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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도하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평점 :
사랑아 강을 건너려면 , 나도 데려가다오. 산다는 것은 피곤한 일이다.
‘강을 건너지 마세요 임이시여’여옥은 이름 없는 강의 언저리에서 웅얼거린다. 여옥의 웅얼거림은 과거시제다. 임의 행동에 대한 부정이다. 항간에는 여옥이 노래를 불렀다고 전해졌다.멀리서 들리는 소리는 노래나 곡(哭)이나 다르지 않다. 소리로 우는 울음은 한정이 되어 있는 것이어서 그 극점까지 가면 소리는 사멸되고 몸이 그 울음을 대신하게 된다. 몸은 소리의 울림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여옥도 곡을 마쳤을 때 임처럼 백수광부(白首狂婦)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저기 백수 광부가 강을 건넌다. 적 백수광부는 혼만 건넌 영옥의 임인가 여옥인가?
“나는 인간 삶의 먹이와 슬픔 , 더러움, 비참함 , 희망을 쓸 것이다”라고 김훈은 썼다. <공무도하>는 백수광부처럼 강을 건넌 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강도 못 건너서 살아지는대로 사는 강 이 쪽 편 사람들의 이야기다. 고조선 시대 백수광부의 익사사고가 있기 전부터 사람들은 강의 저 편을 그리워하며 살았다. 그리움은 나무꾼이 선녀의 날개옷을 감추었을 때 하늘을 그리워하며 눈물 흘리던 선년의 눈물에서 연원한다.
강의 저 편에 건너가지 않았고 , 육신을 벗지도 않았으므로 인간이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저 편 피안의 일이 아니라 이 편 차안의 일들이다. 피안은 모든 추상성이 지배하는 곳이고 차안은 명징성이 지배하는 곳이다. 사람들은 세상살이의 슬픔과 더러움 , 비열함, 비루함 등을 잊거나 외면하려한다. 명징하게 찍힌 낙인은 지운다고 해도 지워지지 않는다.
<공무도하>는 삶의 이야기이다. 시간과 공간의 속박 사이에서 자유롭지 못한 인간의 삶의 이야기다. 시간과 공간의 속박을 벗는 방법은 안타깝게도 육신을 벗는 방법 뿐이다. ‘기르던 개에게 물려 죽은 아이’‘타워크래인 캐터필드에 깔려죽은 학생’들은 육신을 벗었으나 그 다음 이야기를 들을 수 없으므로 더 이상 우리의 흥미거리가 아니다. 말되어질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있는 것만이 인간이 감당해 낼 수 있는 한계다.
인간의 삶을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 주동자들을 불고 해망으로 흘러든 장철수 , 딸의 죽음에 대한 합의금을 가지고 해망을 떠난 방천석 , 아이가 개에게 물려 죽었어도 장례식장에 나타나지 않았던 오금자 , 화재 현장에서 금품을 훔쳐 퇴직한 박옥출 , 베트남에서 시집 왔지만 도망쳐버린 후에에 대한 이야기다. 삶과 죽음은 하나가 아니라 별개였다. 등장인물에게서 세상살이의 따뜻함이라고는 한 점도 느껴지지 않는다. 살이의 중심에서 주변으로 밀려난 자들의 이야기는 김훈이 말한 “인간 삶의 먹이와 슬픔 , 더러움 비열함”만이 가득하다. 부사와 혀용사는 품사로서의 경계가 모호하고 서로 뒤섞이면서 흘러가는 언어입니다. 형용사는 자동사에 접근하려는 성질을 가진 언어일 것이다. 인간으로 태어난 세상을 살는 일도 팍팍하다. 비루하고 남루하고 던적스러운 일이다. 더이상 말되어지지 않는 것에 대해서 말하는 것도 비루한 일이다.
백수광부는 죽었다. 여옥도 죽었다. ‘강물을 건너지 말라’고 하던 주체도 죽었고 객체도 죽었다. 그때의 인간은 지고 지금의 인간은 살아남아서 프로메테우스의 형벌처럼 삶을 산다.그때의 인간이든 지금의 인간이든 살아서 움직이는 동안 삶은 모두에게 등가다. 인간이 그가 처한 시대를 받아 들이고 또 쓸리고 넘어서면서 역사를 형성한다. 역사는 돌고 돈다. 죽고 사는 것은 소리없이 반복되어 왔다. 사건은 어제도 오늘도 있고 내일에도 있다. ‘죽은 사람보다 산 사람이 더 불쌍한’것이다. <공무도하>는 불쌍한 산 사람들의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