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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하고 단단하게, 법정의 말 - 내려놓음의 마음 공부 ㅣ 고요하고 단단하게
권민수 엮음 / 리텍콘텐츠 / 2026년 2월
평점 :
대한민국의 50대 가장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쉼 없이 이어지는 풀코스 마라톤을 완주하는 일과 비슷할지 모른다. 가정을 건사해야 한다는 묵직한 책임감 하나로 30대와 40대를 그야말로 앞만 보고 달렸다. 치열한 직장 생활 속에서 내 이름 석 자보다는 '누구의 아빠', '어느 부서의 책임자'라는 타이틀이 더 익숙했던 시간이었다. 그러나 지천명(知天命)의 고개를 넘고 있는 지금, 무조건 높이 오르려던 성취의 계단에서 조금씩 힘을 빼는 법을 배우고 있다. 주말이면 하천변을 따라 뛰고 고요한 풍경을 느껴보는 소박한 취미들이 일상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고요하고 단단하게, 법정의 말』은 바로 이렇게 삶의 여유를 찾아가는 인생의 하프타임에 만난, 단비 같은 책이었다.
'소유'의 트랙에서 내려와 '존재'의 숲길로
이 책은 "비움으로써 나를 나에게로 되돌리는 마음공부"라는 부제처럼, 무소유의 철학을 일상적인 언어로 잔잔하게 풀어낸다. 과거의 나는 더 많은 것을 쥐기 위해 발버둥 쳤다. 회사에서의 돋보이는 성과, 더 나은 보상, 꽉 짜인 목표들. 그것들이 내 삶을 지탱하는 유일한 밧줄인 줄 알았다. 하지만 법정 스님은 "우리는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마음을 쓰게 된다"며 소유의 짐을 내려놓으라 권한다. 일터에서의 강박과 욕심을 조금씩 내려놓는 요즘, 이 말은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꽉 쥐고 있던 주먹을 펴니 오히려 시원한 바람이 손바닥을 스치고 지나간다. 무언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강박 대신 자연의 소리가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준다.
일선에서 한 걸음 물러나며 가장 낯설었던 감정은 '혹여나 뒤처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옅은 불안이었다. 일에 대한 열정이 예전 같지 않음을 느낄 때면, 묘한 허탈감이 찾아오기도 했다. 하지만 글을 읽으며 내가 겪고 있는 변화가 결코 쇠퇴나 체념이 아님을 깨달았다. 표지에 그려진 겹겹의 푸른 산등성이 위로 떠오르는 둥근 달처럼, 삶의 번잡함을 걷어낸 뒤에 찾아오는 '고요함'은 그 자체로 내면이 단단해지는 성숙의 과정이었다. 젊은 시절의 단단함이 부러지지 않기 위해 잔뜩 힘을 준 긴장 상태였다면, 50대에 접어들어 배우는 단단함은 비바람에 자연스럽게 흔들리면서도 뿌리를 깊게 내리는 법을 아는 여유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껍데기의 삶이 아니라, 오롯이 내 마음이 즐거운 일에 집중할 수 있는 힘이 바로 그 고요함에서 나온다는 것을 책장을 넘기며 다시금 확인했다.
법정 스님의 맑은 글귀들은 복잡했던 머릿속을 정갈하게 씻어주는 세신(洗身)의 시간 같았다. 직장 생활의 후반부, 그리고 자녀들의 독립을 서서히 지켜봐야 하는 시점에서 우리는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버려야 할까. 이 책은 삶의 모든 것을 팽개치라는 비현실적인 조언을 하지 않는다. 다만 나 자신을 잃어버릴 만큼 불필요한 과시와 욕망의 배낭을 이고 갈 필요는 없다고 따뜻하게 다독여준다.
책에서는 대단한 성공 비법이나 처세술을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세상의 속도에 발맞추느라 헐떡이는 우리에게 잠시 멈춰 서서 가쁜 숨을 고르라고 말한다. 치열했던 청장년기를 지나, 이제 막 일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자신만의 소박한 취미와 삶의 여유를 가꾸기 시작한 50대 중년 남성들에게 이 책을 곁에 두라 권하고 싶다. 무거웠던 어깨의 짐을 잠시 내려놓고 스님의 맑은 언어들을 마주하다 보면, 어느새 마음 한구석에 외부의 평가에 흔들리지 않는 고요하고 단단한 나만의 작은 암자 하나가 지어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