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 창비시선 142
이시영 지음 / 창비 / 199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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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에 적강(謫降)하여 사는 시인들이 생각보다 만항T고 하늘에서 익은 습관을 벗지 못해서 숨어 지내는 시선(詩仙)들이 허다하다. 성긴 내 눈에 허다한 먼지 톨 몇이 걸렸다 가라진다. 가벼운 먼지 한 톨의 무게는 천근만근이다. 먼지 톨 하나 눈썹으로 내리면 절명하는 사람처럼 무너져 내렸다.

  ‘이시영’이라는 이름은 내게 낮선 이름이다. 서걱거리지 않는 사람은 애초에 없다. 존재하지 않던 ‘존재’들이 드러나게 된다. 시들이 중첩되면서 드러나는 것이 시인의 실체다.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드러나지 않는 흔적을 더듬는 일은 지하철에서 성추행하는 변태와 같아서 지난(至難)한 일이면서 지복(至福)한 일이다. (아흐 ! 이 피학증에 걸린 족속들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할 것이다.하지만 배워 먹은 것이 이 짓이니 계속 할 밖에 도리 없다.)




  ‘사이’는 ‘적막하다’ 사이는 너와 나의 사이일 수도 있고 나와 세계일 수도 있다. 사이는 거리다. 눈에 보이는 객관적 거리일 수도 있고 눈에 보이지 않는 주관적 거리일 수도 있다. ‘사이’가 명명하는 것에서 벗어나 시간성을 획득하게 되면 ‘사이’는 ‘찰나의 순간’으로 전이된다. 사이는 거리이면서 순간이다. 가냘픈 사이라는 두 글자가 감당하기에는 힘든 의미가 깃든다. 보아라 사이라는 글자는 이미 가랑이가 찢어져 있지 않은가? 사이는 적막한데 모든 의미를 속에 넣어 적막할 수 밖에 없다. 짧은 순간에 거대한 침묵이 서식한다. 어느 누군가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언어는 침묵이라고 했던 것을 - 찾아보지마라 찾아보아도 찾을 수 없다. 지금 쓰인 유랑인의 언어다. - 기억한다.




  ‘임종’이라는 시에서 ‘어머니가 하도 안 돌아가시길래’ 좀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왔더니 한 순간 - 과거와 현재의 중첩 , 시간과 시간이 겹쳐지는 접접이 순간이지 않을까? - 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어머니의 죽음에는 과도한 비애나 애도는 없다. 죽음이라면 내포하는 기본적인 상징을 걷어낸 죽음은 땅으로 내려섰다. 순간을 영원으로 만든 ‘ 사이 ’로 . - 말이 길어지니 끝이 흐려진다. 기가 소진되어간다. 고달픈 일이다. 기진맥진하다고 쓰려다 너무 자주 쓰는 것 같아 그만두기로 했다.- 각인되었다. 이시영의 죽음은 군더더기 없어 좋다.




  ‘2AM’이 “ 네게 줄 수 있는게 이 노래 밖에 없다.”고 노래를 한 시간은 새벽 두 시다. 애절한 목소리로 아이들이 사랑을 노래할 때 시간을 견뎌온 시인은 무엇을 웅얼거리는 것일까? 새벽 두시에 시인은 깨어서 쓴다. ‘모든 편의와 욕망이 잠든 거리 , 활발한 자본의 운동이 일순 멈춘 고요한 거리’에서 ‘깨끗하다.’고 쓰지만 이 적막 속의 고요도 ‘ 거대한 아가리를 찢으며 청소차가 오’면 순식간에 무너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거대한 침묵이 생성되는 시간에 삶과 죽음을 생각한다. 침묵만이 삶과 죽음을 동시에 수용하고도 겨우겨우 견딘다. 시인에게 삶과 죽음이란 ‘나뭇잎들은 지상에서 오래 나부끼는데 바람 속에서 저처럼 오래 나부끼다가 여원 속으로 짧게 쓰러지는 것’이다.




  이시영의 시에서 눈에 띠는 것은 나뭇잎과 죽음이다. 죽음에 대해서는 남세스럽게 이미 이야기한 바 있으므로 그만 작파하기로 하고 나뭇잎에 대해서 말해보기로 한다.




  이싱영에게 나뭇잎 한 장은 ‘삶과 죽음’에 대한 비의를 함축하고 있는 비밀의 무늬다. ‘삶 , 죽음’을 아우르고 ‘사람의 목숨’도 나뭇잎처럼 일순간에 침강하는 것이다. 약한 바람에도 이리저리 뒤척이다. 떨어진다. 떨어지는 것은 말이 없는 법이다.




  이 시영의 시집 『사이』에는 인간이 사유할 수 있는것 들을 한순간 사이 혹은 찰나에 집어낸다. 이시영의 ‘사이’는 적막함과 침묵과 찰나 그리고 죽음과 나뭇잎이 나부낀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진저리쳐지는 일이다. 며칠을 자리보전하고 누워도 살까말까하다. 지레 겁먹고 앓는 소리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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