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도하>를 읽은 것이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시간은 흐르기 마련이고 기억과 생각은 집적되기 마련이다. 집적된 것들은 형상을 나타내는데 필경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당연히 한 편의 글이 될 수 밖에 없다. 김훈은 1년의 시간을 보냈고 보고 들었고 생각은 구체화되었고 집적되어 침강했고 침강한 생각의 편린들은 소설이 되었다. 그렇게 세상에 나온 소설이 <내 젋은 날의 숲>이다. <내 젊은 날의 숲>은 김훈의 소설의 흐름에서 한 점을 차지할지도 모른다. 여성이 화자로 등장하는 장편 소설을 내가 알기로는 처음 쓴 것으로 안다. 많은 김훈의 독자들은 여성이 화자이고 주인공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구매하고 싶은 - 김훈은 어느 강연에서인가 부산인 것 같다. 그 강연에서 여자를 잘 알지 못함으로 여자가 주인공인 소설을 쓰지 못한다고 담담하게 고백했던 것으로 안다. - 책이다. 계약직 수목원 세밀화가 여성이 주인공인 이 소설은 김훈이 이제껏 고수해오던 것들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장석주 씨가 <만보객 책 속을 거닐다>에서 언급했듯이 '건조하고 성마른 문체'는 이미 김훈만의 독자 브랜드다. <내 젊은 날의 숲>에서도 김훈은 그의 독자 브랜드의 장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건조하고 성마른 문체는 시종일관 이야기의 중심을 잡았다. 명징한 것들이 더욱더 명징해지기도 했지만 밀어붙이는 것들은 짓눌려 명징성을 잃어버리고 추상성 속으로 함몰되어 간다는 것이 어쩌면 흠이라면 흠이겠다. 솔직히 고백하건데 여성 화자를 앞세워 숲에서의 삶을 그 순간의 편린들을 서사할 때 , 나는 김승옥의 <무진기행>의 주인공 남자가 여성성이라는 껍질만 뒤집어 쓰고 웅크린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착각에 빠졌다. 좀 더 적나라하게 이야기해보자면 김훈이라는 남성 화자가 여성으로 분장을 하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난감함에 봉착했다. 차라리 남성이 주인공이었다면 좀 더 읽고 몰입하기에 적당한 문장이었다. 김훈의 독자 브랜드는 남성의 화자일 때 그 효과를 100퍼센트 혹은 그 이상을 발휘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김훈은 소설가로도 유명하지만 에세이스트로도 유명하다. 김훈의 소설과 에세이를 두루 읽어보면 같은 문장을 구사하고 있어도 소설과 에세이의 문장이 조금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데 책 겉 표지에 보면 이 소설이 여행의 소산임을 알 수 있다. "나는 눈이 아프도록 세상을 들여다보았다. 나는 풍경의 안쪽에서 말들이 돋아나기를 바랐는데 풍경은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풍경은 미발생의 말들을 모두 끌어안은 채 적막강산이었다. 그래서 나는 말을 거느리고 풍경과 사물 쩍으로 다가가려 했다. 가망 없는 일이었으나 단념할 수도 없었다. 거기서 미수에 그친 한 줄씩의 문장을 얻을 수 있었다. 그걸 버리지 못했다. 이 책에 씌어진 글의 대부분은 그 여행의 소산이다. 산천을 떠돌면서 그런 생각을 했는데 산천은 나의 질문을 나에게 되돌려 주었다. 그래서 나의 글들은 세상으로부터 되돌아온 내 질문의 기록이다"- 작가의 말 중에서 김훈은 <풍경과 상처>에서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다. 말할 수 있는 것을 겨우 말하기에도 식은 땀을 흘리며 기진맥진한다"고 말했는데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말하려고 웅얼거리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된다. 완성된 문장이 아닌 미수에 그친 한 줄씩을 버리지 못하고 보듬어 낸 것이 <내 젊은 날의 숲>인 것이다. 김훈은 이미 작가의 말을 통해 이 소설의 한계를 인정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실 <내 젊은 날의 숲>은 소설의 구성과 서사를 가지고 책이 되어야 했던 것이 아니라 여행을 하고 쓴 에세이 성격을 가진 가령 <자전거 여행>과 같은 여행 에세이의 책이 되어야 했던 내용들이 대부분이었다. 전하고자 했던 것이 더욱 명징하게 전달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하는데 남녀 성정체성을 고민하는 양성애자의 고통 같은 것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김훈 또한 소설과 에세이 사이에서 많은 고민이 있었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