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진 어떠한 감정을 '외로움' 이라고 추상화 시킨다면 이게 보편적 의미로서의 '외롭다'에 해당되는 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 보다 먼저 나는 '외롭다'에 해당 되는 감정이 과연 어떤것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었는가?
그래서 '외로움'이라 하는 것은 나의 어떠한 한 주관적 감정일것이다.
'외로움'이라는게 내 삶의 이슈가 되어 본 기억이 거의 없는 바로 보아 그리 중요한 쟁점이 아닌것은 확실한데
이 이유는 다음 요인들 중에 들어 있을 수도 있다.
'외로움' 센서의 감지도가 무척 떨어진다.
'외로움'을 유발하는 환경에서 서식하지 않는다.
'외로움'은 정확히 인지하나 그로 인한 연계 작동이 일어나지 않는다.
인지도 되고 유발작동도 발생하나 특급 기밀에 붙여진다.
물론 들어 있지 않다.
내 감정은 날카롭고 불안정하며 조그만 자극으로서도 쉽게 요동친다.
내게 있어서 '외로움'을 억압하는 요인은 다음 둘이다.
첫째. 누군가가 내게 맘을 줄때
둘째. 누군가에게 내가 맘을 줄때
따라서 지리적 위치, 쪽수 이런건 무상관이라 군중속의 고독 같은 건 너무나 지당한 말씀이고 어디 무인도에 혼자 있든 상관이 없다.
현실적으로 보아 내 운명을 남에게 의존하는 건 매우 위험하다.
패시브 보다는 역시 액티브가 좋은거라 누군가가 내게 맘을 주기를 기다리며 위험스런 상황을 맞이 하느니
내 맘을 줄 누군가를 찾는게 훨씬 나은 전략으로 나는 받아 들인다.
깁앤테이크지 테이크앤깁이 아닌 것처럼. 테이크앤런은 있구나.
실전에 들어가보면 다들 알게 되지만 준 만큼의 리턴을 기대하는 건 참 짜증스런 상황이다.
그래서인지 짝사랑은 참으로 풍부한 감정을 만들어 준다.
내가 맘을 주고 있다는 건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첫째. 철저한 무비판 정신이다. 오직 찬양만이 있다. 비판자는 공공의 적이 된다.
둘째. 일방적이다. 상대도 맘을 주면 좋지만 그건 결정적인 요인이 아니다.
세째. 여러 미덕을 갖춘 전담 인격체를 준비하고 완벽한 스위칭을 한다.
네째. 무언가를 계속 갖다 받치려한다. 노골적으로 원하다면 바리바리 싸 보낼 태세 상시 완비.
다섯째. 쓰잘데기 없는 준비를 많이 한다. 단 그 사실은 절대 비밀에 붙여지며 실상 별 효과도 없다.
본질적인 면에서 보면 내가 맘을 준다는 건 다분히 이기적 행위이다.
이로서 난 따뜻하고 평온하며 여유있는 감정을 유지할 수 있고 거기다 불필요한 고통을 막는 아주 효과적인 방어막을 치고 있으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