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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왕관 - 유럽 왕실을 뒤흔든 병의 연대기
여지현 지음 / 히스토리퀸 / 2025년 12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고통의 왕관이라는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왕실이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순수한 혈통이 오히려 그들의 목을 죄는 족쇄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기형적인 주걱턱과 빅토리아 여왕의 후손들에게 퍼진 혈우병을 통해, 권력을 독점하기 위한 근친혼이 어떻게 유전적 재앙을 불러왔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고귀한 피를 섞지 않으려다 결국 스스로 멸망의 길을 자초한 합스부르크가의 이야기는 단순한 의학적 사례를 넘어, 권력욕이 빚어낸 거대한 역사적 아이러니로 다가온다. 순수한 혈통을 지키기 위해 근친상간을 하였는데 그 시절에는 위험성에 대한 인식이 없었기에 특별한 존재인 왕족이 일반인들과 함께 할 수 없는 절대적인 존재라 여겼나 보다. 내가 고민한 문제는 아니지만 외척들을 사전에 견제하려 한 것인지 모르겠다.
책의 시선은 질병을 개인의 비극에 한정하지 않고 역사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변수로 확장한다. 예루살렘의 나병 왕 보두앵 4세의 고통은 십자군 전쟁의 향방을 갈랐고, 조지 3세의 광기는 대영제국의 정치 지형을 뒤흔들었다. 작가는 만약 그들이 건강했다면 우리가 아는 세계지도가 어떻게 달라졌을지 상상하게 만든다. 왕의 기침 소리 하나에 제국의 주가가 폭락하고 후계 구도가 뒤집히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위대한 영웅의 의지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과 결함 있는 유전자일지도 모른다는 서늘한 깨달음을 얻게 된다. 우리가 세균이나 바이러스나 부르는 존재들이 어쩌면 인류의 역사를 바꾸었는지도 모른다. 인류와 오랜 세월 함께 했었는데 단지 우리 몸속에서 기생만 한 것이 아니라 역사 속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상적인 점은 당시의 의학 수준이 불러온 참극이다. 왕이라는 이유로 당대 최고의 의사들에게 치료받았지만, 그 '최고의 치료'란 종종 수은을 바르거나 피를 뽑는 고문에 가까운 행위였다. 평민이었다면 자연 치유되었을 병도 왕이었기에 더 고통스럽게 앓아야 했던 그들의 아이러니한 운명은 현대 의학의 혜택을 누리는 독자들에게 묘한 안도감과 연민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조선시대 왕들은 종기로 많이 사망을 하였다는데 왕의 몸에 감히 칼을 델 수가 없어 수술을 못해서 생긴 문제라고 들었다. 과학이 발달한 오늘날 보면 어처구니가 없지만 이런 역사를 거치며 인류는 발전하였는지 모르겠다.
역사를 승자의 기록이 아닌, 생존을 위한 처절한 투쟁의 기록으로 다시 읽고 싶은 이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책장을 덮고 나면 절대 권력을 쥐고도 끝내 자신의 육체 하나 마음대로 하지 못했던 그들이, 왕이기 이전에 한 명의 가련한 환자였음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들도 결국은 인간이었고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지만 얼마나 행복하게 혹은 고통스럽게 살았는지는 본인이 아니고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