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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 불 들어갑니다 - 열일곱 분 선사들의 다비식 풍경
임윤수 지음 / 불광출판사 / 2009년 7월
평점 :
절판
안녕하십니까 유랑인입니다.
장마의 끝자락이라고 합니다. 습한 공기는 젤리나 푸딩처럼 숟가락으로 떠보면 뭉텅이로 떨어질 것 같습니다. 장맛비도 뭉텅이로 뚝뚝 떨어집니다. 언젠가 읽었던 『죽음의 한 연구』의 무대가 되었던 ‘유리’의 기후가 이렇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만드는 날 - 이 문장을 처음 쓸 때는 그랬습니다. - 들입니다.
박상륭의 소설 『죽음의 한 연구』에서 주인공이 찾아든 마을 이름이자 주인공의 이름이기도 한 ‘유리’이기도 합니다. 여러 장면이 기억에 남지만 , 그 중 유독 기억에 남는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유리는 유리에서 죽음을 맞이할 때 - 유리는 스님입니다. - 나무 위에 매단 가마 속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앉아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좌탈입망’이라고 합니다. 스님들이 처해지는 여러 가지 형태의 죽음 중에 하나를 글로 본 것이지요. 친견(親見)하기에는 아직 우주적 시간 속에 티끌 같은 시간을 살아내는 ‘유랑인’에게는 아직 기회가 없었습니다.
인간이란 숨탄것이 된 그 순간부터 피할 수 없는 천형(天刑)이 있습니다. 바로 죽음입니다. 필멸의 존재인 것을 인식한 인간들은 필멸을 뛰어넘어 불멸의 존재가 되기 위해서 종교에 기댑니다.. 천국을 꿈꾸고 열반을 꿈꿉니다. 그러나 그것은 존재의 인식이 계속되는 순간까지의 괴로움입니다.
죽음이란 것은 만가(輓歌) 자락 ‘북망산이 멀다더니 사립문 나서니 북망산이로구나’처럼 삶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낡은 비유이겠습니다만 동전의 앞뒷면과 같습니다. 태어나는 것을 축복하고 죽는 것을 슬퍼한다는 것 정도가 다르다면 다르겠습니다만 죽음도 각 지역마다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것이어서 축복하는 곳도 수둑룩합니다.
종교에서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다양합니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다비식’이라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스님들의 장례식입니다. 큰스님들이 입적에 들면 보통 행해지는 것입니다. 많은 스님들이 모여서 법의를 갖추어 입고 독경을 하며 스님을 보내드리고 마지막으로 연화대에 유해를 안치하고 불로 태움으로써 지수화풍 자연의 상태로 환원하는 의식입니다. 흔히 이러한 과정 끝에 열반에 들기를 기원합니다. 스님의 유해가 연화대에 오르고 상좌스님께서 불을 들고 외치십니다.
“스님 불들어갑니다”라고 외치셨습니다. 큰 스님을 떠나보내야 하는 스님들이나 일반 신도들이 애타게 읊습니다. “어서 나오세요” 그러나 큰 스님은 대답없이 시간이 지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불길 속에서 산화합니다. 다시는 현세에 오시지 못할 길을 부르는 소리에 뒤돌아 보지 않으시고 열반의 길로 가시는 것이었습니다. 일제히 곡소리가 들리고 독경소리가 뒤엉켰습니다. 스승을 잃고 도반을 잃은 사람들은 울음을 그치지 못했습니다.
연화대의 불길은 거세게 일어나는 법이 없습니다. 모든 속세에 대한 미련을 이미 버렸으므로 정염으로 타오른다거나 열정적으로 타오르는 법 없이 자분자분이 일어나 이 세상 잠시 들렀다가는 존재의 흔적은 꼼꼼하게 지웁니다. 남기는 것이라고는 어느 이에게서 나온 것인줄 알 도리없는 것들 , 이미 산화해버린 살과 뼈와 뇌수의 열기뿐입니다.
기억되지 않는 것이 진짜 죽음의 시작이라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죽은 이들을 기억하기도 하고 요즘에는 사진을 통해서 담아두기도 하고 글로 남겨두기도 합니다. 세상에 존재했던 필멸의 존재이므로 필멸에 처해졌지만 영원한 기억이라는 불멸을 성취합니다.
덧달기
66쪽 마지막 줄 ‘스님의 법구를 모신 검이 입방형이기 때문에’ 라고 적혀있는데 문맥상 감이 맞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