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내게 베푼 모든 실패와 어려움,
내가 한 실수와 결례,
철없었던 시행착오도 다 고맙습니다.
그 덕에 마음자리가 조금 넓어졌으니까요.
나이 드는 것의 가장 큰 매력은 웬만한 일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린 날에는 조그만 일에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떻게 살아야 옳은지, 잘 사는 건 무엇인지 도무지 모르겠기에 모든 순간마다 흔들렸다.
내 삶을 지켜보며 그때그때 점수를 매겨주는 선생님이 한 분 계셨으면 싶었다.
"잘했네" "이건 틀렸다" 하며 동그라미나 별표를 그려주는 분이 있다면 나날이 얼마나 쉬워졌을까?
무대에 서 있는 나를 향해 누군가가 욕을 하거나 위협을 해도 보호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무서웠다
서른이 되어도 달라진 건 없었다. 흔들림은 여전했다.
하지만 10대나 20대와는 다르게, 나에 대해 조금은 알 것 같은 기분? 세월만큼 버티고 선 느낌이랄까?
사십 대가 되니 두렵고 떨리게 했던 것들에 대한 겁이 조금 없어졌다.
더 이상 누가 나를 욕하거나 위협할 때 파르르 떠는 새가슴이 아니었다. "왜, 뭐!" 하며 두 눈을 똑바로 뜨고 할 말은 할 수 있게 되었다.
‘아무 말 안 하고 있으면 더 밟아대는구나. 한 번이라도 큰소리쳐야 건드리지 않는구나.’ 혹독한 지난 시간 덕택에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누가 별난 짓을 해도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같은 노래에도 관객의 평이 모두 다르듯 정답이랄 게 없었다. 그러니 남 신경 쓰지 않고 내 마음이 흘러가는 대로 살기로 했다.
그토록 원했던 안정감인데, 이런 감정이 좋으면서도 한편 답답한 것이 사실이다.
설렘과 울렁거림이 없이 침잠되는 느낌이 들어서다.
몸이 움직이는 속도가 마음의 속도를 따라주지 못하니, 예전 같으면 후다닥 해치울 일들이 한 뜸씩 느려졌다.
어느덧 칠십. "나이 먹는 게 좋다. 너희도 나이 들어 봐봐. 젊음과 안 바꾼다" 했었는데 무심코 젊은 날의 내 사진을 하염없이 보고 있다.
대체 무얼 하며 이 좋은 날들을 보냈나? 많은 나날이 손가락 사이 모래알처럼 덧없이 빠져나갔구나!
봄꽃을 닮은 젊은이들은 자기가 젊고 예쁘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아마 모를 것이다.
나도 젊은 날에는 몰랐다. 그걸 안다면 젊음이 아니지.
자신이 예쁘고 빛났었다는 것을 알 때쯤 이미 젊음은 떠나고 곁에 없다.
서두르면 탈이 나고, 마음 급해도 몸이 못 따라가니 시간이 두세 배 정도는 더 걸리더라는 얘기다.
돈에 대한 생각도 비슷했다. 넉넉하든지 부족하든지, 죽을 때 갖고 갈 수 없다는 사실은 분명하지 않던가.
흔히들 말하길, 제 꿈을 접고 참고 희생하면서 아이를 낳고 길러봐야 어른이 된다는데…… 우리는 성큼 어른이 되지 못한 채 비교적 자기 안의 목소리를 많이 내놓고 살아간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오랫동안 알고 지냈지만 바다 위 반짝이는 윤슬같이 가벼운 대화로 깔깔거릴 수 있는 친구가 있고, 알고 지낸 시간은 짧아도 마음속 깊은 얘기를 거리낌 없이 나눌 수 있는 친구도 있다.
모두 나를 양희은답게 만들어주는 소중한 사람들. 더 챙기고 아껴주며 살 작정이다.
나는 또 질문했다. 방송을 그만두고 노년의 긴 세월 동안 무얼 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전유성 선배는 대뜸 그냥 살란다.
"여행 다녀. 신이 인간을 하찮게 비웃는 빌미가 바로 사람의 계획이라잖아. 계획 세우지 말고 그냥 살아."
선배 덕분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나보다 몇 걸음 앞서가는 선배가 계시다는 게 참으로 고맙다
느리게 살기를 시도하지 않아도 저절로 느려졌다.
빠른 리듬을 몸과 마음이 따라잡을 수가 없다.
빈둥거리듯 지내면 바쁠 때와는 다른 그림들이 보인다. 다시는 쫓기듯 바쁘게 살고 싶지 않다.
그런데 이걸 알게 될 때면, 이미 바쁠 일이 없게 된다는 사실에 허허로운 웃음을 짓게 된다.
세상일에 요령이나 지혜가 쌓이고, 하는 일이 무언지를 ‘쬐꼼’ 알 만한 때, 이미 일은 나를 떠난다. 내가 밀려난다. 그게 요즘 순리다.
노래가 무언지 ‘쬐꼼’ 알 만한데 더 이상 노래할 기회가 많지 않다.
그러니 할 만할 때 제대로 하려면 건강해야겠지. 즐겁게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건강하게 나이 들어가기, 이것이 꿈이다.
엄마가 편찮으시면서 비로소 주변에 엄마 없는 이들의 허전함과 서러움을 심각하게 생각할 수 있었다.
어느 날 후배가 우리 집에 놀러와서 내가 "엄마, 엄마" 부르는 소리를 듣더니, 엄마 없는 자기로서는 ‘엄마’ 소리가 서글프다고 했다.
그 말을 머리로만 들었지 가슴으로 듣지는 않았다.
후배의 서러움에 공감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심정을 알 것도 같다.
엄마가 떠나시면 어쩌나 마음 졸이다가, 옆에 계셔서 안심하는, 그러면서도 마음과 달리 틱틱 쏘아대는 나는 영락없는 당신의 큰딸이다
얘, 그럼 내가 하루 종일 멍하니 있어야 되겠니?"
옆에서 자분자분 얘기 걸어주고 말대꾸해주는 말동무가 있는 게 나이 들면 제일 중요하고 소통 가능한 사람이 한 사람만 있어도 산단다.
그런데 엄마는 자식들이 허구한 날 바쁘고 저녁에야 들어오니 종일 무엇을 하고 계셨을까. 하루하루가 적막했겠다.
엄마의 치매가 시작된 것은 무릎이 아프면서부터다.
포크아트를 위한 아크릴 물감이나 퀼트를 위한 조각천을 구하려고 남대문, 동대문 시장을 자주 다녔던 엄마는 무릎이 아프면서부터 잘 못 다니게 됐다.
그래서 종일 TV를 본다. 그렇게 혼자 있는 시간이 많으면서 노인성 우울이 치매로 진행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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