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이라는 말을 좋아하므로 늘 주의를 기울이려 한다. 굉장히 엄격한 말이라 타인에게 함부로 들이밀면 안 된다.

몸의 일부를 잘라낼 만큼 열심히 했느냐고 타인에게 묻는 일은 끔찍하다. 시인이 말하려는 바도 우리 각자 스스로를 돌아보자는 것이지 타인에게 그 잣대를 들이대자는 건 아니다.

최선이라는 잣대를 엄격히 들이대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에게 국한된 일이어야 한다.

말은 마음으로 향하는 길이지만 일직선이 아니고 꽤 복잡한 미로다.

듣는 사람이 잘 알아들어야 하는 게 아니고, 말하는 사람이 잘 알아듣게 말해야 하는 거야’라고 말하고 싶었다.

상대가 자신의 의도를 단박에 이해하길 바라기보다 자신이 상대가 이해할 수 있도록 맞춰가는 태도가 좋다고 생각한다.

무례할 정도로 내 얘기를 귀담아듣지 않는 경우가 아니라면, 가급적 상대의 눈높이에 맞게 더 상세히 전달하려 애써야 한다고,

지안이가 맡지 않은 일에 미안해할 필요는 없다고 말해준다. 혹시나 지안이가 너무 많은 일을 자기 책임으로 느끼고 있는 건 아닌지, 그래서 미안하다는 말을 너무 많이 하는 건 아닌지 약간은 걱정이 된다.

어른들이라고 해서 미안하다 말해야 할 때를 잘 알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 사과에 인색하고, 사과는커녕 타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사람들이 세상엔 너무나 많다.

누군가 자신의 잘못을 알아챌까 봐 날이 서 있는 사람들, 내 잘못을 사과라는 결론으로 연결하는 데 익숙하지 않은 어른들.

그런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때로 그런 사람들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입장에서 지안이의 "미안해"는 자주 나를 일깨운다. 어쩌면 지안이의 말이 아니라 어른들의 말이 바뀌어야 하는 건 아닐까.

갈 곳 잃은 그 책들이 지금은 어디에 있을까.

지원자는 넘치지만 채용은 늘 어려웠다. 앞서와 비슷한 패턴이 수없이 반복되었던 것이다.

정규직은커녕 고작 몇 개월 근무할 뿐이고, 경력으로 제시하기도 힘든 일자리를 제공하면서 ‘약속에 대한 책임감’을 들먹일 수 있는 것일까.

이 경우에 ‘약속에 대한 책임감’은 ‘자기 자신에 대한 책임감’과 꼭 겹치지는 않을 것 같다.

다가온 자리는 환영하되, 조건이 더 나은 자리를 항상 찾고, 자리를 옮길 때는 망설이지 않는 것이 오히려 자신을 위한 책임 있는 행동이 아닐까.

물론 하루 만에 일을 못 하겠다는 문자를 받고 나면, 상대가 전화도 받지 않으면, 마음에선 불이 난다. 하지만 그런 입장이 있을 수 있다는 것, 갑자기 그만두며 매번 무거운 마음으로 사과하다 보면 편의적으로 ‘무례’를 택할 수 있다는 것도 일견 이해가 된다.

사람들은 때로 삶이 놓인 환경에 따라 어떤 태도를 잃어버리게 되기도 하니까. 나는 사람보다는 세상 탓을 하고 싶다.

약속에 대한 책임과 자신에 대한 책임이 엇갈리는 세상은 슬프다. "죄송합니다"라는 문자를 보낸 이들에게 차마 "죄송하지 않으셔도 됩니다"라는 문자를 보내지 못한 내 빈곤한 마음도 슬프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칭찬받을 만하고, 책의 영향력은 자주 상찬되지만, 때로 책의 역할은 딱 여기까지다.

책이 삶으로 이어지기까지는 꽤 높은 문턱을 넘어야 한다. 마지막 장을 넘기는 순간 우리는 삶으로 돌아오고, 책은 거기서 끝난다.

세상은 책 바깥에 있다. 아름다운 책을 판다고 내가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훌륭한 책을 읽는다고 삶이 훌륭한 것은 아니다

할머니가 김밥을 싸주실 때 "시금치는 빼주세요" 하고 말하지 못하고 시금치가 잔뜩 들어간 김밥을 꾸역꾸역 먹었던 어린 시절의 내 마음을 생각해본다

괜찮아 보이는 순간조차도 괜찮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잊지 않아야지 생각한다

사람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의 삶을 상상해보곤 하지만, 네 살은 다른 사람의 네 살을 보면서 자신의 네 살을 상상해야 하는 나이다. 네 살은 아이를 키우기 전 내가 상상했던 것만큼 어린 나이가 아니다.

사실 이런 일에 ‘부모로서’라는 말을 붙이는 건 민망한 일이다. 공기는 남녀노소가 호흡하는 것이니 아이만 보호 대상인 것도 아니고, 부모가 아니더라도 행동에 나서야 할 문제다.

‘부모로서’라는 말은 ‘아이의 미래’라는 명분을 들이밀어야, 비로소 굼뜨게 움직이는 나를 드러내는 것이라 부끄럽다.

좋은 부모가 된다는 것은 아이를 위해 부모가 얼마나 많은 것을 해줄 수 있는지 여부로 판가름할 수 없다

제 아무리 돈이 많아도 맑은 하늘을 살 수는 없다. 우리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것들을 가족 안에서 다 얻을 순 없다.

가족 바깥의 많은 사람들과 협력함으로써 많은 일을 이룰 수 있다는, 내 삶의 질을 높이는 일은 대개 우리 모두의 삶의 질을 높이는 과정에서 달성할 수 있다는, 그 사실을 체득케 하는 부모가 좋은 부모 아닐까.

가족의 구성원임을 감각할 뿐 아니라 사회의 구성원임을 자각하도록 도울 수 있어야 한다. 부모의 시야는 아이나 내 가족에게만 고정되어서는 안 되는 것 같다.

사람은 모두 거인의 어깨를 딛고 서 있다지만, 아내와 나는 어머님과 아버님의 허리를 딛고 서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 부부가 누리는 삶의 균형은 부모님의 헌신에 빚지고 있다.

원칙을 세우고 일관성 있게 실천하려 한다. 내가 매일 책을 읽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서점원으로서 최대한 폭넓게 책을 검토할 수 있어야 한다’라는 원칙을 세우고, 매일 반복되는 출퇴근 시간을 독서 시간으로 할당했다.

일관되게 실천하는 시간이 쌓일 때 원칙은 자연스레 나라는 사람의 일부로 뿌리내린다.

타인이 나를 바라볼 때도 ‘적어도 책을 열심히 살펴보려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해야 서로 신뢰를 형성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늘 잠이 모자라서 머리가 멍했다. 책을 읽을 수는 있었으나 활자가 나를 그저 통과할 뿐인 느낌이 들었다. 생각을 진지하게 이어가기엔 기력이 딸렸다

납득은 안 되고, 욕구는 사라지지 않으니 아이의 훈육은 설득과 이해로만 가능할 수가 없다.

엄마 아빠의 부드럽던 태도가 사라지고 엄격한 분위기가 형성되면, 그 공기의 무거움이 훈육이라는 행위를 마저 채운다. 그렇다고 아이가 곧장 수긍하는 것은 아니다. 이 분위기가 두렵고 슬퍼서, 아이는 발버둥을 친다.

관계가 괜찮으면 다 괜찮다. 육아는 긴 과정이니까, 혹 잘못된 길로 들어갔더라도 관계만 괜찮다면 우리는 손잡고 빠져나와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런 믿음으로 오늘의 불안을 일단 넘어간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통해 유명해진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고 나면 보이나니, 그때에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는 말처럼, 그 지역에 대해 알고 가면 여행에서 볼 수 있는 게 더 많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통해 유명해진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고 나면 보이나니, 그때에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는 말처럼, 그 지역에 대해 알고 가면 여행에서 볼 수 있는 게 더 많다고 믿기 때문이다.

아무리 책을 읽고 왔어도 책을 볼 때보다는 눈앞에 시선을 두게 되었다. 그 여행을 통해 나는 확실한 생각을 갖게 되었다.

내게 여행은 언제나 두 번이라고. 책으로 한 번, 몸으로 한 번. 책을 읽은 여행과 읽지 않은 여행은 눈에 들어오는 것이 다르다.

아이가 어떤 행동을 하든 용인해야 한다는 게 아니라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행동을 근거로 사전에 입장 자체를 차단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 정도 이해를 구하는 것도 힘든 일일까.

사람을 알아보는 일에는 시간이 필요하지만, 판단은 내려야 했고 시간이 필요하다 해서 면접을 수십 번 볼 수는 없는 노릇이라, 나름 최선을 다해 생각을 정리했다. 하지만 충분히 시간을 들이지 못하고 누군가를 평가하는 일은 늘 찜찜한 기분을 남긴다.

사람뿐만이 아니라 책을 판단하는 일도 그렇다. 서점에서 일하다 보니 "꼭 도서MD가 되고 싶습니다", "저는 정말 책을 좋아합니다"라는 말을 면접 자리에서 많이 듣는다.

책에 애정을 지닌 사람을 만나는 일은 언제나 반갑다. 하지만 이들이 서점에 입사해 해야 할 중요한 일은 책을 선별하는 일이다. 몇몇 책을 따뜻한 손길로 어루만지고 각별하게 소개할 수는 있겠지만, 몇 배나 더 많은 책들을 흘려보내야 한다.

몇몇 책은 판매가 시작되기 전부터 충분한 재고를 갖춰두지만 어떤 책들은 보유하지 않기도 한다. 서점은 책에 고르게 애정을 쏟지 않는다.

아쉬운 점은 이런 판단이 너무 촉박하게 이뤄진다는 것이다. 책을 선별하는 일이 결코 피할 수 없고, 그래서 중요한 일이라면, 그만큼 심도 있게 검토하고 싶다. 내가 왜 이 책을 골랐고 저 책을 고르지 않았는지 명확한 근거를 갖고 싶다. 책을 읽고 검토할 시간은 턱없이 부족하다. 아니 부족하다기보다 없다는 게 맞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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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일이 누군가의 독서를 확장시키고, 더 나아가 그 사람의 삶이 보다 두터워지는 데 기여하기를 희망한다.

램비에이스는 서점에 오자마자 책 이야기를 하고 싶어 안달이었다. "그게 말이야, 처음엔 그다지 마음에 안 들었는데, 점점 좋아지더라니까, 와."

(2017, 루페)— 개브리얼 제빈, 《섬에 있는 서점》

나를 매혹하는 것이 나의 일이 될 때, 일은 삶의 각별한 일부가 된다

모니터가 아마 거울이었다면 분명 내 눈이 반짝이는 걸 발견했을 것이다. 사람은 즐거우면 우선 눈빛이 달라진다. 일과 삶이 하나가 되는 순간이다.

"열정적으로 일하고 싶다"

"간 적 없고, 앞으로도 가지 않을 오십 개의 섬들"에 대한 책이 실용적인 ‘필요’에 의해 탄생했을 리는 없다. 이런 이야기는 세상의 요청 없이 오로지 한 사람의 마음에서 태어난다.

애정의 크기가 마음의 용량을 차고 넘쳐서 밖으로 꺼낼 수밖에 없을 때 책의 형태로 세상에 나온다.

글을 쓰고 지도를 그리는 내내 작가의 얼굴은 상기되었을 것만 같다. 나도 내가 좋아하는 일, 내가 공을 들이고 싶은 일을 상기된 얼굴로 하고 싶다.

나는 눈앞에 펼쳐진 조각난 풍경보다 지하철에서 읽는 책 속의 풍경이 더 만족스럽다

서울 사람들은 어디서나 자기만의 시간과 공간을 점유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 모습이 매정해 보이기보다 근사해 보였다. 그리고 나는 빠르게 동화되었다

서연(書緣, 책의 인연)

지하철은 땅 아래(sub) 있어서 subway지만, 내겐 일과 육아 외에도 필요한 시간을 대체(sub)해줘서 sub-way다.

아이가 아프니 일상은 비상이 되었다. 큰 병에 걸린 것도 아니니 호들갑을 떠는 것이긴 한데, 그 호들갑스런 상태가 내 마음의 정확한 상태였다

경험은 익숙함과 능숙함을 선사했지만 평정은 가져다주지 못했다.

아이는 앞으로도 몇 번이고 아플 테지만, 나는 더 능숙해지겠지만, 그렇다고 내 마음이 편안하지는 못할 것 같다. 경험이 더 쌓이면 다를까. 글쎄, 부모란 결코 그런 경지에 다다를 수 없는 사람을 일컫는 말 같다고, 지금은 느끼고 있다

이런 생각도 자주 든다. ‘부모’라는 이름과 ‘나’라는 이름을 나란히 놓고, 아무리 둘의 균형을 잘 유지하려 해도, 결국엔 ‘부모’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을 것 같다는 생각. 어쩌면 이 둘의 균형점이란 한쪽으로 조금 기울어진 상태를 일컫는 것 같다는 생각. 앞으로의 내 삶은 아이를 향해 기울어진 상태를 받아들이는 일로부터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일상의 중압감에 눌려서 삶의 근본적인 문제에 관한 대화를 회피할 때가 많다. 가장 중요한 문제를 가장 적게 논의한다.

(2016, 어크로스— 시어도어 젤딘, 《인생의 발견》

평소에 늘 너에게 마음을 쏟겠다고. 해야 할 일을 모두 끝낸 후에야 네 차례가 오게 하지 않겠다고. 네가 잠든 후에도 너의 마음을 생각하겠다고.

이런 책들을 연이어 읽다 보면 낮이 밤이 되고 새벽이 되었다. 시간을 잘게 토막 내지 않고 길게길게 흘러가도록 내버려두었다. 책을 덮을 즈음엔 어느덧 다시 시동을 걸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모니터를 보며 밥 먹고 잠들고 누웠다 앉았다 다시 눕길 한참 반복했다.

생활 리듬이 뒤바뀌어 피곤할 것만 같은 그런 하루를 보내고 나면 나는 오히려 회복되었음을 느꼈다. 현실의 시간 감각에서 나를 잠시 놓아주는 일이 나를 정화시키는 것 같았다.

운전이 미숙한 시간을 통과하자 오히려 운전은 ‘작은 숨구멍’을 만들어주었다. 두려웠던 공간에서 포근함을 느끼고 있다

‘부모의 삶’과 구분되는 ‘개인의 삶’도 분명 필요하다. 내게(그리고 누구에게나) ‘라이프’는 하나가 아니다.

인생을 구성하는 각각의 삶에 어느 정도는 균형 있게 시간을 보장해주어야 한다. 이게 바로 ‘라라밸’이다.

해야만 할 일을 잊고 다른 무언가에 오롯하게 몰입하는 시간. 그것만으로도 그날은 충분히 만족스럽다.

우선순위에 놓인 것이 누군가에게는 운동일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여행일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친구와의 만남일 수 있다. 내겐 책 읽기가 일순위다.

책에서 얻는 작은 만족감을 일상에서 작지만 꾸준하게 쌓길 원한다.

어느 하나에 집중해서 대단히 잘할 때보다, 어느 하나에도 소홀하지 않을 때 나는 행복하다. 일에, 가족에게, 나 자신에게 시간을 고루 들이고 싶다

아내의 진통을 옆에서 꼬박 지켜본 남편이라면 모두 동의할 것이다. 세상에 순산은 없다

아이가 첫 돌을 맞았을 때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린 장면은 아이를 처음 안았던 순간이 아니라, 아내가 덜덜 떨던 모습이었다. 텅 비어가던 눈동자였다. 먹이지 못한 순댓국이었다. 돌잔치 날 아이를 안고 부모의 소감을 말하면서, 나는 가족과 친지들 앞에서 처음으로 울음을 쏟아냈다.

목표는 내 것이지만 목표를 달성할 수단은 내 손에 쥐여져 있지 않다.

모든 부모는 아이를 잘 키워야 한다는 목표와 책임을 부여 받지만, 실제로 아이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는 부모가 온전히 좌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결국 아이도 아주 가까운 ‘타인’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타인을 이해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거기에 가 닿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해하려고, 가 닿으려고 노력할 때, 그때 우리의 노력은 우리의 영혼에 새로운 문장을 쓰기 시작할 것이다. 우리는 타인을 이해할 수도 있고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건 우리의 노력과는 무관한 일이다. 하지만 이해하느냐 못하느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우리의 영혼에 어떤 문장이 쓰여지느냐는 것이다.

(2014, 문학동네)— 김연수, 《소설가의 일》

거절하는 일도 고역이다. 부탁하는 입장에 비할 바는 아니겠으나 매번 거절해야 하는 사람에게도 나름의 고충은 있다.

온라인 서점 MD에게 필요한 자질 중 하나가 ‘거절의 고충’을 견디는 힘이다. 책의 가치와 입지를 이해하는 일, 시장의 흐름을 읽는 일, 적절하게 판매 계획을 수립하고 재고를 관리하는 일보다 중요하지는 않다. 그래도 잘 거절하는 것은 MD에게 빼놓을 수 없는 자질이다.

다른 능력들이 ‘책’이나 ‘출판사’ 또는 ‘서점’을 위한 것이라면, 거절의 힘겨움을 견디는 능력은 ‘나’를 위한 것이다. 타인의 부탁을 거절하는 일이 자꾸 쌓이면 자신의 마음이 허물어지기 때문이다.

초도 수량과 메인 노출에 대한 부탁은 끝없이 밀려온다. 한 권의 책이 출간되면 그만큼의 부탁이 함께 태어난다. 부탁은 대부분 노골적이지 않고 은근하다.

수많은 책 중 몇 권의 책을 골라내야 하는 입장에서 나는 늘 정당한 기대와 책임감을 배반하는 느낌이 든다. 누군가의 기대에 화답하지 못하는 일이 쌓이면 스스로 당당하기 힘들다.

출판사는 ‘그 책’을 팔아야 하지만 서점은 ‘다른 책’을 팔아도 된다

상대에게 냉랭을 넘어 무례했던 날엔 스스로에게 실망했다.

내가 놓인 상황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을 뿐 자책할 필요는 없다고 자주 다독였다. 내 잘못이 아니라고. MD가 처한 상황이 ‘거절’과 ‘딱딱함’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나는 참 인격이 얄팍한 인간이구나,
인정하니 비로소 마음속 찜찜함이 사라졌다

‘배달받는 마음’은 익히 알지만 ‘배달하는 마음’은 헤아려본 적 없는 ‘무지’가 어쩌면 이 사태의 본질은 아닐까

누군가의 ‘일하는 마음’을 읽으며 계속 곱씹어보려 한다. 가급적 폐는 끼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우리는 대개 누군가와 얽혀 일하는 인생이니까.

나는 내 취향을 닮은 한편 나의 부족한 면은 극복한 존재로 아이의 미래를 그리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내 삶은 나의 몫이고 아이 삶은 아이 몫이다.

부모는 가능한 만큼 넓은 여백을 주고, 아이는 자기 마음에서 피어 오른 것들로 인생을 채워가야 한다. 스스로 겪고 느낀 것만이, 결정적으로 삶에 깊이 뿌리내리므로.

인간은 무엇에서건 배운다. 그러니 문학을 통해서도 배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게서 가장 결정적으로 배우고, 자신의 실패와 오류와 과오로부터 가장 처절하게 배운다. 그때 우리는 겨우 변한다. 인간은 직접 체험을 통해서만 가까스로 바뀌는 존재이므로 나를 진정으로 바꾸는 것은 내가 이미 행한 시행착오들뿐이다.

(2018, 한겨레출판—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최선이라는 말은 엄격하다. 나름 열심히 노력했다 해도 내가 최선을 다했는지는 자신하기 어렵다. 돌아보면 늘 조금은 더 열심을 쏟을 여지가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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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충실하게 자신을 위해 헌신했지만 자신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무려 12년이었다.

하지만 바마티는 불평하지 않았다. 눈물이 그의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는 말했다. 당신을 남편으로 둔 것이 자랑스러우며, 당신이 위대한 작업을 완성할 수 있도록 도운 것 자체가 축복이었다고.

"바로 이 손이 날마다 해가 지면 등잔을 내 옆에 가져다 놓았고, 내가 먹을 음식을 가져다주었소. 이 손을 나는 알고 있소."

"아침마다 내 발밑에 신선한 꽃을 가져다 놓은 것이 당신이었소? 매 끼니마다 내 앞에 음식 접시를 가져다주고, 매일 저녁 등잔에 불을 켜 준 것이 당신이었소? 그런데 어떻게 내가 당신을 보지 못할 수가 있었소? 하지만 이미 늦었소. 주석서를 끝내는 날 집을 떠나 구도자의 길을 걷기로 나는 이미 서약했소. 왜 더 일찍 당신의 존재를 일깨워 주지 않았소? 날이 새면 나는 떠나야만 하오."

이토록 무조건적인 사랑과 인내와 위대한 가슴을 지닌 당신 같은 아내를 가진 주석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오. 나는 이 주석서의 제목을 ‘바마티’로 하겠소. 앞으로 누구든 이 책을 읽는 사람은 당신을 기억할 것이오!"

"당신이 없었다면, 당신의 사랑과 인내심이 없었다면, 그리고 당신의 말 없는 기다림이 아니었다면 나는 이 주석서를 완성하지 못했을 것이오. 내가 당신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소. 하지만 세상이 나에 대해서는 잊어도 당신만은 기억하게 할 것이오. 내가 가진 모든 것, 내 삶의 목표와 평생의 작업 모두를 당신의 발 아래 바치겠소. 당신의 사랑에 필적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소."

"나를 당신에게로 이끌고 당신을 보살필 기회를 준 운명의 힘이 나를 보살펴 주겠지요. 당신의 진실하고 헌신적인 추구가 나에게도 영감을 주겠지요."

기우사는 그곳에 비가 오게 하기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 마을에 와서 머물기만 할 뿐이었다.

그런데도 얼마 후에 비가 내렸다. 그는 비가 오게 강요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자연과 하나된 마음으로 자신의 내면에서 비가 내리는 기후를 창조해 냈다. 따라서 그가 그곳에 있음으로써 자연이 그의 마음에 반응한 것이다.

처음 그 정원으로 들어갔을 때 왕의 생각은 순수하고 다정했었다. 인간 본연의 마음 그대로였다. 그러나 농부가 그토록 짧은 시간에 석류 주스가 가득 든 컵을 가져오자 왕이 마음이 변했고 의도가 개입했다.

왕의 마음이 순수함을 잃자 그것은 정원의 석류나무들에도 영향을 미쳐 석류들의 웃음이 사라졌다. 왕이 순수한 사랑의 법칙을 훼손한 순간, 석류나무들은 그에게 자신을 내어주기를 주저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은 보이지 않는 내 의식이 만들어 낸 결과이다.

우리의 삶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우리의 마음이 우주의 리듬과 일치할 때, 모든 환경과 상황이, 심지어 바람과 파도까지도 우리에게 유리하게 전개된다

반면에 우리가 그 모든 것들과 불화를 겪는 순간, 동물과 식물도 우리에게서 등을 돌릴 것이고, 그 순간 온 세상이 우리와 맞서게 된다

"왕위를 물려주는 것 같은 중요한 일에는 길일이 따로 없습니다. 바로 오늘 왕위를 물려주십시오. 라마 왕자가 왕관을 쓰는 그 순간이 가장 좋은 시간이고, 그날이 바로 길일입니다."

"길일이란 다른 개념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을 뒤로 미루지 않도록 ‘오늘이 바로 그 일을 하기에 길일’이라고 말해 온 것입니다. 오늘 하지 않으면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지금 곧 라마 왕자의 즉위식을 거행하십시오."

단 하루를 미룸으로써 일어난 그 ‘파란만장한 사건들’이 대서사시 『라마야나』의 내용이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날은 다름 아닌 ‘바로 오늘’이라는 것을 『라마야나』의 저자는 말하고 있다.

하루를 미룸으로써 끝내 하지 못한 일들이 우리의 삶에 얼마나 많은가.

"다음 순간이란 없습니다. 어떤 위험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고, 저를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됩니다. 지금 진리를 가르쳐 주십시오."

어떤 것을 들을 때는 다만 들으라. 어떤 것을 감각할 때는 다만 감각하고, 인식할 때는 다만 인식하라. 그것들에 나의 마음을 개입시키지 않으면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나의 마음을 개입시키지 않는 것이 바로 괴로움의 끝이고, 자유의 시작이다.

그러므로 볼 때는 오직 바라봄만이 있어야 한다. 들을 때는 오직 들음만이 있어야 한다. 감각할 때는 오직 감각만이 있어야 하고, 인식할 때는 오직 인식함만이 있어야 한다."

‘나’의 해석과 판단을 개입시키지 말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투명하게 바라보고 듣고 감각하고 인식하라는 것이었다.

보는 나는 사라지고 단지 바라봄만이 있을 때 외부의 어떤 일에도 동요하지 않는 마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변화는 백 번 각오하고 다짐하는 것보다 한 번 제대로 깨달을 때 찾아온다

부족 남자는 백단향 나무의 특성이나 중요성, 가치를 전혀 알지 못했다. 그의 눈에는 그냥 평범한 나무일 뿐이었다. 그는 백단향 나무를 베어 불에 태워서 숯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숯을 시장에 내다 팔아 먹고살았다.

지금까지 값비싼 백단향을 숯으로 만들어 싼 가격에 판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았지만 이미 너무 늦은 뒤였다.

자신의 무지로 인한 행동을 후회하고 자신을 비난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원산지가 인도인 백단향 나무는 고대로부터 동서양의 신성한 의식에 사용될 만큼 깊고 은은한 향을 가진, 신들이 가장 사랑한다고 알려진 매우 귀한 향나무이다. 그래서 인도인들은 천상계에서는 백단향의 향이 난다고 믿는다.

자신을 팔아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도 혹시 백단향 나무인 것은 아닐까?

"너는 이 거울을 가져가서 다른 사람들을 전부 비춰 보았다. 하지만 사실 이 거울은 너 자신을 비춰 보는 데 사용했어야 했다.

겉모습에 가려진 너의 내면, 너의 감정과 생각들을. 그리고 내가 말했듯이 이 거울은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고 판단할 때의 너의 내면도 비춰 준다.

네가 거울 속에서 본 다른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은 사실은 너의 마음과 생각이 반영된 것이다.

이 세상에서 네가 보는 모든 것은 너의 생각이 반영된 것이다. 이 거울이 특별한 선물인 이유가 그것이다."

어떤 문제를 이성적으로 해석해 원인을 발견할 것인가, 아니면 두려움과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더 큰 이유를 끌어들일 것인가는 우리 자신에게 달린 일이다

"조금 전 당신은 당신을 만나러 온 어떤 억울한 사람들에게 내일 오라고 하면서 그때 그들이 원하는 것을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 말은 당신이 내일까지는 절대로 죽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실제로는 누구도 내일 일을 예측할 수 없습니다. 무슨 근거로 당신은 내일 일에 대해 그토록 확신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당신이 야마라자보다 더 힘센 존재여서 그의 계획을 물리칠 수 있다는 뜻 아닌가요?"

"내가 무엇을 준다 해도 그는 받아들이지 않을 거요. 그러니 아무 소용이 없소. 그는 아직 신의 선물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소."

"우리 신들은 인간들이 걷는 길 앞에 자주 황금 자루를 떨어뜨려 주고 있소.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단지 장애물이나 시련으로 여기고 안을 열어 보려고도 하지 않소. 그것이 황금인 것을 알면 삶이 달라질 텐데 말이오."

삶에서 우리는 때로 시타 역을, 때로 락슈만 역을 맡는다. 어떤 때는 화살을 쏘는 사람이고, 또 어떤 때는 화살을 가슴에 맞는 사람이다.

우리 역시 감정 때문에 이성이 흐려지는 상황에 처하면 무슨 말이든 내뱉는다.

화가 날 때 한순간의 인내심이 이후 천 번의 후회를 구할 수 있음을 알지만,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을 때 우리의 마음은 미친 듯이 날뛰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누군가가 우리에게 상처를 줄 때, 그 상황 너머를 보며 이렇게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고 고팔 다스는 권한다.

"얼마나 고통이 심하면 그렇게 말할까? 삶에서 얼마나 혼란을 겪었으면 나에게 그런 말을 할까?"

다른 사람들이 상처 주는 말들을 할 때, 그들로 하여금 그 말을 하게 만든, 그들이 겪고 있는 상황이 무엇인지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때 분노에서 자비로 옮겨 가게 된다. 이것이 용서의 필수적인 요소인 공감이다

좋아하며 생각했든 미워하며 생각했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관심을 쏟을수록 마음은 그 대상을 자신에게 끌어당기며 그리하여 마침내는 그 대상과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제가 아는 유일한 주문은 당신이 가르쳐 준 비밀 만트라뿐입니다."

"무슨 만트라?"

코추라만이 스승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빗디 쿠쉬만담(멍청아, 호박이야)."

만트라는 신비한 힘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음절이나 단어를 반복해서 암송함으로써 명상 수행시 마음의 집중력을 얻는 수련 도구이다.

수행뿐 아니라 삶에서도 우직하고 순수한 믿음이 때로는 다른 무엇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한다. 비록 그것이 ‘빗디 쿠쉬만담’일지라도.

털에 염색한 물감이 자칼의 진정한 색깔을 감출 수 없듯이,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못하고 가짜 모습을 추구하는 것은 결국 더 불행해지는 일이다. 본성은 오래 숨길 수 없다.

그들은 싸울 때는 완전히 몰입해 싸움 그 자체가 되었다. ‘나’가 싸우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전적으로 행동 그 자체가 되었다.

싸우는 사람은 사라지고 싸움만이 남아 상대방과 싸웠다. 거기 ‘내가 한다.’는 생각이 끼어들 여지가 전혀 없었다. 이것이 누구도 그들을 이길 수 없는 승리의 비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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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해주고 욕먹는 당신에게 - 50만 명의 인간관계를 변화시킨 자기중심 심리학
오시마 노부요리 지음, 이건우 옮김 / 푸른숲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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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중에 ‘좋은‘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타인에게 지나치게 신경쓰고 있다는 걸 알게되었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던 사람에게는 충격적인 내용.
타인 중심이 아니라 <자기 중심>으로 살아갈 것을
반복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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