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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죄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23
이언 매큐언 지음, 한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2월
평점 :
흔히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흔히 멘붕 영화로 불리는 영화들이 있다. 공포영화나 스릴러와 같이 애초에 무서운 것을 포함하는 영화들이 아닌, 죄 없는, 혹은 선량한 남자가 이유 없이 혹은 어처구니없는 오해 혹은 착각으로 모함을 당해 삶이 철저히 파괴되는 이야기다. <속죄>는 그런 영화 중 한자리를 차지하는 영화다. 소설 <속죄>는 영화화가 되었고, 영화를 먼저 접한 사람은 대게 이 영화의 마지막 부분 때문에 가슴이 먹먹해지고 울분을 터트리고는 한다. 나는 영화 채널을 보다가 우연히 영화 <어톤먼트>의 결말 부분을 보게 되었고 꽤 시간이 지난 다음에 소설을 읽었을 때는 결말을 알고 있는 상태였다.
다 읽고 나서 느낀 것은 결말을 안 상태에서 이 소설을 읽는 게 훨씬 좋았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상상력이 풍부한 10대 소녀의 망상이 폭발하는 지점에서 “제발 그만해”라는 외침을 내뱉었고, 로비와 세실리아의 사랑이 더욱 애틋하게 다가왔다. 두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파괴한 어리석은 인간의 이야기는 너무나도 많이 다루어졌고, 나는 브리아오니의 행동을 윤리적으로 판단하기에는 너무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그저 두 사람이 아니 세 사람이 운이 좋지 않았다는 생각만 든다. 때때로 삶은 완벽한 비극을 완성하기도 하니깐…
이 책의 가장 큰 강점은 소설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의 심리와 상황에 대한 과할 정도로 촘촘한 디테일이다. 그 디테일이 초반에는 소설을 읽기 힘들게 만드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중반을 넘어가고 나서는 이 소설의 가장 큰 힘이 된다. 로비가 덩케르크로 후퇴하는 에피소드에서 보여지는 묘사는 웬만한 전쟁소설을 휠씬 능가하는 지점으로 500페이지가 넘는 이 책을 끝까지 읽게 만드는 힘이 있다. 거의 장인에 이른 솜씨이고, 뛰어난 작가가 생애 한번 쓸 수 있는 걸작을 접한 느낌이었다.
이 소설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부분은 로비가 잘못 쓴 편지가 세실리아에게 배달되고 그 결과 두 사람의 사랑이 이루어지는 부분이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하더라도 서로에게 아무 의미도 없었던 두 사람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연인으로 발전한다. 작가는 두 사람의 감정을 세세하게 묘사하는데, 내가 연애를 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아름답고 선명한 묘사였다. 이언 매큐언이라는 작가에게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러한 세세한 묘사는 때로는 전쟁의 비참한 상황을, 죄지은 자의 죄책감을,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의 체념을 묘사한다. 정말 한 작가가 한번 만들까 말까 한 최고의 작품이다.
이 책에서 가장 회자되는 부분은 브라이오니의 ‘속죄’가 진정 윤리적인 행위인지 아니면 그저 비겁한 자기변명에 불가한지를 판단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판단한 유일한 것은 이 책이 내 인생에서 가장 훌륭한 소설 중 하나가 될 것이고 나는 그것을 잊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