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가 컵을 정리하고 있다’는 현상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 행동이 망막(눈)에는 비치지만, 뇌가 자신과 연관된 행동으로 파악하지 못한다.
길모퉁이 카페에 앉아 오가는 자동차를 멍하니 바라보는 것과 같다.
‘상황’을 보면서 ‘선배의 행동’을 파악하지 못한다.
그래서 선배의 행동을 보면서도 학습할 수 없다.
바로 ‘공감장애’라고 부르는 뇌의 문제 중 하나다
단순하게 ‘눈치가 없다’ ‘쓸모없다’ ‘머리가 나쁘다’고 단정 지으면, 상사와 부하의 관계는 평행선을 달릴 뿐이다.
당연한 일인데 "왜 하지 않느냐?"고 나무라면 "아무도 저에게 하라고 말하지 않았는데요?"라는 대답만 돌아올 뿐이다.
주위 사람의 행동을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본인 입장에서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인 셈이다.
본인 입장에서는 일할 마음이 있으니까 회사에 나온 거지, 왜 이런 바보 같은 질문을 들어야 하는지 의미를 알 수 없어, 잠자코 있을 수밖에.
게다가 공감장애라면 고개를 끄덕이는 행동도 할 수 없기 때문에, "내 말듣고 있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말을 안 듣고 있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런 질문 또한 뭐라 대답하면 좋을지 모른다. 서로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
공감장애는 인지하는 상황의 수가 압도적으로 적어서 ‘내가 모르는 게 있다’ ‘할 수 없는 게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그렇기 때문에 못하면서도 어쩐 일인지 자신감은 충만하고 ‘세상 별것 없다’며 얕본다.
또는 ‘세상이 지긋지긋하다’며 삐딱하게 바라본다.
이러한 공감장애를 가진 사람을 팀원으로 두는 것만큼 신경 쓰이는 일은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본인이 인지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전념을 다해 매진한다.
뇌가 선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많지 않은 만큼 헤매는 경우가 적고 다른 속내가 없다.
‘명랑한 성격의 공감장애를 가진 사람’은 주위 분위기에 휩쓸려 일일이 끌려 다니지 않으므로 평상심을 잃지 않고 소소한 일에 신경 쓰지 않는다.
VIP에 둘러싸여도 당당하게 제 몫을 하고, 미리 약속하지 않고 찾아가는 영업 행위로 문전박대를 당해도 주눅 들지 않는다.
‘어떻게 하지’ 생각하기보다 ‘어떻게든 되겠지’ 생각하는 편이 압도적으로 많다. 분위기 메이커로는 최적이다.
‘하나를 듣고 열을 알아차리기’를 바라지만 않는다면 나쁘지 않은 직원이다.
이들은 ‘본인이 인지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는 의외로 기지(機智)를 발휘한다
상사로서 공감장애를 가진 부하직원을 잘 이끄는 첫 번째 요령은 ‘암묵적으로 당연하다고 여기는 일’을 하지 못한다고 해서 게으르거나 오만하다고 단정 짓지 않는 것이다.
화내지 말고 전략을 세워줘야 한다. 또한 ‘해야 할 일’의 범위를 좁히고 ‘이것저것’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아야 한다.
(공감장애를 지녔다 해도) 공감장애를 이해할 수 있는 상사 휘하에서 재능 있고 늠름한 구성원으로 활약할 수 있다.
한편 공감장애를 이해하지 못하는 상사 휘하에서는 가치가 없는 사람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당신의 팀원은 괜찮은가. 당신 자신은 괜찮은가.
어휘 수가 많은 뇌는 어떤 생각을 해내는 힘이 풍부하지만, 사고에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어휘가 심플한 뇌는 판단이 빠르고 무리를 짓는 데 능숙하다
공감장애를 가진 사람은 악의 없이 옆에 있는 사람을 짜증나게 만들고, 힘 빠지게 만들고, 자발성을 떨어뜨린다.
‘눈치가 없다’ ‘배려가 없다’ ‘무신경하다’ ‘시큰둥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편 본인은 주위에서 인정해주지 않아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한다고 느낀다.
성향이 나쁘거나 머리가 나쁜 게 아니라, 뇌가 인식하는 기능 일부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자각한다면 보완할 수 있다
공감장애. 지금껏 아무도 지적하지 않았던 뇌의 상태.
‘형식’을 인지하지 못했던 내가 대화에 형식(대화법)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대학 때였다
오사카 여자들의 소통 매너는 칭찬을 받으면 신바람이난다는 데 있다. 심술궂은 말을 듣고도 "뭐야, 그게" 하고 재치 있게 끝맺는다.
교토 친구는 진심으로 남자친구 차로 태워줄 생각은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해주고 싶다는 마음을 전하고, 전해들은 상대는 마음만 받는 것이 교토의 소통매너다
흔히 말하는 ‘교토 부부즈케’(ぶぶつけ)이다.
교토 사람이 ‘부부즈케’(오차즈케お茶漬け, 녹차 우린 물에 밥을 말아먹는 일본음식 _옮긴이 주)라도 먹고 가라는 권유를 받아 승낙한다 해도 실제로는 아무것도 대접받지 못한다.
이런 표현은 립서비스이기 때문에 응해서는 안 된다. 처음부터 ‘슬슬 돌아가길 바란다’고 신호를 주는 표현이란다.
교토 사람의 ‘부부즈케라도’라는 표현을 말뿐이라고 평가하는 경향도 있지만, 실제로 교토 사람과 지내다 보니 이런 평가는 억울한 면이 있다.
진짜 모습은 조금 다르다. ‘가능하다면 그렇게 해주고 싶다’는 마음, 이것은 진심이다.
‘남자친구의 차로 데려다주겠다’고 권했던 그녀도 ‘차를 태워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마음만 받아줘’라는 생각으로 틀에 박힌 말을 건넨 것이다.
교토 사람은 결코 냉정하지 않다. 그 친구도 매우 다정한 사람이었다.
태어나 자란 고장에서 그대로 어른이 되었더라면 분명 내 고향 이외의 지역에서는 ‘눈치 없는 사람’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대단하다는 칭찬을 받아도 별거 아니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상대방에게 불만을 이야기할 때도 "조금 비켜주겠니? 나란히 걸어가면 아무래도 불편하잖아"라는 식으로 시원시원한 화법을 구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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