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면 생각나는 게 생각이므로 부러 생각하지 않는 게 좋은 생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지금 와 돌이켜 보면 생각에 대한 재치 있는 풍자다.

이처럼 생각은 뱅뱅 맴돌기를 좋아한다.

우리는 생각이라는 것을 할 때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한없이 제자리를 맴돈다.

글을 쓰고 읽는 게 보통 일이 아니듯 생각은 몹시 수고로운 일이다.

우리는 귀한 줄 몰라서 생각을 함부로 하지만, 그 수고로움을 꺼린 나머지 함부로 생각하기도 한다

태어나서 생명을 부여받는 것은 누구나 똑같은데, 어떤 삶을 어떻게 살아갈지 고민하고 실천하는 역량에 따라 사람의 삶은 갈린다.

생각도 그러하다.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사람의 격과 삶의 격이 천 갈래, 만 갈래 갈린다.

결국 어떤 삶을 어떻게 살아가느냐의 문제는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며 사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생각의 말들』은 ‘생각’이라는 표현이 들어간 말들 가운데 생각에 대한 생각을 다시 곰곰이 생각게 하는 100편의 말들을 가려 모은 것이나, 속내는 생각에 줏대가 있던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했고, 어떻게 생각했는가를 돌아보고 헤아리는 것이다.

아무리 듣기 좋은 말도 우리가 그것으로부터 비판적 사고를 끌어낼 수 없다면 그건 값싼 상투어에 불과하다.

하물며 다른 말도 아닌 생각의 말들을 모아 놓았을진대, 그에 대해 별생각이 없거나 하나의 생각에 고착된다면 이보다 더한 클리셰의 폐해는 없다.

오랫동안 노예 신분이었던 사람이 갑자기 주어진 자유에 당황하듯, 그들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낯설어하고 두려워했다.

일단 스스로 생각할 줄 알고 사회 모순을 이성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자신이 처한 모순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텐데, 그들은 생각 그 자체에 지레 겁을 먹었던 것이다

결국 인간의 악행은 선한 생각이 아닌 악한 생각을 먼저 품고 그에 따라 행동한 결과가 아니다. 오히려 사유의 부재, 생각의 무능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무지한 것은 단순히 머리가 나쁘거나 배움의 의지가 부족해서만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이 알고 싶어 하지 않기에 무지한 경우가 더 많다. 그들은 "자기가 무엇을 ‘알고 싶어 하지 않는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렇다면 무지는 수동적 결과가 아니라 ‘알고 싶지 않다’는 적극적 의지의 발로다.

‘알고 싶지 않다’는 마음가짐을 갖고 한결같이 노력해 온 결과가 바로 무지이며, "무지는 나태의 결과가 아니라 근면의 성과"다. 레이놀즈의 말처럼 생각의 수고를 피하고자 갖은 꾀를 부린다는 게 그리 해괴한 일은 아닌 것이다.

우리가 제대로 정신을 차려야 하는 순간에도 그것은 대충하라고 우리를 유혹합니다

생각은 적지 않은 에너지가 쓰이는 몹시 수고로운 일이다.

이 수고를 기꺼워하는 이는 당연히 드물다. 하지만 생각의 수고를 피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 뚜렷해지는 건 흑백의 경계일 뿐이다.

다름이라는 사실 자체보다 다름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에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다름을 적대의 눈이 아닌 관용의 눈으로 볼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 다름에 대한 피상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했다.

차이와 다름을 거부하고 고만고만한 생각을 하는 사람끼리만 모여 바깥으로 나오지 않았다면, 문명은 자신이 가진 생각의 폭과 깊이를 재고할 기회를 갖지 못한 채 발전은커녕 쇠퇴할 수밖에 없었으리라는 것이다.

"진공 상태에서는 생각을 할 수 없으며, 비슷비슷한 것으로부터는 새로운 생각을 낼 수 없다."

우선 이 책은 기존 세상을 지배하는 이타주의 도덕관을 비판한다. 도덕에는 ‘생명의 도덕’과 ‘죽음의 도덕’이 있는데, 이타주의가 죽음의 도덕에 속한다는 것이다.

죽음의 도덕은 기본적으로 인간을 악하다고 보기 때문에 이기주의를 죄악시하고 이타주의를 미덕으로 여긴다. 그러나 이타주의는 사람을 쉽게 죄책감에 빠지게 하고 그 보상을 현세가 아닌 내세에서 헛되이 구하게 만든다.

반면, 생명의 도덕은 인간이 이성을 가지고 논리적 추론을 통해 존재를 인식하고 현실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에 바탕을 둔다.

이 생명의 도덕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인간의 미덕은 연민 같은 감정이 아니라 바로 ‘생각’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정신은 생존을 위한 기본 도구이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생각을 할 수 있을 때, 인간은 비로소 자신의 가치를 제대로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 정말 얼마큼 적으냐……"

생각에 있어서도 우리는 참으로 작은 것 같다.

생각이 없거나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은 차라리 드문데, 생각이 작은 것은 흔해 보인다. 그리고 생각이 없거나 생각을 하지 않아서 생기는 폐해보다 생각이 얕고 잘아서 생기는 폐해가 더 크지 싶다. 그런데 왜 우리의 생각은 작을까?

작은 생각을 해서 생각이 작은 게 아니다.

처음부터 큰 생각도 새로운 자극을 꾸준히 받지 못하면 옹졸히 졸아든다.

꾸준히 운동하지 않으면 육신의 기력이 쇠하듯, 생각이라는 활동도 꾸준히 해 주지 않으면 정신의 기력이 쇠할 수밖에 없다.

육체든 정신이든 가만두면 퇴행하는 게 우리 인간의 기본값일 테니.

그들은 생각하지도 않고 욕망하지도 않는 그냥 걸어 다니는 동물일 뿐이었으며, 그들이 뭔가를 생각하는 게 있다면, 오직 배고픔에 대한 것이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세상의 어리석음을 한탄한 반면, 데모크리토스는 세상의 어리석음을 조롱했다는 얘기가 전해져 내려오기 때문이다. 같은 대상을 두고 이성의 눈으로 보느냐, 감성의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 대상에 대한 태도가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이다

피아니스트이자 코메디언인 스티브 앨런은 "비극에 시간을 더하면 희극이 된다"라고 했으며,

배우이자 감독인 찰리 채플린은 "삶이란 클로즈업을 하면 비극이요, 롱숏에 담으면 희극"이라고 했다. 결국 거리를 두고 생각할 시간이 주어진다면, 대상이나 상황을 비극이 아닌 희극으로 볼 여지가 더 커지는 것이다

"삶이란 죽음과 죽음이라는 두 영원 사이에 놓인 한 순간이다. 그리고 그 순간 안에서도 의식적 사고가 지속되는 것은 찰나에 불과하다.

사유란 기나긴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섬광 같은 것. 그런데 이 섬광이야말로 전부다."

길지 않은 삶을 살면서 어쩌다 번뜩인 사유가 사유를 위한 사유에 그친다면 참으로 허망할 노릇이다. 찰나의 빛이 주어질 때, ‘아, 빛이구나!’ 하고 감탄하는 것에 그칠 게 아니라 그 빛으로 이 광대한 수수께끼의 아주 작은 일부분이라도 비춰 보려고 해야 하는 것이다

칼릴 지브란이 우리가 자식에게 혹은 젊은 세대에게 "생각까지 줄 순 없다"라고 한 것은 우리의 생각으로는 그들이 그들의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책에 사로잡힌다는 것은 저자의 사색에 빠져든다는 것이며 그로선 그것만큼 꿈결처럼 달콤한 것도 없다.

"나는 다른 이의 사색 속에서 시간을 보내며 그들의 정신으로 빠져드는 것을 좋아한다. 걷지 않을 때면 나는 책을 읽는다. 그런데 앉아서 사색하는 법이 없다. 책이 나 대신 사유하기 때문이다."

말을 하면 어쩔 수 없이 그만큼 사색의 시간을 빼앗기는 것이라, 필요한 말만 하고 딱 그 자리에서 멈추면 좋으련만 사람은 그 말소리에 스스로 취하기도 한다.

처음부터 말을 아끼면 좋겠지만 굳이 말을 해야 한다면 다수를 거스르지 않는 것이 좋겠다

옳고 그름을 떠나 상대의 의견을 거스르면 상대는 그것을 비난으로 여기고 모욕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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