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살아계실 때 함께 할 것들
신현림 지음 / 흐름출판 / 2011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고3때 우리 집은 큰 아파트 단지 옆에 슈퍼마켓을 했다. 이름하여 산장슈퍼... 산을 끼고 있어 외진 곳에 위치해서 이웃이라고는 없고 집 바로 앞에는 밭이 있고 옆으로는 산이 있었다. 2층 주택에 위층은 살림을 하였지만 주로 1층에서 밥을 먹고 살림을 하였었다. 날이 어두워지면 혼자서 있기에 무섭다고 하셔서 항상 가게 문을 닫는 시간인 밤 11시에는 어머니와 함께 짐을 정리하고 가게를 정리하였다. 어머니께서는 하루 종일 가게일을 보셔서 개인 시간이 거의 없다보니 1주일에 한두번은 교대를 하였다. 가끔식 가게를 볼 때쯤이면 지겹기도 하였기에 어머니가 언제쯤 오시나 기다리기도 하였다.가게에 물건을 외상으로 받고는 납품업자들로 부터 가끔씩 대금 독촉을 받기 하루 전부터 매상을 따로 모아두었다가 다음날 겨우겨우 처리하고는 주말에 매상이 많은날 자식들 용돈이나 등록금 낼 돈을 마련하곤 하셨다.

 

  이런 어머니가 안따까워 고3 학력고사를 마치고나서 대학입학까지 여유가 있었기에 근처 벽돌 공장에서 벽돌 찍어내는 일도 도왔다. 익숙하지 않은 일을 하는 탓에 많은 일당을 받지는 못하였지만 그래도 우리 가게의 자금줄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다. 동네 슈퍼다보니 취급 물품이 많아 담배와 술에서 부터 오뎅과 같은 반찬거리와 우표까지 없는 것이 거의 없었다. 시내에 가서 조금 싸게 사서 정가에 팔 수 있었기에 돈 몇 푼 벌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10리길을 멀다하지 않고 다녔었다. 그렇게 어려서부터 사회의 쓴맛을 조금이나마 맛보았지만 아직 철이 들기에는 이른 나이였다.

 

  그러던 어느날 설 명절이 다가와서 명절 음식을 준비하느라 방앗간에 가서 참깨를 볶아오라고 어머니께서 주셨다. 역시나 명절을 앞두고 있어 방앗간에는 사람들이 줄을 서있었고 나는 차례를 기다리며 어머니께서 챙겨주신 참깨를 내려놓고는 근처에 오락실과 공원을 전전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지금처럼 스마트폰을 보며서 여유롭게 대기하기에는 너무나 지겨운 시절이었다. 그렇게 몇시간이 지나 해가 뉘역뉘역 질때쯤에 내 차례가 되었고 봉투를 열어보니 참깨 대신 하얀 참쌀이 들어 있었다. 방앗간 주인은 별 생각없이 강정을 만들기 위해 쌀을 튀기러 온 줄 알았고 나도 별 생각없이 바라만 보고 있었다. 1되 정도 되는 찹쌀을 튀겼으니 부피가 몇 배로 부풀어졌음은 굳이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상상이 갈 것이다. 그렇게 하얀 강정 재료를 자전거에 실고 오르막길을 힘겹게 올라가면서 나는 처음에 어머니께서 참깨 얘기하신 것은 오락하느라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강정을 어떻게 만들려고 하시나 하는 생각했다. 때마침 가게에서 아들을 기다리느라 먼발치에서 바라보시던 어머니는 그만 하얀 쌀을 보며 아연질색을 하셨다. 그러고는 나더러 다짜고짜 화를 내시며 '내가 분명히 참깨를 볶아 오라고 시켰는데 이게 뭐냐' 하시며 마구 화를 내셨다. 나는 제대로 설명을 듣지도 않고 그냥 시키는 대로 방앗간에 어렵게 어렵게 다녀온 죄밖에 없는데 너무도 억울했다. 몰라다는 항변에 그러면 전화라도 해볼 것이지 이렇게 생각이 없냐며 열을 올리셨다. 참깨도 볶아야 하는데 그것도 못 볶고 제사때 쓸 찹쌀까지 날라갔으니 이를 어쩌나며... 이왕 엎질러진 물 후회하기 보다 대책을 세워야 하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갈 것을' 하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나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 씌우는 어머니가 너무 미워 나는 저녁도 먹지 않고 2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나는 나대로 2층에서 혼자 책을 보다가 잠깐 누웠는데 그만 잠이 들고 말았다. 어머니는 또 어머니대로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셨으니 맘이 편할리가 없었다. 명절이라 가게 물건도 많았고 밖에 내놓은 것들도 밤에는 모두 가게 안에 집어 넣고 해야하는데 혼자서 다 어떻게 하지 하는 걱정이 앞섰을 것이다. 뒤에 알았지만 어머니께서도 내가 조금만 참을 것을 하는 생각에 후회를 하셨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모질게 몰아세우고서는 다시 내려와서 문 닫는 것 도와달라고 하기에는 미안하셨다고 한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땅거미가 지고 달이 뜨면서 가게 문을 닫을 시간이 되었다. 어머니께서 너무 무거워 상자를 끄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잠이 깨어 신발을 신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얼릉 1층으로 내려왔다. 아니나 다를까 어머니께서 가게 문을 닫으려고 정리하고 계셨다. 나는 괜히 말 했다가 또 혼날 것 같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짐을 들어다가 가게 안으로 집어 넣었다. 어머니도 그때까지는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다. 가게 셔터를 내리려고 하는데 어머니께서 옆에서 도와주시다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는 나와 어머니는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웃고 말았다. 어머니께서는 '웃기는 뭐 잘했다고 웃냐.'라고 하셨지만 평소와 다름없는 온화한 모습이었다. 나도 멋적어서 그냥 웃으며 저녁도 못 먹어 배고프니 얼릉 밥 챙겨달라고 보챘다. 그렇게 93년 설 명절 준비는 시작되었던 것이다.

 

  지금도 그대의 기억이 생생하다. 얼마전에 어머니께서도 그렇다고 하시는 것을 봐서는 모자지간에 통하는게 있는가보다. 그렇게 철없던 아들이 이제는 두 아이의 아빠가 되어 버렸다. 오랜 세월이 흘러도 그때 그 기억 만큼은 잊혀지지가 않는다. 가끔 그때 내가 쌀이 담긴 것을 보고 한번이라도 의심을 했더라면 혹은 어머니께서 잘 챙겨주셨더라면 하는 생각도 들지만 어머니와 아들간의 사랑을 다시 한번 확인하였으니 그것으로 만족한다. 담배값이 오른다고 남들 사재기할때 단골들에게 가격 오르기전에 사라고 있던 재고 모두 소진하시면서 많은 돈 욕심 부리지 않던 어머니. 젊었을 때 자식들과 여행한번 제대로 못다녀 보았지만 어머니께서 좋아하시는 온천이라도 친구분들과 마음 편히 다녀오실 수 있도록 다음 주에 2박 3일 백암 온천 예약해드렸다. 아이처럼 기뻐하시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고 앞으로 이렇게 해드릴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지만 후회하지 않도록 효도를 하면서 어머니와 좋은 추억을 더 많이 만들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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