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
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세상을 밝혀주는 빛이 사라진 후에는 칠흙같은 어둠만이 깔려있는 거리에 있는 것은 버려진 차량과 그 속에서 잠을 자는 듯이 앉아 있는 사람들, 부서진 건물사이로 보이는 여기저기 흩어진 물건들만이 존재하는 미래의 세상. 자기가 누구인지 자신이 누구라고 불리어지는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 세상. 오직 먹을 것만 찾아다니는 세상. 살아있기 보다는 길가에 죽어 있는 사람들이 더 부러운 세상.

 

이런 암울한 세상에서 인간은 과연 살아갈 수 있을까? 만약 산다면 무엇을 위해 왜 살아가야하는 걸까?

 

 

‘로드’라는 소설은 이런 환경에서 인간이 살아가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나의 존재이유는 필요가 없다. 단지 오늘 살기위해 먹을 것을 찾아 나서는 사람. 나와 똑같은 사람을 사람이 아닌 음식으로 여기고 먹는 사람. 내가 가진 음식과 몸을 덥힐 옷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남을 적으로 여기고 사람을 피해 도망 다니는 사람. 우리가 생각하는 인간이라는 존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다. 우리의 주인공인 일명 ‘그 남자’와 ‘소년’은 단지 한 가지 해변가로 가면 있을 지도 모를 희망을 찾아 하루하루 이동하면서 살아간다. 아무것도 없는 세상에서 그 희망만이 그리고 부자간의 사랑만이 이 어둠에서 살아가는 유일한 것이다.

 

 현대문명이 부서지고 남아있는 것이 없고 인간이 인간의 유일한 적으로 남아있는 세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유일한 이유는 희망이다. 그리고 서로간의 믿음과 사랑이다. ‘그 남자’가 죽고 유일하게 남은 ‘소년’은 어떻게 할지 어디로 가야할지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다시 사람을 만나고 그 속에서 희망을 사랑을 믿음을 보고 다시 살아갈 이유를 얻게 된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생각한 것이 인간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인가? 과연 인간은 선으로 이루어진 존재인가? 하는 것이다. 물론 명확한 답은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사람을 괴롭히는 것도 인간이며, 사람에게 사랑과 희망을 주는 것도 또한 인간이라는 사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쳐야 미친다 - 조선 지식인의 내면읽기
정민 지음 / 푸른역사 / 200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나도 변하기 시작한다. 언제나 나를 둘러쌓고 있던 무거운 옷의 껍질들이 하나하나 벗겨지며 원래 몸 형태를 드러내고 마음까지도 얼어붙게 만들던 하얀 입김도 어느 순간 사라지고 없다. 몸이 변하듯 주위의 세상도 변신을 시작한다. 동장군을 피해 땅 속 깊이 숨어있었던 파란 잎들이 추위에 얼어 버렸던 땅의 무게를 뚫고나와 새 봄의 소식을 전한다. 창문 사이로 비추는 햇살은 여느 때와 다르게 나의 세포 하나하나와 화학작용을 하면서 엔도르핀을 분비해 내며 소리친다. ‘잊어라, 고통과 아픔의 시간은.... 그리고 맞이하자. 행복의 순간을...’ 나의 몸과 나를 둘러쌓고 있는 세상은 봄을 알리지만 정작 나의 마음은 언제나 겨울이다. 새 봄의 소식보다는 나를 감싸고 있는 걱정거리와 답답함 그리고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삶의 무게들만이 느껴진다. 하루하루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가지만 여느 때처럼 나의 마음은 바쁘기만 한다. 따뜻한 햇살아래에서 하늘을 바라본 적이 언제이며, 총총히 박혀있는 밤하늘에 있는 별과 토끼가 산다는 달을 봐라 본지가 언제이고 지붕위로 떨어지는 빗소리에 맞추어 흐르는 감미로운 음악에 빠져 나 또한 촉촉해지는 감정을 느껴본지가 언제인가? 오늘도 나는 바쁘기만 하다. - 일상 속의 깨달음

 

주위에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어디를 가든 전화 한 통이면 나를 만나 줄 친구들 나와 함께 웃어주고 수다 떨어줄 사람들이 있다. 스마트폰의 주소록에는 나의 인간관계를 보여주는 번호들로 넘친다. 그럼에도 나는 외롭다. 같은 식당에서 같은 식탁에 앉아 마주보며 식사를 하고 있음에도 우리는 서로의 폰을 보며 가상의 현실에 빠져든다. 나의 슬픔과 아픔 그리고 기쁨을 진심으로 함께 해 줄 사람이 없다. 허균과 기생 계랑과 같은 이성을 넘어서는 우정이 없으며 홍대용과 그의 벗들처럼 악기를 통해 하나되는 흥과 즐거움이 없다. 단지 우리에게는 인터넷이라는 가상의 세계에서 만남을 가진다. 만남은 이어짐이다. 점과 점을 이어지는 단순한 물리적인 이어짐이 아닌 서로를 이해하고 알고자하는 마음의 이어짐이다. 마음을 이어주는 만남이야말로 맛난 만남이다. -맛난 만남

 

한 평생을 살아가면서 진짜로 미쳐 본 적이 있는가? 어느 하나에 미쳐보기 전에 생각해 볼 것이 많다. 금전적 혜택이 있는지, 경력에 도움이 되는지 등 이것저것 따져봐야 할 것이 너무 많다. 결국 어느 하나에 좋아서 미쳐보기 전에 넘쳐나는 잡다한 생각들로 미쳐버린다. 잊는다는 것은 돌아보지 않는다는 뜻이다. 따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것을 해서 먹고 사는 데 도움이 될지, 출세에 보탬이 될지 따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냥 무조건 좋아서 하지 않을 수 없어서 한다는 말이다. 붓글씨나 그림, 노래 같은 하찮은 기예도 이렇듯 미쳐야만 어느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니 그보다 더 큰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깨달음에 도달하려면 도대체 얼마나 미쳐야 할 것인가? p.30” - 벽에 들린 사람들

 

이 책은 조선 선비들의 작품을 통해 그들을 알아보는 형식으로 글이 전개된다. 한 것에 미쳐 고수에 도달한 사람들을 모은 벽에 들린 사람들’, 조선 선비들과 선비들의 만남을 그린 맛난 만남’, 그리고 그냥 스치고 지나갈 정도로 평범하지만 조선 선비들에 눈에는 그 어떤 것보다 아름답고 신비로운 평범함을 묘사한 일상 속의 깨달음의 세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세 가지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부족한 것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철학을 낳은 위대한 질문들 - 모든 위대한 사상은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위대한 질문 시리즈
사이먼 블랙번 지음, 남경태 옮김 / 휴머니스트 / 2012년 6월
평점 :
절판


11. 모든 것은 상대적인가?

지식은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절대적인 것과 상대적인 것. 중세시대에 절대적이라고 믿었던 지식이 과학의 발달로 거짓이라는 드러나는 것처럼 모든 지식은 절대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하다. 마찬가지로 상대적 지식으로만 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 또한 받아들이기 힘들다. 1+1=2 라는 지식은 상대적 지식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결국 지식은 어떤 문제를 다루느냐에 따라 절대적일 수도 상대적일 수도 있다. 과학 수학등과 같은 자연현상을 설명하는 분야는 절대적일 가능성이 높은 반면 사회 역사 정치 경제 문화 등은 개인이 살아온 역사와 배경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13.왜 사물은 늘 변함이 없는가?

이 질문의 전제는 사물은 늘 변함이 없다, 다시 말해 규칙성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규칙성이라는 것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강력한 확신을 가지고 예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이 지나면 내일이 온다는 사실, 봄이 되면 꽃이 핀다는 사실 등은 우리의 후험적인 지식을 통해 규칙성을 알 수 있는 것들이다.

자연의 규칙성은 어떤 힘에 의해 작동하는 것인가? 자연 내부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없으면 외부에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이 신의 존재이다. 하지만 신이라는 존재는 의식적인 안도감을 줄 수 있지만 자연의 규칙성을 찾아내는데 실질적인 도움은 되지 못한다. “...한마디로 신은 초월적 존재다. 문제는 이런 수식어들이 아주 인상적으로 들리지만 그 때문에 신이 어떻게 물리적 우주와 상호작용하는지, 어떻게 우주를 탄생시키고 질서를 유지하는지 이해하기가 더욱 어렵다는 점이다. 신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p.213-214”

 

14. 왜 아무것도 없지 않고 뭔가가 있는가?

무엇인가 있다는 말은 그것이 생기게 된 원인이 앞에 존재한다는 말이다. 이런 식으로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태초에 결국 무엇인가가 있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것이 아무것도 없는 일 수도, ‘일 수도 있다. 정확히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럼에도 인간은 태초의 존재에 대해 궁금해 하고 알고자 한다. 그것은 존재라는 것은 결국 유한하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의 삶에 끝이나 고통이 없다면 누구도 세계가 왜 존재하는지, 왜 바로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존재하는지 묻지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은 그냥 당연한 것으로만 간주될 것이다.

p. 223.”

 

15. 무엇이 공간을 채우는가?

철학의 큰 관심사는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는 것이 관념적인 방법에 의해서인지 경험적인 방법에 의해서인지이다. 관념적이라는 말은 우리가 감각으로 보는 세상은 피상적인 것이며 말 그대로 진짜는 감각으로는 인지될 수 없다는 것이며, 경험적인 방법은 우리가 감각으로 인지하는 세상 또한 진실한 세상이라는 논리이다. ‘무엇이 공간을 채우는가?’ 라는 파트는 바로 이 부분을 건드리고 있다. 우리가 물체를 인식한다는 말은 물체의 본질을 인지한다는 의미인가 아니면 대상의 작용, 즉 대상이 다른 것에 영향을 미치는 잠재적 효과와 힘 때문에 인지되느냐 라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지은이는 물체의 본질, 다시 말해 관념론자보다는 경험론자들의 의견에 동조한다. 이 장에서의 결론은 이렇다. 단지 힘만 있을 뿐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 만족해야 한다는 것이다. p .247”

 

16.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사람은 자라온 환경, 배경 지식, 경험이 다 다르다. 당연히 관점이 다르며 아름다움을 느끼는 포인트도 다르다. 같은 그림은 보더라도 아름답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는 반면 그렇지 않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사람 간의 이런 차이점을 존중해야 한다. 그러나 지은이는 다시 이야기한다. 차이점이 있지만 보편적인 공통점도 분명 존재한다고.... 아름다움을 보는 관점이 다를 수 있지만 누구나 가지는 아름다움도 존재한다. 일출, 석양, 밤하늘의 별들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지은이는 세익스피어의 말을 인용해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그런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자기 안에 음악을 가지지 못하는 사람

달콤하고 조화로운 소리에 감동하지 않는 사람은

배신과 책략과 모략에 능하다.

영혼의 움직임은 밤처럼 둔하고

감정은 저승처럼 어두우니

그런 사람은 믿지 말아야 한다.“ p.262

 

17. 신은 과연 필요한가?

신과 과학이라는 것은 서로 상반되는 개념이다. 신이 창조한 인간과 자연은 결점이 없는 존재이며 그것에 반박하거나 딴지를 거는 행위는 신을 인정하지 않는 행위이다. 그러나 과학은 인간의 결점을 인정하고 자연현상을 설명하려는 학문이다. 결국 중심에 신이 아닌 인간을 두었기 때문에 가능한 학문이다. 그럼에도 과학기술발달의 최고점에 달해 있는 현대에도 신, 즉 종교에 대한 믿음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를 통제하고 관리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생각은 우리의 행동과 의식에 브레이크 역할을 해 준다. 뿐만 아니라 서로를 연결해주는 접착제와 같은 역할을 한다는 의미에서 종교라는 것은 필요하다.

 

18. 무엇을 위해 사는가?

태고 적부터 인간의 눈은 두 군데를 향해 있었다. 이 책에서는 그것을 초월적 선택 그리고 내재적 선택이라고 말한다. 현실의 유한성과 고단함을 부정하고 삶 너머를 바라보는 삶을 초월적 선택이라고 한다. 종교에서 말하는 죽음 이후의 삶이 아마 여기에 속할 것이다. 그럼 당연히 내재적 선택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를 말한다. 삶의 고단함과 유한성을 인정하면서 그래도 지금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삶을 말한다. 쉽게 말하면 매일 만족스럽게 살아가는 것이다. 인간 세계는 비록 단조롭고 익숙한 경험이 반복되지만 인간 존재에게는 충분한 의미가 있다. 내재적 선택에서 보면 아기의 웃음, 무용수의 우아한 동작, 좋은 목소리, 연인의 몸짓, 심지어 지나치는 빛과 그림자나 바다의 속삭임도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 삶의 과정에는 삶은 넘어서는 것도, 삶의 분리도 없다. 이 모든 과정이 지향하는 단 하나의 목표는 없다. 다만 그 과정 자체에서 소중한 가치와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삶에는 유일한 의미가 아니라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p.286”

 

19. 나의 권리는 무엇인가?

인간이 무리를 짓고 사회를 형성하는 과정 속에서 법, 규칙 그리고 도덕이라는 것이 생겨난다. 사회에 속해 있는 우리는 그 규율들에 영향을 받으며 당연히 우리가 가진 권리 또한 제한받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애매모호하거나 추상적으로 설명된 우리의 권리는 분쟁을 야기할 수 있다. 지은이는 말한다. 자유와 권리라는 개념은 구체화되어야 한다. p .306” 명확하게 기재되고 설명된 인간의 권리만이 억울함과 부당함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고 지켜줄 것이다.

 

20. 죽음은 두려운 것인가?

죽음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두렵게 여겨지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종교적 의미에서 죽음이후에 무엇이 있을 것인가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죽음을 경험한 이의 경험담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미지로 남아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런데 종교적 의미를 빼고 자연적 의미에서 죽음을 바라보면 죽음이후에는 이다. 죽은 이는 아무것도 느끼지도 보지도 못한다. 다만 남아 있는 자들의 슬픔만 있을 뿐이다. 결국 죽음이 두려운 이유는 죽기 전에 가지고 올 공포와 고통, 그리고 무엇보다 남은 자들의 슬픔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자연에 존재하는 동식물의 죽음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우리의 죽음 또한 두렵지만 당연한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은 탄생과 죽음은 인간 삶의 양면이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대불황의 시대, 한국경제 어디로 가고 있는가
김동원 지음 / 미래의창 / 2016년 2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4부분으로 나뉜다. 첫 번째는 국외의 경제상황을 논한다. 중국의 성장률감소, 미국의 금리인상 등으로 인해 경제적 전망이 그리 좋지 않다고 말한다. 수출 중심국가인 한국에게는 그리 좋은 소식이 아니다. 둘째는 세계경제가 이렇게 움직이고 있는 현 시점에 우리는 현재 어떻게 행동하고 있느냐를 여러 가지 수치를 제공하면서 설명한다. 셋째는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이다. 선진국 일본, 독일, 영국 등의 경제정책의 변화를 바라보면서 한국의 답안은 무엇인지 말한다. 마지막은 삼포세대를 언급하고 다시한번 변화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최근에 본 영화중에 카트라는 영화를 봤다. 이랜드의 홈에버의 비정규직 문제를 다룬 영화이다. 누구보다 열심히 고객들과 전쟁 아닌 전쟁을 치르면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갑자기 날아온 해고문자. 이때부터 시작된 그들의 진짜 전쟁. 대중매체에서 전하는 실업률, 비정규직 문제 등에서 전하는 수치상의 논쟁이 아닌 실제 우리의 이야기였다.

이 책을 보는 내내 떠오르는 것이 바로 이 영화였다. 과연 왜 우리는 남들처럼 정규직에서 잘릴 걱정없이 정당한 보수와 대우를 받으면서 일할 수 없을까? 솔직히 경제라고는 초등학교 수준에 머물러 있는 나로서는 엄청난 수치를 가지고 경제를 분석하는 이 책이 부담스러웠다. 그럼에도 한 가지 공감하는 것은 내수시장의 안정화이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우리나라는 수출중심국가이다. 하지만 국외상황을 우리가 통제하거나 관리할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럼 당연히 가장 먼저 내수의 안정이 필수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수출의 감소와 함께 국내소비 또한 감소하고 있다. 작년에 진행된 코리아 블랙 프라이데이도 그 내수 진작이 그 목적이었다. 여기서 초등학교 수준의 수요 공급의 의미만 알고 있는 나로서는 한 가지 의문점이 든다. 소비가 줄어든다는 말은 각 가정이 돈의 씀씀이를 줄이고 있다는 말이다. 왜 줄일까? 이유는 하나 돈이 없으니까. 그럼 돈이 왜 없을까? 여러 상황이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가 아마 가정으로 들어오는 수입이 그리 좋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비정규직, 계약직 등으로 일하는 경우가 늘어나는 추세이며 정규직조차 일찍 명퇴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더불어 몇몇 대기업을 제외하고는 정규직임에도 많지 않은 월급은 한 가정을 먹여 살리기에는 힘든 경우가 대부분인 현실이 이것을 잘 반영한다. 당연히 기업입장에서는 인건비를 줄임으로서 자금을 줄인다는 이유를 말한다. 그런데 아무리 잘 만들고 좋은 제품을 만들면 뭘 하나? 소비할 돈이 없는 소비자입장에서는 그림의 떡이다. 결국 소비감소 그리고 기업의 이익 감소로 이어진다.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내수안정의 기본은 튼튼한 가정의 수입이라고.

 

노동개혁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 일환이 노동유연성이다. 그런데 나는 또 이해가 안 된다. 노동의 유연성은 어떤 이유에서든 노동자를 회사에서 해고하는 게 좀 더 쉬워진다는 의미이다. 특별히 문제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 대부분은 자금문제 때문에 해고를 할 것이다. 그럼 다시 고용을 하기는 어려운 것 아닌가? 또는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정규직을 해고하고 비정규직으로 대체할 수도 있다는 것 아닌가? 이런 경우에 이것이 어떻게 내수안정화에 기여를 한다는 것인지 잘 이해가 안 된다.

 

인간은 이성적 존재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상당히 감정적인 존재라고 한다. 내가 언제 잘릴 줄도 모르는 상황에서 일한다는 것 그리고 주위 동료들의 잦은 이직은 일을 하고 있는 노동자들에게 불안감을 조성할 것이며 이것은 생산성 저하를 가지고 올 것이다. 또한 불안하고 잦은 이직이 있는 직장에서 올바른 직업의식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지금처럼 돈의 가치로 직업의 높낮이를 판단하는 추세에 낮은 직업의식은 또 다른 생산성 저하를 야기할 것이다.

 

가정을 이끄는 것도 사람이며 한 회사를 이끄는 것도 사람이며 한 사회와 한 나라를 이끄는 것도 사람이다. 현재 자기의 위치가 어디이든 사람을 그 중심에 두고 생각한다면 우리의 겨울에도 봄은 찾아올 거라고 믿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산 정조대왕 - 조선의 이노베이터
이상각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조선건국 태조 이성계를 시작해서 제27대 순종으로 조선의 이름이 사라질 때까지 많은 왕이 조선의 왕좌에 올랐다. 그 중 가장 훌륭한 왕으로 칭송받고 있는 왕이 세종대왕일 것이다. 우리가 좋아하는 지폐에도 당당히 얼굴을 알리고 계시니 말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정조대왕을 더 우위에 두고 싶다. 충녕대군(세종)은 아버지 이방원(태종)의 외척의 힘을 최소화시키기 위해 민씨일가를 쳐낸 것과 같은 일련의 왕권강화정책에 의해 안정적인 토대위에서 왕의 자리에 올랐다. 반면 이산(정조대왕)은 뒤주에 갇혀 8일 만에 숨진 아버지 사도세자로 인해 세자로서의 자리는 말한 것도 없고 목숨에도 위험을 느끼고 있었다. 영조가 숨지기 얼마 전에서야 우여곡절에 끝에 겨우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왕이 된 후에도 그를 반대하는 여러 중신들에 의해 위협을 느꼈으며 실제로 암살 시도도 있었다. (그것을 영화로 만든 것이 현빈 주연의 역린이었다.) 목숨까지 감수해야 하는 위험한 위치에서 시작했음에도 그는 당당히 그 위기를 이용해서 왕권강화를 착실히 시작도 한다. 이런 여러 가지 점들 때문에 조선사에서 가장 위대한 왕을 뽑으라고 한다면 정조대왕을 선택하고 싶다.

    

 

이 책 정조대왕은 왕으로서 그의 뛰어난 점을 두 가지로 압축해서 이야기한다.

첫째, 공부하는 왕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왕을 교육하기 위한 경연관이라는 직책이 있었다. 국왕에게 유교의 경서를 강론하는 등 학문 지도와 치도(治道) 강론을 하고 때로는 국왕과 함께 현안 정치문제도 토의하는 관직이어서 가장 명예로운 자리로 여겼고, 그만큼 학문과 인품이 뛰어난 문관을 임명하였으며, 조선 후기에는 재야 학자도 참여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 왕이 스승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를 청해 교육을 받는 형식인데, 정조는 그 반대였다. 그는 어릴 때부터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멍에 때문에 자신이 가지게 될 운명을 감지하고 그 어떤 왕보다도 더 열심히 공부했다. 학문의 경지는 내로라하는 문신들을 주눅 들게 할 정도였고, 그림이나 전각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또 무예에도 관심을 기울여 틈만 나면 활터에 나갔다......그런 만큼 정조는 정치가로서의 역량뿐 만아니라 학자, 문인, 예술가로서 자신을 갈고 닦았다. 그는 학문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 지식이란 공허한 것이며, 철학이 없는 실천은 무의미하다고 강조했다. p .127” “정조는 시강의 조목과 시제의 제목을 직접 냈고 종종 참관함으로써 무게감을 주었다..... 이 때 정조는 초계문신의 주군이자 스승으로서 군사의 역할을 담당했다. 정조 자신이 뛰어난 학자가 아니라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p138” 자기 관리를 게을리하지 않으며 자리가 아닌 실력으로 상대를 굴복시키고 존경을 불러일으킬 줄 아는 왕이었다.

    

 

둘째,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습관의 힘이라는 책이 있다. 여기에 따르면 인간의 뇌는 양파껍질과 같단다. 가장 외부에 있는 껍질이 최근의 기억이며 안으로 갈수록 원초적인 부분으로서 숨쉬기, 삼키기 등과 같은 무의식적인 행동을 통제하는 부분이 있다고 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습관은 반복적인 행동으로 인해 양파의 바깥쪽 껍질에서 안쪽으로 이동하여 무의식적인 단계에서도 그 행동을 할 수 있을 때 생겨나는 것이다. 사고도 마찬가지이다. 습관화된 사고는 자신도 모르는 순간에 기존의 방향에서 벗어나거나 자신의 생각과 반대되는 일련의 사건들에 거부감을 가지게 만든다. 유교라는 나라에서 자라고 교육을 받은 왕임에도 정조는 기존의 습관을 버리고 과감히 새로운 습관을 선택했다. 그것이 바로 변화였으며 그 결과물이 규장각 설치였다. 규장각을 설치해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벼슬자리에 오를 수 있도록 했다. 대표적인 인물들이 서얼로서 정치에 발을 디딜 수 없었던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등이 있다. 사도세자라는 아들이라고 선포하며 왕위에 오른 정조대왕에게 변화는 곧 죽음의 위협과도 같음에도 그는 그것을 선택하고 조선의 개혁에 착수했다.

    

 

테러방지법의 직권상정에 반대해 필리버스터를 3일째 하고 있는 더민주당, 국회 본회의장 밖에서 필로버스터를 국회마비라고 야당을 비난하는 새누리당. 지금처럼 시끄러운 정치상황에서 자신을 갈고 닦고 사람을 보며 변화를 꿈꾸던 정조대왕이 그리워지는 것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