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된 물건에서 발견하는 예술과 추억, 열린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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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고릿적 몽블랑 만년필 - 오래된 사물들을 보며 예술을 생각한다
민병일 지음 / 아우라 / 2011년 2월

저자 민병일 씨가 독일 유학 중에 그곳의 크고 작은 벼룩시장을 통해 구입한 사연 깊은 물건들에 관한 기록으로서, 헌 물건보다는 새 물건을 선호하고 새 물건을 장만하는 대로 헌 물건을 속 시원히 버리는 나의 생활태도를 자동적으로 돌아보게 되는 동시에, 평소 검소하기로 소문난 독일인들에 대한 일반적 통념이 역시 틀리지 않다는 점을 확인하며 독일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도 같이 상승하게 만드는 책이다. 한때의 큰 잘못을 사과하고 무릎 끓을 줄 아는 나라 독일의 이미지에 더하여.

만년필과 램프, 찻잔과 찻주전자, 촛대, 타자기, 습도계 등 오래 된 물건들이 공장에서 갓 뽑아져 나온 허여멀끔한 상품들의 개성 없음을 야단치는 듯이 연륜의 짙은 품격을 은은하게 드러낸다. 오래 전부터 품질을 잘 관리해 생산해 왔을 듯한 독일산 물건이라는 점에 이국적 색채와 희소가치가 더해진 물건들이 정겹고 아름답게 보였다. 반면에, 유학 중에 돈도 없다면서 굳이 사모을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물건도 있었다. 예를 들어 조선을 다룬 독일의 고서 '고요한 아침의 나라'와 같은 책이나 오래 된 LP음반과 같은 것은 소장 가치가 크다고 여겨지지만, 남들이 쓰던 필통 속의 몽당연필과 손때 닳은 오래 된 라디오, 무거운 무쇠 다리미는 처음엔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물론 저자의 글을 읽다 보니 그 마음이 이해됐다. 이분은 실용적 차원에서 물건을 구입한 것이 아니라, 물건을 사용하던 이의 아련한 추억과 향수까지도 기꺼이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즐기고 간직한다는 것을. 네것, 내것 구분하고 내 일 아니면 모르는 식의 개인주의가 만연된 세상에서 생판 모르는 사람의 추억까지도 소중히 여기기가 쉬운 것 같지는 않은데. 타인을 따스하게 껴안을 수 있는 열린 마음이 부럽게 느껴졌다.

물건이 아닌 추억을 다룬 내용도 있다. '시간이 멈춘 동화 속의 중세, 로텐부르크'라는 소제목의 단원에서는 중세의 분위기가 잘 간직한 채 한켠에서는 양떼와 목동이 노니는 낭만적인 풍경의 로텐부르크를 소개하고 있다. 자연풍광과 뽀죡한 벽돌색 지붕의 집들이 한폭의 소박한 그림같이 어우러져 있는 곳으로서 살짝 휘어진 좁은 도로와 나무 한 그루까지도 하늘에서 디자인해 놓은 듯이 그 모습 그대로 아름답다. 언젠간 꼭 방문해보고 싶은 그곳.

첼로의 거장 로스트로포비치와의 추억을 이야기한 장에서는 가슴 뭉클한 감동이 느껴졌다. 러시아 사람이었으나 정치적 견해로 인해 스위스로 망명했던 로스트로포비치가 자신의 20대 시절의 사진이 표지인 오래 된 음반에 사인 요청을 하자 깊은 감회에 잠기며 좋아했다는 얘기와, 한국에서 왔다는 말에 '장~ 한~나'라고 말하며 웃었다는 짧은 일화에서 거장의 소박한 마음이 엿보였다. 처음 본 한국 팬에게 프랑스 집 주소까지 적어주며 놀라오라고 했던 로스트로포비치는 저자가 잠시 다른 일로 바쁜 사이 세상을 타계하고 말았다. 한 번 더 만남을 갖지 못했던 것은 아쉽지만, 이렇게 짧은 만남의 기억이라도 소중하게 남겨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줄 수 있다는 사실이 그나마 위안이 된다.

이 책을 통해 작은 물건 하나하나를 소중히 여기고 아끼는 소박한 정신과 그 물건들로부터 예술과 추억을 발견하는 열린 마음을 봤다. 세상 여기저기에 심어져 있는 내 추억은 무엇인지, 내 손길은 무엇에 닿아 있는지, 내 마음은, 내가 아끼는 것은, 그것들에 대한 고마운 마음은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는지, 여러 가지를 확인해보게 만든 자상한, 오빠같은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