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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여행
김훈 지음, 이강빈 사진 / 생각의나무 / 200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김훈의 글을 처음 만난 것은 칼의 노래였다. 수사의 시대에 절제된 언어의 뼈 마디는 비루했으나 그 앙상함 위로 새 살들을 자아내었다. 그 어찌할 수 없었던 경외감을 넘은 공포감을 내 눈은 기억하고 있다. 그의 소설을 다음 소설 [현의 노래]를 읽었다. 언어들은 자신들을 태워 전쟁의 잔혹함과 긴박함을 자아내기도 했다. 전쟁에 마주한 두 사람의 삶의 방식을 피의 냄새와 함께 보여주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뼈만 남은 그의 문체에 대한 공포감을 가장한 경외심이 깊어만 갔다.
김훈의 [자전거 여행]은 우연을 가장하여 내가 읽은 책이다. 이미 구입해두었으며 이미 방안으로 들어왔으나 지금에서야 나는 눈으로 읽고 귀로 들었다. 그는 잡설꾼의 모습으로 여수의 향일함에서 여의도 조강까지 자전거 풍륜과 길에 기대어 뱉어낸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알알이 모여서 하나를 이루어진 석류알 같은 이야기들이 붉게 잘 익었다. 언어의 편린들을 읽고 있노라면 담백한 과즙을 마시거나 두툽한 고기에서 베어나오는 육즙에 취하게 된다. 술은 필요없으니 술은 이미 나의 눈물이고 흔들리는 감성이면 충분했다.
김훈은 소설의 문체처럼 극단의 문장의 수사를 자제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자전거 여행]에서 그의 문체는 소설과 달라 보인다. 소설의 문체는 칼이다. 군살을 전혀 용납하지 않음이다. [자전거 여행]의 문체도 군살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소설의 문체보다 더욱 더 풍성하다. 끊어지는 언어의 반복 속에서 수런거리는 강물의 흐름이라 이름붙여도 좋을 것이며 유장함이라고 불러도 좋은 문체를 발견하다. 김훈의 소설문체는 도시적 미인이라면 수필에서는 다분히 자연적이고 육감적인 미인이다. 그저 보고 두기에 좋았으나 기어이 한 번 품어보리라는 음심을 가지게 하는 문체다. 사람들은 김훈의 문체를 비문이 없는 최고의 명문이라하여 찬한다.
나는 많은 활자들을 읽어왔으나 나의 손길을 이리 더디게 만드는 글은 없지 않았을까? 물론 박상륭은 나에게 필사라는 작업 자체를 시작하지 말 것을 넌지시 이야기했으니 박상륭의 문체를 필사할 수 없었다. 김훈의 문체를 부여잡고 보름을 살았다. 구절들은 책 속에서 기어나와 나의 손 끝으로 또 다른 공간으로 유배당했으며 , 그 기록들은 이제 들추어질 것이다. 언제 어디서든지 낱낱이 그의 문체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책 속에는 많은 사람들이 산다. 그 중에 아이들의 모습도 보이는데 그것은 섬진강을 여행할 때이다. 섬진강을 여행하면서 김용택의 학교에 이른다. 사실 최근에 중학교 교과 과정을 마쳤거나 중학 국어를 가르친 사람이라면 김훈과 김용택이라는 사람의 이름은 사실 낮선 이름이 아니다. 김훈은 [섬진강 기행]이라는 글로 1학년 책에 소개되었고 김용택은 [창우야 다희야 학교에 오너라]는 글로 2학년 글에 소개되어 있다. [자전거 여행]에서는 창우와 다희가 김용택이 이야기할 때 보다 좀 더 자라서 가짜 학생이 아니라 진짜 학생이 되어있다. 그리고 그의 부모님의 사연도 소개되어있다. 비약일지도 모르겠으나 국어책이 전하지 못한 창우와 다희의 뒷 이야기를 이 책에서 만날 수 있다. 이런 것을 상호 텍스트적 책읽기라고 거창하게 이야기해본다면 나만의 비약일지도 모르겠다.
글을 그냥 마무리하기 아쉬워 책 첫머리 즈음에 나오는 구절을 한구절 읊으면 글을 마치려고 한다.
돌산도 향일암 앞바다의 동백숲은 바닷바람에 수런거린다. 동백꽃은 해안선을 가득 메우고도군집으로서의 현란함은 힘을 이루지 않는다. 동백은 한 송이의 개별자로서 제각기 피어나고, 제각기 떨어진다. 동백은 떨어져 죽을 대 주접스런 꼴을 보이지 않는다. 절정에 도달한 그 꽃은 , 백제가 무너지듯이, 절정에서 문득 추락해버린다. '눈물처럼 후득득'떨어져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