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으면서 경제지표와 다양한 도표를 활용한 피케티의 친절함에 한 번 더 고마운 마음을 느꼈습니다. 조금 더 정직하게 말하면, 나는 그 내용을 다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 도표와 그 아래에 달린 해석 때문에 그나마 그의 시선과 사상을 따라갈 수 있었습니다.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질문이 있었습니다. [사람에 대한 이해]입니다. 인문학 시선에서 사람에 대한 이해, 직관적인 견지에서 사람에 대한 이해입니다. 피케티는 지구촌 모든 사람이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일을 위해 미국, 유럽연합, 프랑스, 독일 등의 지도자들이 바른 선택을 내려야 한다는 것, 경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세안을 제대로 세우고 활용해야 한다는 것, 무엇보다 이 땅을 살아가는 많은 서민이 이 문제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따릅니다.
여기서 문제가 생기는 것처럼 보입니다. 보수진영에 속한 사람, 부를 거머쥔 사람이 과연 그의 의견에 동의할까? 자신이 움켜쥔 권력과 경제력을 내려놓을까? 보편적 인류의 더 나은 삶을 위해 개인의 욕심을 제한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입니다. 나는 이 부분에서 회의적입니다. 역사 속에서 사람은 그렇게 살지 않는다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권력구조, 계층구조를 포기하지 않을 것처럼 보입니다. 피케티 역시 이 부분을 모를 리 없습니다. 누구보다 더 잘 알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의 책에서는 이런 부분에 대한 진단이 보이지는 않습니다. 말 그대로 객관적인 지표와 사실을 바탕으로 바른 선택을 내리기 바라는 것처럼 보입니다. 강요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기 때문이리라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조금 아쉬운 것은 사실입니다.
조세법이나 유럽연합이나 각 국가의 정부가 세계 경제문제라는 거대담론을 통해 구조적으로 해결해 나갈 것을 주장하는 이유가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한 사람의 힘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기도 하고, 사람의 심리가 그렇게 작동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구조적으로, 법이라는 강제력을 바탕으로, 거시적 안목을 가지고 이 문제를 해결해 나가길 바라는 것 같습니다. 이 부분에서 나도 피케티의 의견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해 욕심을 조금 줄이고, 자신을 절제하고, 나눌 수 있기를 바라지만 요원한 일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문제 때문에 양극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협력(Collaboration)이 필요하단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치, 경제, 문화, 스포츠, 언론, 법, 예술, 문학의 지도자들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협력할 수 있다면 인류는 양극화의 문제를 서서히 그러나 확실히 해결해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아름다운 상상의 나래를 펴보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