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들 사이에서 천운영의『그녀의 눈물 사용법』이 저벱 읽을만 하다는 풍문을 들은지는 한참이나 되었다. 세간에 쇼윈도우를 채우고 있는 밤의 매춘부처럼 희번덕거리는 베스트 셀러 코너에 활자화된 문구들이 만들어낸 소문은 아니었으므로 읽어볼 마음이 생겼지만 , 마음만 생길 뿐이었다. 책이 서가에 꽂히고 다른 책들의 무게에 밀려 뒤쪽으로 자꾸 밀려가고 있었다. 딱히 외국 작품을 즐기지도 않지만 한국 소설도 즐기지 않는 편이라서 한국이든 외국이든 소설작가들에 대해 무지하고 그 혹은 그녀들의 연대기에 무지하다. 그저 풍문으로 어떤 작가들의 글은 읽어볼만 하고 숨이 넘어갈 지경이던 한국 문단에 근래에 들어서 숨길을 미미하게 트고 있다는 풍문만을 들어볼 뿐이었다. 한국 문학을 읽어야한다는 개인적 호기심이 일기 시작한 것은 이맘 때 쯤이었다. 새로운 작가를 알게되고 글을 읽게 되는 것은 반은 두려움이고 반은 설레임이다. 천운영도 내게 그렇게 시작되었따. 『그녀의 눈물 사용법』에는 8편의 이야기들이 있다. <소년 J의 말끔한 허벅지>를 필두로 해서 <후에>가 마지막이다. <소년 J의 말끔한 허벅지>에서는 누드 사진 작가의 이야기이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라는 고전적이면서 철학적인(?) 물음을 물어온다.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물적 화현을 넘어선 저 편에 존재한다 화현되면 좋지만 화현하지 않아도 분명히 존재한다. 사람들잉 제시하는 아름다움은 저마다 다르다. <그녀의 눈물 사용법>에서는 사람들마다 눈물이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보여준다. 자기 위안이나 자기연민의 기능을 보여주기도 한다. 눈물의 진정성이 희석되고 눈물도 사용을 목적으로 하는 도구로 전락되었다.- 게이 점쟁이년의 눈물 사용법은 떠나버린 사랑을 돌려 세우는 도구다. 여자의 눈물은 무기다라는 속언이 섬뜩해지기도 한다. - 눈물은 더이상 감정이 뭉쳐진 액체가 아니게 되었다. <알리의 줄넘기>에서는 시류에 반기를 들었던 알리처럼 세상을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것들에 대해서 어린 알리의 시선으로 그 세상에 대처하는 법을 보여준다 아버지가 알리에게 처음으로 줄넘기를 가르쳤다. 줄넘기는 편견과 차별을 넘어서는 견딤이다. 줄넘기를 넘을 때마다 그 줄은 착시현상을 일으키듯 타원형을 만든다. 스스로가 멈추지 않으면 누구도 틈입할 수 없는 자기만의 공간이 생긴다.고모의 아이에게 줄넘기를 가르치려고 하는 알리의 모습에서 유전이라는 말을 떠올린다. 단단하게 세상을 살아가라는 이모가 된 알리가 조카에게 선물하는 멋진 줄넘기는 언젠가 조카에게 요기낳게 쓰일 것이다 알리가 그랬던 것처럼 <내가 데려다줄게>는 다소 서늘한 분위기가 베어 나온다 늪지대에 빠져 죽으려고 했던 중년의 남자 죽음과 삶의 그 사이에 처해진 - 일명 바르도라고도 하고 , 영화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중천의 그 중천이다. - 한 남자가 묘한 분위기의 여인과 할머니 여자애의 집에서 구조되고 그곳에서 잠시 생활하면서 자신이 밝히려고 했던 진실에 대한 허무함을 인식하는 이야기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실과 진실은 합치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진실은 행동의 의도가 완전히 포함된 것이고 사실은 그 결과 나타난 현상적 상황이다. 사실은 진실의 외투다. 사실 너머에 감춰진 진실을 알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노래하는 꽂마차>는 개인적으로 조금 읽기 불편했던 작품인데 분절이 많이 되어있는데다가 시점도 오락가락하는 것 같았고 그 종교에 가려진 추악한 혹은 광신적인 이미지와 종교의 허울을 뒤집어 쓴 추악함이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이 글은 한 소녀의 연대기라고 할수도 있다. 어렸을 때 광신적인 찬양단을 할 수 밖에 없고 종교의 이름으로 오라비에게 근친상간을 당하고도 침묵을 강요당하고 노래를 할 수 있다면 기꺼이 몸을 내어주었던 한 여인에 대한 기록이다. <내가 쓴 것>은 이번 소설집 중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은 글이다. 소설을 가르치는 여교수와 그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짧은 소설이 되었고 <작품후기>를 통해서 앞에 글들이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지 술회하고 있다. 자신이 생각하는 자기와 타인이 보는 자기의 차이를 인식할 수 있는 글이다. 비춰지는 개인은 타의에 의해서 굴절되고 파괴된다. 글로 환생하는 개인은 존재하는 개인이 아니라 글쓴이 혹은 말하는 이에게 재단된다. 형식적인 면에서 보면 큰 소설집 안에 작은 소설집이 들어있는 형태이다. <백조의 호수>에는 상류층으로의 진입을 위한 집념으로 가득했던 여인에 대한 기록이다. 자기보다 위를 선망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라면 가질 수 밖에 없는 허욕이라면 그 전형성을 보여주는 인물이 <백조의 호수>에 나타나는 여인이다. 상층 지향적인 행동은 상층과 어울려 파티와 모임을 하게 되고 우아함과 세련됨으로 자신을 포장한다. 우아한 모습은 백조같이 아름답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백조는 우아하게 호수를 유영하지만 백조의 발은 언제나 허우적거린다. 빠지지 않기 위해서 살기 위해 허우적거니다. 백조의 호수는 언제나 허우적거린다. 흔하지 않은 견종을 섭외하고 키움으로써 상층의 심벌로 삼고 자신이 속한 그룹을 인위적으로 나뉜다. 스스로를 대오에서 분리시키는데 결국은 자신이 속하고 싶지 않았던 그룹에서 상류지향적인 인식은 견종의 이종교배를 통한 잡종이 태어나는 것으로 극에 치닿는다. 의도하지 않은 살해를 통해 모든 것이 일거에 무너진다. <후에>는 두 자매의 진술이다. 밖에 있는 언니와 장농안에 있는 동생이 있다. 지켜보는 사람들에 의해 안정적인 타의에 의한 과겪한 절단 플루테스크의 침대와도 같은 시선을 견디며 어느정도 살아내는 언니와 플루테스크의 침대가 아니라 자기의 침대에서 잠을 자고 싶을 뿐이다. 서로의 입장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는 다분히 개인적이다. 우리는 어떤 침대에 살고 있는 것일까? 대답하지 않아도 이미 답을 알 것 같다. 신화의 시대를 지나서 역사의 시대를 살고 있지만 아직도 우리는 신화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천운영의 문장은 개인적인 은유로 말하자면 수은처럼 흐르는 납의 무게를 가졌다. 그녀의 문장은 부드럽게 물 흐르듯 하지만 그 문장의 무게는 납처럼 무겁다. 단순히 물리적인 시간이 오래 걸리는 점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문장과 문장이 만들어내는 아우라 혹은 행간이 그러하다. 결국 『그녀의 눈물 사용법』을 읽으면 몸안에 돌을 채워두는 것처럼 혹은 심장에 대못을 몇개 밖는 심정으로 읽게 될지도 모른다 걱정하지마라 몸속의 돌로 아파봐야 살아있다는 것을 느낄 것이고 심장에서 피가 흘러봐야 살아있음을 알 것이다. 어디 아프지 않고 아픔을 이야기하며 어찌 죽어보지 않고 죽음을 이야기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