신선한 이야기로 다가왔습니다. 누구라도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자신과 더 깊숙하게 연결되기 위해 의식적으로(리추얼입니다)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자신은 기술의 인식일을 지정해서 하루 동안은 모든 기계로부터 멀어진다고 합니다. 휴대전화나 인터넷 각종 sns로부터 자신을 차단합니다. [아브라함 헤셸의 안식일]이란 책에서 착안하고 그가 제안하는 안식일을 자신에게 맞게 적용했습니다. 그녀는 안식일의 리추얼을 통해 삶의 리듬을 회복할 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더 충실한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의도적으로 안식일을 정하고 리듬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온갖 일에 쫓기는 삶에서 벗어날 수 있고 주도적인 삶을 살아가는 비결이라고 말합니다.




두 번째는 주변 사람과의 연결입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필연적으로 나는 누구에게 속해 있는가?로 이어집니다. 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본질적으로 우리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에 의해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내가 누구인지 규정할 수 있고, 나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기 때문에 내가 누구인지 알려면 필연적으로 내가 누구에게 연결되어 있고, 어디에 소속해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나와의 연결은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과의 연결로 이어지는 법입니다.

다른 사람과 더 깊고 부요하게 연결되는 일에는 공동식사만큼 유용한 것이 없습니다. 미국에서 유학하는 동안 많은 미국인과 한인이 종종 포틀럭 파티(집에서 각기 음식을 가져와서 여는 파티)를 즐긴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한국 문화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독특한 문화였습니다. 포틀럭 파티를 즐기면서 서로에게 깊숙이 연결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공동 식사나 함께 밥을 먹는 행위를 의식적으로 정기적으로 행할 때(리추얼) 서로에게 더 깊이 연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관계 속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더 깊이 알고, 정체성이 부요해집니다. 더 나아가 관계가 부요해질 뿐 아니라 결국 부요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 외에는 저자는 다양한 방식으로 서로에게 연결될 수 있는 길을 제시하며 리추얼의 힘을 빌려 더 풍성하게 서로에게 연결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세 번째는 자연과의 연결입니다. 이 역시 미국에서 지내는 동안 발견한 것 중 하나입니다. 우리나라 사람은 여행할 때 멋진 경치를 배경으로 사진 찍는 일에 급합니다. 흔히 인생 샷을 건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합니다. 게다가 한 번의 여행에서 여러 곳을 다니면서 사진을 찍습니다. 언제 또다시 이곳에 오겠나?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 후 조금이라도 더 보고, 한 장이라도 더 사진을 찍으려고 노력합니다.

미국 사람은 전혀 다른 성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여기저기 기웃거리거나 방문하는 것이 아니라 한곳에서 오롯이 머물면서 휴가를 즐깁니다. 사진을 찍긴 하지만 눈과 마음에 풍경을 담는 모습, 멍하게 앉아 광활하고 아름다운 자연을 즐기고, 자연과 연결되는 일에 더 몰입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들에게서 볼 수 있는 독특한 점은 자연 속으로 들어가는 일입니다. 모험하고 탐험하는 일을 즐기며, 그 일을 통해 자연과 일치를 추구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자연 속에서 야성을 회복하고 영감을 얻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 챕터에서 저자가 주장하는 바가 정확하게 그것과 일치합니다. 사람은 자연을 함부로 대할 수 있습니다. 반면 자연을 존중할 수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 자연 속으로 들어가 자연과 연결되고 자연과 일치를 추구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자연을 존중하고 자연과의 연결을 추구한다면 지금처럼 지구를 훼손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앞으로 1,000년이 지나면 자연은 회복되겠지만 인류의 존재는 장담할 수 없다는 점도 빼놓지 않습니다. 자연과 의식적인 연결을 통해 더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을 뿐 아니라 자연을 보호할 수도 있다는 저자의 주장은 충분히 귀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초월자와의 연결입니다. 자신보다 더 큰 존재와 연결된다는 것은 언제나 가슴 벅차고 떨리는 일입니다. 때로는 두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저자는 기도를 통해 초월자와 연결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신학대학원 출신답게 기도의 네 가지 영역을 소개합니다. 찬양, 회개, 감사, 간구입니다.

기도라는 말을 들으면 어딘지 모르게 거북함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종교성, 특별히 기독교의 이미지가 강한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실제 기도는 기독교의 전유물은 아닙니다. 거의 모든 종교에 기도와 같은 종교행위가 있습니다. 이 행위를 통해 저마다 자신의 사랑하고 섬기고 두려워하는 초월자를 찾습니다. 초월자와 연결되려고 합니다. 기독교에서 기도의 행위가 더 강하고 자연스럽게 나타날 따름입니다.

실은 이것도 꼭 그렇지 않습니다. 무슬림을 보면 단번에 이해할 수 있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무슬림은 하루 다섯 번 메카를 향해 기도합니다. 정한 시간에 정한 장소를 향해 그들만의 의식적인 행위를 하면서 기도합니다. 리추얼입니다. 기도라는 리추얼을 통해 더 큰 대상과 연합을 추구합니다. 그것도 매우 열정적이며 규칙적으로 행합니다.

저자는 기도를 통해 초월자와 연결되는 것은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고 주장합니다. 사람은 예배하는 존재이며 종교심이 디폴트 값이라면 당연한 일입니다. 저자는 주기도문으로 기도하기를 즐긴다고 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기가 못내 불편해서 타로 카드를 사용 "하늘에 계신 우리 늑대님"으로 부르기도 한다고 합니다.

나는 이 지점이 너무 재밌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이 성차별적인 요소로 보아야 하는지 의심이 생겼습니다. 하늘에 계신 늑대님으로 부르는 것이 더 편하다는 이유로 아버지가 아니라 늑대님으로 부르는 것이 더 우습고 더 초라한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초월자로서 하나님이 실존하신다면 하나님의 이름을 내 마음이 편하다는 이유로 내가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는 것은 그야말로 위험천만한 일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알맞은 이름을 부르는 것이야말로 바른 행위일 테니까요.



[리추얼의 힘]은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많은 이야기를 건넵니다. 자신의 삶을 더 깊숙하게 들여다보게 합니다. 독서의 힘이 얼마나 큰지 깨닫게 합니다. 다른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지 보여줄 뿐 아니라 결국 내가 그들에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자연을 어떻게 생각하고 대해야 하는지 알려줄 뿐 아니라 우리가 결국 자연의 일부라는 점도 알려줍니다. 무엇보다 초월자를 무시하는 이 시대에 초월자에게 연결되는 일이야말로 삶의 방향과 내용을 충실하게 채우는 일이며, 가슴 벅찬 일이라는 진리를 보여줍니다.

저마다 다양한 시선으로 이 책을 읽을 것 같습니다. 종교적인 색채가 더없이 강한 책이고, 그 안에 기독교 요소가 숨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전혀 기독교적인 느낌 없이 읽을 수도 있습니다. 불교나 이슬람 신도가 읽어도 전혀 불편함이 없을 책입니다. 어쩌면 기독인이 가장 불편하게 읽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발견해 나갈 뿐 아니라 고립과 단절의 시대 속에서 공동체의 소중함을 생각하고 자신뿐 아니라 서로에게 깊숙하게 연결된 삶을 원하는 사람의 필독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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