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는 이처럼 모든 인간은 착한 본성인 사단四端을 갖고 있는데 이를 토대로 인의예지仁義禮智라는 사덕四德을 쌓아야 선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착한 마음을 가졌어도 이를 제대로 다스리지 않으면 잘못된 방향으로 변할 수 있기 때문이죠.

이 덕은 외적 조건의 방해가 없으면 자연히 내적으로 발현되어 나타납니다. 마치 작은 씨앗에서 나무가 자라나는 것처럼 말이죠.

그렇다면 대체 인간은 왜 동물적인 본능 대신 사단을 가꾸고 확장해야 하는 걸까요?

이제 주어진 질문에 답해볼 차례입니다. 만약 맹자의 생각처럼 인간이 선하다면 스스로의 본성을 잘 지키고 가꿨다는 전제하에 우리는 늘 선한 행동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반면 순자의 입장처럼 인간이 악하게 태어났다면 우리는 단지 선한 행동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행동을 추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심지어 법과 규범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고 무질서하게 행동할 수도 있겠죠.

과연 인간의 본성은 어느 쪽에 더 가까울까요? 만약 맹자의 입장에 가깝다면 우리가 선해 보이지 않는 행동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순자의 입장에 가깝다면 단지 법과 규범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선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당신의 생각은 어떤가요?

그가 도망 대신 죽음을 선택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해석됩니다. 먼저 그는 자신이 살아 있는 대신 아테네에서 추방당하거나 입막음당해 철학을 하지 못하게 되면 그 삶은 의미가 없다고 여겼습니다.

오히려 자신은 지혜를 사랑하는 활동, 즉 철학함을 멈추지 않겠다고 이야기했죠. 더불어 죽음에 대한 그의 독특한 입장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나의 무지를 자각하고 여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것을 ‘지식’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혹은 지식을 추구하는 자세나 태도에 불과하다고 해야 할까요? 당신의 생각은 어떤가요?

죽을 때 자서전을 남긴다면 제목은 무엇으로 하고 싶나요?

"모든 이야기에 끝이 있듯이, 인생에도 끝이 있다. 모든 이야기가 결말에 의해 그 의미가 좌우되듯이, 인생의 의미도 죽음의 방식에 의해 의미가 좌우된다"고 말했습니다.

즉, 결말에 따라 그동안의 일의 의미가 바뀔 수도 있다는 것이 ‘모든 인간은 제대로 죽기 위해서 산다’는 말의 의미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질문은 우리가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가 아닌 ‘죽음의 공포를 통해 어떤 사람으로 변화할 수 있는지’를 묻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의 생각은 어떤가요?

인간의 몸을 이루는 60~70조 개의 세포들은 주기적으로 교체 과정을 거칩니다.

피부를 구성하고 있는 세포는 2~3주마다 재생되고 백혈구와 적혈구도 각각 일주일과 4개월 정도 유지된다고 하죠. 몸속 지방세포는 평균 10년 정도 유지되며 심지어는 뼈조차도 10년 주기로 재생될 수 있다고 합니다. 굳이 생물학적 측면을 살펴보지 않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내가 하지 못한 경험과 지식을 쌓아가고 있는 존재입니다. 나는 분명 나지만 끝없이 새로운 나인 것이죠. 이처럼 육체적 ・ 정신적으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나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지난 한 주간 가장 흥미로웠던 경험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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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어린이 이야기를 계속해 보기로 했다. 그건 내 생활의 내용이기도 했다. 

댓글에 적힌 사연을 읽을 때마다 글을 쓰기 잘 했다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았다면이렇게 귀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어디서 만났겠는가. 

나자신을 위해 쓰겠다고 했는데 바라던 대로 된 셈이다.

 어린이라는 세계는 우리를 환대한다는 사실이다. 

우리에게 ‘어린 시절‘ 이라는 공통점이 있어서인지, 어린이들의 진솔한 모습 때문인지 모르겠다

어린이라는 세계가 늘 우리 가까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확실한 건 어린이에 대해 생각할수록 우리 세계가 넓어진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의 한 부분을 나누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을 아는 것이 저의 큰 영광입니다.

"그것도 맞는데, 지금도 묶을 수 있어요. 어른은 빨리 할수 있고, 어린이는 시간이 걸리는 것만 달라요."

어린이는 나중에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지금도 할 수 있다. 시간이 걸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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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면 생각나는 게 생각이므로 부러 생각하지 않는 게 좋은 생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지금 와 돌이켜 보면 생각에 대한 재치 있는 풍자다.

이처럼 생각은 뱅뱅 맴돌기를 좋아한다.

우리는 생각이라는 것을 할 때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한없이 제자리를 맴돈다.

글을 쓰고 읽는 게 보통 일이 아니듯 생각은 몹시 수고로운 일이다.

우리는 귀한 줄 몰라서 생각을 함부로 하지만, 그 수고로움을 꺼린 나머지 함부로 생각하기도 한다

태어나서 생명을 부여받는 것은 누구나 똑같은데, 어떤 삶을 어떻게 살아갈지 고민하고 실천하는 역량에 따라 사람의 삶은 갈린다.

생각도 그러하다.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사람의 격과 삶의 격이 천 갈래, 만 갈래 갈린다.

결국 어떤 삶을 어떻게 살아가느냐의 문제는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며 사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생각의 말들』은 ‘생각’이라는 표현이 들어간 말들 가운데 생각에 대한 생각을 다시 곰곰이 생각게 하는 100편의 말들을 가려 모은 것이나, 속내는 생각에 줏대가 있던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했고, 어떻게 생각했는가를 돌아보고 헤아리는 것이다.

아무리 듣기 좋은 말도 우리가 그것으로부터 비판적 사고를 끌어낼 수 없다면 그건 값싼 상투어에 불과하다.

하물며 다른 말도 아닌 생각의 말들을 모아 놓았을진대, 그에 대해 별생각이 없거나 하나의 생각에 고착된다면 이보다 더한 클리셰의 폐해는 없다.

오랫동안 노예 신분이었던 사람이 갑자기 주어진 자유에 당황하듯, 그들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낯설어하고 두려워했다.

일단 스스로 생각할 줄 알고 사회 모순을 이성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자신이 처한 모순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텐데, 그들은 생각 그 자체에 지레 겁을 먹었던 것이다

결국 인간의 악행은 선한 생각이 아닌 악한 생각을 먼저 품고 그에 따라 행동한 결과가 아니다. 오히려 사유의 부재, 생각의 무능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무지한 것은 단순히 머리가 나쁘거나 배움의 의지가 부족해서만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이 알고 싶어 하지 않기에 무지한 경우가 더 많다. 그들은 "자기가 무엇을 ‘알고 싶어 하지 않는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렇다면 무지는 수동적 결과가 아니라 ‘알고 싶지 않다’는 적극적 의지의 발로다.

‘알고 싶지 않다’는 마음가짐을 갖고 한결같이 노력해 온 결과가 바로 무지이며, "무지는 나태의 결과가 아니라 근면의 성과"다. 레이놀즈의 말처럼 생각의 수고를 피하고자 갖은 꾀를 부린다는 게 그리 해괴한 일은 아닌 것이다.

우리가 제대로 정신을 차려야 하는 순간에도 그것은 대충하라고 우리를 유혹합니다

생각은 적지 않은 에너지가 쓰이는 몹시 수고로운 일이다.

이 수고를 기꺼워하는 이는 당연히 드물다. 하지만 생각의 수고를 피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 뚜렷해지는 건 흑백의 경계일 뿐이다.

다름이라는 사실 자체보다 다름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에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다름을 적대의 눈이 아닌 관용의 눈으로 볼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 다름에 대한 피상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했다.

차이와 다름을 거부하고 고만고만한 생각을 하는 사람끼리만 모여 바깥으로 나오지 않았다면, 문명은 자신이 가진 생각의 폭과 깊이를 재고할 기회를 갖지 못한 채 발전은커녕 쇠퇴할 수밖에 없었으리라는 것이다.

"진공 상태에서는 생각을 할 수 없으며, 비슷비슷한 것으로부터는 새로운 생각을 낼 수 없다."

우선 이 책은 기존 세상을 지배하는 이타주의 도덕관을 비판한다. 도덕에는 ‘생명의 도덕’과 ‘죽음의 도덕’이 있는데, 이타주의가 죽음의 도덕에 속한다는 것이다.

죽음의 도덕은 기본적으로 인간을 악하다고 보기 때문에 이기주의를 죄악시하고 이타주의를 미덕으로 여긴다. 그러나 이타주의는 사람을 쉽게 죄책감에 빠지게 하고 그 보상을 현세가 아닌 내세에서 헛되이 구하게 만든다.

반면, 생명의 도덕은 인간이 이성을 가지고 논리적 추론을 통해 존재를 인식하고 현실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에 바탕을 둔다.

이 생명의 도덕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인간의 미덕은 연민 같은 감정이 아니라 바로 ‘생각’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정신은 생존을 위한 기본 도구이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생각을 할 수 있을 때, 인간은 비로소 자신의 가치를 제대로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 정말 얼마큼 적으냐……"

생각에 있어서도 우리는 참으로 작은 것 같다.

생각이 없거나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은 차라리 드문데, 생각이 작은 것은 흔해 보인다. 그리고 생각이 없거나 생각을 하지 않아서 생기는 폐해보다 생각이 얕고 잘아서 생기는 폐해가 더 크지 싶다. 그런데 왜 우리의 생각은 작을까?

작은 생각을 해서 생각이 작은 게 아니다.

처음부터 큰 생각도 새로운 자극을 꾸준히 받지 못하면 옹졸히 졸아든다.

꾸준히 운동하지 않으면 육신의 기력이 쇠하듯, 생각이라는 활동도 꾸준히 해 주지 않으면 정신의 기력이 쇠할 수밖에 없다.

육체든 정신이든 가만두면 퇴행하는 게 우리 인간의 기본값일 테니.

그들은 생각하지도 않고 욕망하지도 않는 그냥 걸어 다니는 동물일 뿐이었으며, 그들이 뭔가를 생각하는 게 있다면, 오직 배고픔에 대한 것이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세상의 어리석음을 한탄한 반면, 데모크리토스는 세상의 어리석음을 조롱했다는 얘기가 전해져 내려오기 때문이다. 같은 대상을 두고 이성의 눈으로 보느냐, 감성의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 대상에 대한 태도가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이다

피아니스트이자 코메디언인 스티브 앨런은 "비극에 시간을 더하면 희극이 된다"라고 했으며,

배우이자 감독인 찰리 채플린은 "삶이란 클로즈업을 하면 비극이요, 롱숏에 담으면 희극"이라고 했다. 결국 거리를 두고 생각할 시간이 주어진다면, 대상이나 상황을 비극이 아닌 희극으로 볼 여지가 더 커지는 것이다

"삶이란 죽음과 죽음이라는 두 영원 사이에 놓인 한 순간이다. 그리고 그 순간 안에서도 의식적 사고가 지속되는 것은 찰나에 불과하다.

사유란 기나긴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섬광 같은 것. 그런데 이 섬광이야말로 전부다."

길지 않은 삶을 살면서 어쩌다 번뜩인 사유가 사유를 위한 사유에 그친다면 참으로 허망할 노릇이다. 찰나의 빛이 주어질 때, ‘아, 빛이구나!’ 하고 감탄하는 것에 그칠 게 아니라 그 빛으로 이 광대한 수수께끼의 아주 작은 일부분이라도 비춰 보려고 해야 하는 것이다

칼릴 지브란이 우리가 자식에게 혹은 젊은 세대에게 "생각까지 줄 순 없다"라고 한 것은 우리의 생각으로는 그들이 그들의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책에 사로잡힌다는 것은 저자의 사색에 빠져든다는 것이며 그로선 그것만큼 꿈결처럼 달콤한 것도 없다.

"나는 다른 이의 사색 속에서 시간을 보내며 그들의 정신으로 빠져드는 것을 좋아한다. 걷지 않을 때면 나는 책을 읽는다. 그런데 앉아서 사색하는 법이 없다. 책이 나 대신 사유하기 때문이다."

말을 하면 어쩔 수 없이 그만큼 사색의 시간을 빼앗기는 것이라, 필요한 말만 하고 딱 그 자리에서 멈추면 좋으련만 사람은 그 말소리에 스스로 취하기도 한다.

처음부터 말을 아끼면 좋겠지만 굳이 말을 해야 한다면 다수를 거스르지 않는 것이 좋겠다

옳고 그름을 떠나 상대의 의견을 거스르면 상대는 그것을 비난으로 여기고 모욕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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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몇 달 뒤 돌아가실 거라는 걸 알게 된 후에, 두 가지 선택권이 주어졌어요……."

"고통과 거리를 두든지, 아니면 더 가까워지든지요.

아빠를 잃기 전에 아빠가 내게 어떤 존재였는지 말할 기회를 놓쳤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전 고통과 가까워지기로 결심했어요. 너무 가까이 다가가는 바람에 엄마가 느끼는 고통과 공포를 나도 고스란히 경험하게 되었지만요."

"난 당신처럼 당신 누나가 내 인생을 망치는 걸 구경만 하고 있지 않을 거예요."

"과연 그럴까요? 여기서 머물던 마지막 날, 당신 누나는 당신에게서 행복을 전부 빼앗아 가는 데 성공했어요. 오늘 아침 얼사와 내가 당신에게 일어난 변화를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다고요. 이런 일,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일을 두려워한다면 결국 누나처럼 모질게 변할 거고, 그게 바로 당신 누나가 원하는 일이에요."

"아저씬 이제 우리랑 만나지 않기로 결정했어. 널 아끼는 건 똑같아. 그건 의심할 필요도 없어. 그저 앞으로 생길 일이 두려운 거야."

"만약 내가 진짜로 다른 세상에서 왔다면? 언니는 단 한순간이라도 내 말을 믿은 적 있어?"

어쩌면 얼사가 처한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 그들 자신의 얽히고설킨 관계를 먼저 풀어야 할지도 몰랐다.

"나도 당신만큼이나 두려워요."

‘영혼에 가해지는 끔찍한 인간성의 말살’ 말이에요. 그건 어쩌면 사람들이 다가오는 것을 허락하면 그들로 인해 상처 받을 것이 두렵다는 거와 일맥상통하지 않을까요."

"어떤 면에서 이 흉터들이 우리를 만나게 해 준 셈이에요."

그녀는 얼사를 찾아낼 것이다. 반드시 찾아낼 것이다. 그것이 하늘 위로 올라가서 아이를 별에서 끌어내려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고 해도

"당신이 자길 사랑한다는 걸 알게 되고 나서 이곳에 남기로 결심했대요. 다섯 번째 기적 때문에 돌아갈 필요가 없어진 거죠."

"비밀 하나 알려드릴까요? 헤트라예(Hetrayeh)를 거꾸로 말해보세요."

"얼사 앤 듀프리(Ursa Ann Dupree)가 이어푸드 나 아스루(Earpood Na Asru)였어."

"내가 한 말 다 이해했니? 이제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내가 널 사랑하고 우리가 함께 있기 위해 노력했다는 걸 잊지 않았으면 해. 이 이상은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구나."

사랑은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고, 자기가 그런 열정 안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이 기쁘다고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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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일생 동안 스스로에게 수없이 많은 질문을 합니다.

종교나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사람들을 보며 ‘전쟁 없는 세상은 가능할까?’ 하고 궁금해하고, "너는 꿈이 뭐니?"라는 선생님이나 부모님의 질문에 ‘꿈이 꼭 있어야 하나?’ 하고 반문하기도 하죠.

이 모든 의문이 바로 바칼로레아가 묻는 질문이었어요.

철학은 생각보다 꽤 가까운 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죠.

이 책은 프랑스의 중등 과정 졸업 시험인 바칼로레아Baccalaureat를 함께 풀어보고자 기획한 일종의 워크북입니다.

바칼로레아는 쉽게 말해 우리나라의 대학수학능력시험 같은 시험입니다

괜히 ‘철학’이라는 단어 앞에 주눅 들지 마세요.

그저 50일간 나와 세계에 대해 생각해보는 기회로 생각하고 질문에 답해주세요.

책을 읽어나가며 자연스럽게 느끼겠지만 철학은 대단한 진리를 알려주는 학문이 아닙니다.

저마다의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이 각자의 삶과 세계에 대한 최선의 답을 내놓은 것뿐이죠.

그러니 질문에 답하는 순간만큼은 당신도 철학자가 되는 거예요.

이 책은 프랑스 대입 시험이자 기초 인문학의 상징인 프랑스 바칼로레아 기출 문제 50개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는 필수 지식을 탐구하고 나의 속마음을 알아가는 책입니다

바칼로레아 문항을 읽고 잠시 그에 대한 답을 생각해보세요.

그다음 이어지는 해설을 읽으며 서양철학, 동양철학, 역사 등 다양한 인문학 지식을 쌓아봅시다.

마지막으로 그날 읽은 인문학 질문의 심화 질문, ‘나에게 묻기’에 답합니다. 이때 꼭 인문학 지식을 이용해 답할 필요는 없어요.

매일 10분, 이 책을 통해 나를 둘러싼 세계에 관한 인문학 필수 지식을 쌓고 세계를 바라보는 나만의 시각을 확장하는 연습을 해봅시다

에피쿠로스의 철학은 흔히 ‘쾌락주의’로 분류됩니다.

그는 인간이 최대의 행복을 성취하도록 하기 위해 쾌락을 활용하는 방법을 탐구했습니다.

쾌락의 범위를 성욕, 물욕 등의 동물적이고 순간적인 쾌락에 국한하지 않고, 문화나 예술을 즐기는 것처럼 정신적 욕구를 충족해주고 장기적이며 지속성 있는 쾌락을 찾아가야 한다고 보았죠.

쾌락이란 취할 것을 취하고 금할 것을 금하는 동기를 탐구하거나 정신이 매우 혼란할 때 생기는 잘못된 의견을 떨쳐버리는 건전한 사유다.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 사는 것일까’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행복을 무엇이라고 규정할 것인지 묻고 답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신은 행복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그 행복을 위해 살아갈 필요가 있다고 느끼나요? 그리고 그 행복을 성취하려면 어떤 노력이나 행동이 필요한가요?

내 삶에서 가장 큰 행복의 순간은 언제였나요?

"당신의 꿈은 무엇이며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왔습니까?"

여기서 우리가 중점을 두고 논의해야 할 ‘꿈’의 정의는 두 번째 ‘실현하고 싶은 희망이나 이상’입니다.

이 정의를 토대로 우리에게 주어진 질문을 바꿔보면 이렇게 되겠네요. ‘우리에게 실현하고 싶은 희망이나 이상이 과연 필요할까?’

구성원들의 꿈이 보장받지 못하는 사회는 죽어 있는 사회나 마찬가지입니다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1844~1900)는 자신의 대표작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대의 꿈과 희망을 버리지 마라! 고귀한 사람은 모두에게 방해가 된다는 것을 알라. (…) 고귀한 사람은 새로운 덕을 창조하려고 한다. (…) 그대 영혼의 영웅을 외면하지 마라. 그대 안의 가장 높은 소망을 거룩히 지켜라!

꿈에는 정해진 시기도, 크기도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을, 나아가 우리가 속한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품는 모든 희망이 꿈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꿈이든 꿀 자유가 보장될 때 우리와 우리 사회가 살아 있다고 할 것입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꿈의 정의는 무엇인가요? 그리고 꿈은 당신에게 그리고 또 다른 개인에게 반드시 필요할까요?

인생의 마지막에 남기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요?

그는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지금의 삶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은둔자는 차라투스트라에게 왜 구태여 스스로 얻은 지혜를 나누려 하는지 묻습니다. 사람들은 어차피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할 테고 그렇다면 그의 노력은 헛수고에 불과할 테니까요.

여기서 위버Uber란 ‘뛰어넘는’을, 멘쉬mensch란 ‘인간’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위버멘쉬란 기존의 해로운 전통과 가치를 뛰어넘어 새로운 가치관을 만들어내는 인간인 것이죠.

그는 초인은 세계의 ‘영원회귀’를 받아들인다고 믿었습니다. 영원회귀란 말 그대로 세상 모든 것이 영원히 반복된다는 믿음입니다.

이미 일어났거나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이 영겁의 시간이 지난 후에는 다시 되풀이된다는 것이죠.

자연의 모든 과정을 결정하는 요인의 수는 유한하므로 이 요인들의 조합 가능한 수가 다 찬 뒤에는 이전의 조합이 반복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인생 영화는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저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1995)를 꼽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기를 원한다면 죽도록 내버려두어야 할까? 상대가 어떤 모습이든 있는 그대로 사랑해야만 진짜 사랑일까

질문에 답하기 전 먼저 사랑의 개념을 명확히 정의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이해를 바탕으로 사랑이라는 단어를 바라보며 고민하고 있기 때문이죠

사랑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 범위가 넓은 만큼 우리도 가능한 넓은 정의를 골라 논의를 이어가는 편이 좋을 듯합니다.

나를 한 가지 색으로 정의한다면 어떤 색인가요?

그는 기존 신념의 틀을 유지한 채 이를 조금씩 수정하기보다는 신념 자체를 모두 제거한 뒤 대체할 대상을 찾는 방법이 적합하다고 보았습니다

마치 통 속에 든 썩은 사과 하나가 다른 온전한 사과를 썩게 할 수 있는 것처럼 잘못된 신념 하나가 올바른 신념까지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급진적 회의 방식을 우리는 ‘데카르트적 회의’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생각에 어떤 진실을 담을 수 있을까요?

"죽기 전 나는 살고 싶다"

스토아학파의 가장 큰 특징은 윤리학을 실천의 영역으로 가져오고자 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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