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1894년 여름 - 오스트리아인 헤세-바르텍의 여행기
에른스트 폰 헤세-바르텍 지음, 정현규 옮김, 한철호 감수 / 책과함께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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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4년 우리나라에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을까? 동학혁명이라고도 불리는 갑오농민 운동이 일어났으며 그에 대한 영향으로 갑오개혁과 청일전쟁이 발발하기도 했다. 우리의 역사를 공부하다보면 한쪽 방향으로 치우치게 마련이다. 상대적으로 우리의 역사의 우수성에 대해 알리려는 노력하는 측면과 반대로 무능하고 부패한 관리들 덕분에 타국의 침입을 많이 받았던 문제점에 대해 적나라하게 꼬집는 두 측면이다. 한권의 책에서 두가지를 모두 접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특히 조선 말기는 쇄국정책으로 말미암아 변화의 흐름에 합류하지 못해 35년간 식민지배를 받는 치욕의 역사를 남기기도 했다. 35년간 식민지배를 받으며 상대적으로 빨리 서양문물을 접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우리 민족의 정기를 끊기 위해 백두대간에 쇠말뚝을 박고 호랑이나 표범과 같은 맹수들도 죄다 사냥해서 씨를 말려버렸다. 또한 경복궁도 90%나 파괴했으며 창경궁도 창경원이라는 동물원으로 둔갑시켜 버렸다. 그렇다면 그 시대에 외국인의 눈에 우리나라는 어떻게 보였을까? 제 3자의 객관적인 시각이 참으로 궁금했다.

 

  31가지 큰 주제에 대해 한국을 여행하며 연구한 장년의 오스트리아인이 적었다고 하기에는 믿기지 않을만큼 소상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기술되어 있어 놀랄 따름이다. 한국에서 수십년간 살았고 어른들로 부터 듣고 책에서 보았던 내용보다 더 상세하게 전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 당시에 외국인이 보기에 조선인들은 참으로 한심했을 수도 있겠다. 위생에 대한 관념이 없어 제대로 씻지도 않았고 상하수도 시설도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재래식 화장실과 집안에 있는 마굿간 덕분에 벌레들과 함께 거주를 하였으니 말이다. 자연과 함께 살기를 원했기 때문인지 제대로된 도로는 없었으며 우마차가 겨우 통행할 정도의 오소길만 있었고 자동차나 기차는 상상도 할 수 없었으니 말이다. 경복궁을 복원한다고 남발한 당백전 덕분에 소위 말하는 인플레이션이 일어나 무거운 엽전을 나귀의 등에 가득 싣고 다녀야할 판이었다. 여자로 태어났다는게 무슨 죄인양 아침부터 밤까지 일에 시달려야하며 인권이 뭔지도 모르고 살아야 했을 것이다. 남자들이 능력이 없어 자신의 여자도 지키지 못했으면서 정절을 강조하며 차라리 은장도로 자결할 것을 권하고 과학과 기술을 천시하고 중국만을 숭배하며 말도 통하지 않는 한자로 어렵게 글이나 짓고 풍류를 즐기는 것을 낙으로 삼았으니 내가 봐도 한심할 지경이다. 근데 이렇게 느긋하고 자연보호를 주장하던 국민들이 어쩌다가 세상에서 가장 성격 급하고 다혈질이 되었으며 인간의 편의와 경제 발전을 위해 여기저기 도로를 포장하고 길을 내고 자연을 파괴해서 자연재해를 줄이겠다고 강바닥을 헤집게 되었을까? 이토록 비옥한 국토와 천연자원을 가졌고 부지런히 일하는데도 항상 곡소리나는지 알 수가 없다. 아마도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한가지 무능한 정치인들 때문일까? 하긴 우리나라 정치인들만 청렴결백해도 세계 5위의 경제대국이 될 자질이 충분하다고 하지 않은가?

 

  책의 초반부에는 다수 지겹고 또 한편으로는 한심한 이야기들로 가득차 있는 듯 했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흥미로웠다. 그리고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우리의 풍습들도 알게되었다. 물론 지나치게 형식만을 갖춘 부분도 없지 않아있다. 유교가 우리를 지배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만약 우리 나라가 세로로 조금만 더 길어서 외국 문물을 보다 쉽게 접할 수 있었더라면 강대국의 틈바구니 속에서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처럼 위태롭지도 않았을 것이며 남북으로 분단되는 아픔도 겪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이렇게 바라보는데 100년뒤에 지금의 글들을 누군가가 읽는다면 또 어떤 생각이 들까? 지금의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발전된 모습이길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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