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 - 제22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강화길 지음 / 한겨레출판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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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7년 젊은 작가상 수상집에는 좋은 소설들이 많았다. 강화길 작가의 호수-괜찮은 사람도 내가 좋다고 생각한 소설 중 하나였다. 여성의 일상적인 불안을 소재로 추리 소설 적인 플롯을 사용해. 누가누구인지 헷갈리게 하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 소설 뒤의 해설이 내 의견과 비슷해서 흥미롭다는 생각도 들었었다.

 

강화길 작가의 첫 번째 장편 소설인 다른 사람은 한겨레 문학상을 수상한 소설이다. 요즘에는 문학상을 수상한다고 해서 그만큼 책이 잘 팔리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한 번 읽을 소설책을 선택하는 기준으로는 나쁘지 않는 기준이다. 크게는 노벨 문학상이든 일본의 문학상이든 문학상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온 책을 읽고 나쁘다는 생각이 든 적은 별로 없었다.

 

아무래도 지난번에 읽었던, 작가의 소설인 호수-괜찮은 사람과도 자연스럽게 비교하면서 읽게 되었는데, 몇 가지 키워드 적인 측면에서 두 소설은 비슷하게 느껴졌다. 그 키워드들은 호수’, ‘생존자’, ‘애매함등이다. 이 외에도 몇몇 문장이나 장면이 앞서 쓰인 호수-괜찮은 사람에서 보았던 장면이 나오기도 했다.

 

다른 사람의 시작은 주인공인 진아가 트위터에서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찾다가 시작된다. 소설이 시작되기 전에 진아는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직장 상사이자 연인에게 폭행당하고 죽을 뻔 하다가 그를 신고하고 인터넷에 그 일을 올리지만,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동료에 의해서 평소 두 사람의 연애에 있었던 일이 폭로당하고, 인터넷에서는 진아를 옹호하는 사람과 비난하는 사람들 사이에 진흙탕 같은 싸움이 일어나고 그 과정에서 회사에 물의를 일으켰다는이유로 회사를 퇴직하게 된다. 오히려 가해자는 계속해서 회사에서 일을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연출 된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아이러니한 일일까? 작년에 일어난 한샘 여직원 성폭행 사건만 하더라도, 진아가 겪은 일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둘 다 가해자는 피해자의 상사였고, 그 우월적인 지위를 이용해. 사건을 일으켰다. 그 사건이 공론화 되는 과정에서 회사의 대응 또한 비슷하다. 피해자의 행실을 거론하며, 가해자를 두둔한다. 완벽한 인간이 어디에 있는가. 완벽한 피해자는 어디에 있는가. 인간은 누구에게나 단점이 존재하며, 그 사건 자체에서 피해자의 단점은 어떤 점을 미치는가. 자신은 어떤 짓을 하더라도 맞으면 안 되면서. 피해자가 맞을 짓을 했다는 말은 왜 하는가? 진아가 겪은 일은 현재의 한국 사회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서 새롭지도 않다.


그러한 과정에서 진아의 정신은 피폐해지고 진아 스스로는 자신에 대해서 말하는 실체 없는 말을 찾아다니면서,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복기한다. 친구하나 없는 서울에서 자신을 도와주는 사람은 없었다. 결국 매일 방에 있으면서 하루하루 삶을 소모하며 지내고 있다가 한 문장을 발견한다. 자신의 이름이 언급된 그 말은 이렇다. ‘김진아는 거짓말쟁이다. 진공청소기 같은 년그 순간 진아는 12년 전 자신의 대학생 시절을 회상한다. 진공청소기는 그녀의 동기 중 하나인 하유리의 별명이었고 그녀는 12년 전에 교통사고로 죽었다. 진아는 그 트위터의 말의 출처를 찾아서 12년 전 대학생활을 한 전라도의 지방 도시인 안진으로 향한다.

 

소설은 그 지점에서부터 죽은 하유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추적하는 추리소설로 변모한다. 물론 이 소설은 추리를 하는 과정을 즐기기 위해서 만들어진 소설이 아니므로 그 추적의 과정은 투박하고 엉성하다. 과거의 여러 사람의 기억이 맞춰지고 진실의 조각이 하나하나 맞춰진다. 그 맞춰지는 과정이 선사하는 긴장감은 이 소설을 읽어 나가는 하나의 재미이기도 하다.

 

전에 읽은 작가의 소설이 그러했듯이 이 소설이 추구하는 바는 페미니즘이다. 소설의 주인공인 진아는 성폭행 피해자이고 소설에 등장하는 꽤나 많은 수의 인물들이 성폭행 피해자들이다. 작가가 정면으로 비판하고 있는 부분은 준 강간문제로 준 강간이란 성행위를 하는 과정에서 한쪽이 의식이 없거나 상호간의 완벽한 합의가 되지 않았을 때. 한쪽에 의해서 일어나는 경우를 말한다. 앞에서 말한 한샘 여직원 성폭행 사건의 경우에도 이러한 준 강간이란 개념에 의해서 논란이 일어났다. 많은 준 강간사건의 경우. 사건이 일어난 경우에 많은 사람들은 여자들이 왜 적극적으로 의사 표현을 하지 않았는지 비난하고는 한다. 이 소설에서는 그러한 적극적인 의사 표현이 불가능한 상황을 예시로 보여주고 이해하게 해준다.

 

그러나 이 소설이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음에도 그에 그치지 않고 문학적이기도 하다. 그 문학적 인 것의 근원은 바로 이 소설이 추구하는 애매함에 있다. 300페이지가 넘는 이 소설은 각 장에서 다양한 등장인물들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진아의 시점에서 다른 등장인물들을 보고 진아의 생각으로 그들을 평가한다. 다른 인물들의 시점에서 진행될 때는 진아는 본인이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다름은 당연히 부정적인 모습이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작가는 성폭행 피해자인 진아에게 몰릴 수 있는 감정적인 집중을 분산시킨다. 소설에서 진아는 누군가에게는 피해자이지만, 동시에 가해자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가해자로서의 모습은 성폭행 생존자가 된 진아가 죄책감을 가지고 사건을 진행시키는 힘이기도 하다.

 

이 소설에서는 많은 성폭행 생존자들이 등장한다.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재앙에 의해서 한 사람의 생이 망가지고 그러고 나서도 소문이 무서워 스스로 쉬쉬하고, 용기를 내서 싸우려고 해도 도와주는 사람은 별로 없다. 경찰이든 회사든, 남자든 여자든, 결국 서로를 돕는 것은 같은 생존자들뿐이다.

 

‘82년생 김지영을 읽고 많은 충격을 받았지만, 이 소설을 읽고 나서는 더한 충격을 받았다. 개인적은 평가로는 이 소설을 82년생 김지영보다 앞줄에 두고 싶다. 사회를 고발하는 것을 넘어서 문학적인 성취까지 이뤄낸 이 소설을 쓰기 위해서 작가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을지 한 문장 한 문장 읽을 때마다 느껴진다. 부디 계속 소설을 써주었으면 좋겠다. 당신의 다음 소설을 읽을 독자가 기다리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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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하루 - <만약은 없다> 두번째 이야기
남궁인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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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와 내가 처음으로 소설 창작 수업을 들었을 때다. 처음 무슨 소설을 써야 될지 고민 되었던 친구는 자신을 소재로 한, 즉 처음 소설을 써야하는 문예창작과 학생을 소재로 소설을 썼다. 그 소설을 본 동기들은 너무나도 익숙한 친구의 소설에 혹평을 쏟아냈다. 그러나 그 소설을 본 교수님은 이 소설이 문예창작과를 다니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익숙할 지도 모르겠지만, 일반 독자들의 눈에는 특이한 소설로 느낄 것 이라고 격려해주었고, 교수님의 격려는 친구에게 여태까지 글을 쓰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 주었다.

 

맥주를 마시면서 들은 친구의 얘기가 생각난 것은 이 책의 저자가 의사이기 때문이다 의사가 이 책을 읽는다면 평범하게 느낄까. 적어도 내게는 이 책은 평범한 책이 아니었다. 많은 것을 알게 해준 책이었고 많은 것을 이해하게 해준 책이다. 단순히 지식을 얻는 것을 넘어 그 이상, 즉 이해를 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좋은 문학의 조건이다. 본문에서 본인을 의술을 행하는 의사라고 소개하는 작가는, 기록의 의미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는 본인의 의도와는 다르게 하나의 문학을 행했다. 그것은 본인이 겪은 처참한 체험이 만들어낸, 하나의 성취일 것이다. 좋은 문학을 행하는 것을 꿈으로 삼은 나에게 그것은 부러워해야 하는 것일까.

 

이 책은 병원 응급실을 책임지는 의사로서의 경험을 기록한 에세이 집이다. 각 편의 에세이들은 의사로서 환자들을 치료하는 과정과 그 결과를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그 기록은 처참하고 지독하다. 나는 책을 읽다가도 고개를 돌려서 몇 번이나 책을 외면하고 싶었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는 죽음이 가득했다. 그 일관된 죽음의 기록들을 읽으면서 나는 내 뒤로 죽음이 가까이에 있는 듯 한 스산함을 느꼈다.

 

응급실에는 하루에도 수십 명의 환자들이 몰려온다. 사람들은 가벼운 찰과상이나 별것 아닌 이상으로 응급실을 찾아오고는 한다. 그러나 그 중에는 죽어가는 사람들이 찾아오기도 한다. 저자는 의학책에는 죽음을 명확하게 규정한 말이 없다는 말을 한다. 죽음은 존재하지만, 의학은 그 상태를 조금은 늦출 수 있다. 의학적인 처방이 없는 상태에서는 반드시 죽는 사람도 의학적인 처방이 가해진다면, 그 사람은 살수도 있는 것이다. 응급실은 그렇게 죽어가는 사람들의 목숨 줄을 이어서 각 전문의의 수술실에 넣는 역할을 하는 장소다.

 

그리고 사람들은 계속해서 죽어간다. 수술실에 들어가던 들어가지 않던, 의사와 각고의 노력을 행하더라도 사람들은 계속해서 죽어간다. 어떤 사람들은 수술을 받고 살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수술을 받아도 죽는다. 수술실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응급실에서 죽는 사람도 있다. 노인들은 늙고 병들어 죽고, 젊은 사람들은 사고를 당하거나 자살을 해서 죽는다. 어린아이들도 죽는다. 아이들은 장난을 치다가 사고를 당하고, 쓰레기 같은 부모에게 맞아죽고, 태어났을 때부터 가진 희귀한 질병 때문에 죽는다. 죽음의 행진은 계속된다. 우리가 뉴스에서 보는 사고의 결과들이 모이는 곳이 병원이다. 죽음에 얽힌 비극은 이 책속에 너무나도 풍부해서 나는 눈물도 나지 않았다.

 

모든 죽음은 결국에는 원인이 있고 그 원인은 결국에는 사회의 병폐들과도 맞닿아 있다. 불완전한 산업시설 덕분에 살아있는 노동자들이 산채로 태워지고, 무책임한 부모들을 방치한 사회 덕에 아이는 평생 동안 치료되지 않을 장애를 가지게 되었다. 전쟁이 실종된 이 시대에 병원은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전쟁터다. 그리고 응급실은 그 전쟁터의 최전선이다. 그 죽음의 원인은 어떤 것은 죽은 자 스스로의 것이고 어떤 것은 사회의 책임도 존재한다. 그리나 그 책임의 최종적인 책임자는 그들을 살리기 위해서 노력하는 의료진과 구급대원들이다.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실패했을 때. 그들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는다. 그리고 죽음의 원인이 무엇이든 그 결과에 최후의 책임을 지는 그들을 나는 동정한다.

 

이 책을 읽고 나는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책의 저자는 최근에 이국종 교수를 비판한 김종대 의원을 강하게 비판한 적이 있다. 의사 협회는 사퇴까지 하라며 비판했다. 나는 그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김종대 의원은 분명히 얼간이였다. 그를 그 자리까지 가게 만들어준 지식과 신념이 그의 눈을 가리고 그를 대한민국에서 가장 멍청한 사람 중 하나로 만들었다. 나는 많은 의사 지망생들이 성형외과나 치과를 선택한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돈의 문제가 아닌, 한 인간의 목숨을 책임지고 노력한다는 것. 그리고 그 노력이 실패했을 때의 충격과 중압감. 사명감과 소명만이 그것을 감당할 의지를 줄 수 있을까? 나는 자신 할 수 없다.

 

책의 표지 뒤편에 실린 가수 요조의 소개 글은 이 책을 가장 완벽하게 표현한 글이 아닐까 한다. 비극을 목도한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잠시 그것을 외면하는 충동에 시달리고 그러나 잠시 뒤에는 그 비극을 응시할 수밖에 없는 사실에 체념하고 그 비극을 응시한다. 이 책에는 수많은 죽음이 기록되어 있고, 그 죽음은 대게 비극이다. 마음 약한 사람들은 이 책을 읽지 않기를 권하고 싶다. 티비와 영화와 소설 속에서 수많은 죽음을 접하는 우리들이지만, 진실한 죽음의 기록을 눈앞에 두고 슬퍼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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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들어도 좋은 말 - 이석원 이야기 산문집
이석원 지음 / 그책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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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표지에는 많은 정보가 담겨있다. 제목이나 작가의 이름은 이 책이 어떤 책인지에 대한 대략적인 정보가 담겨있다. 어떤 책의 경우에는 제목과 작가 이름마저 작품의 일부로서 작동하기도 한다. 책표지의 그림에는 작품의 분위기를 대략적으로 보여주면서도 독자들이 이 책을 사고 싶게 만들어야 할 편집자의 고뇌가 담겨있다.

 

작가 이름 옆에 쓰인 소설’, ‘장편소설같은 짧은 단어에도 어느 정도의 정보가 담겨있기 마련이다. 단편집은 지음혹은 소설장편소설은 장편소설이라는 말도 정확하게 전달해야 한다. 나 같은 경우에는 장편소설인줄 알고 골라든 책이 알고 보니 단편집인가 했을 경우, 왠지 모르게 방해 받는다는 기분도 느낀다. 일반적인 방식 말고도 역사소설이나 가상소설’ ‘실화소설같은 말이 붙어있으면, 왜 이런 잡스러운 말을 붙였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 그 책들을 조용히 제자리에 돌려놓는다.

 

최근에 이석원 씨의 책인 보통의 존재언제 들어도 좋은 말을 읽었다. 보통의 존재의 경우 평범하게 이석원 산문이라는 말이 써있지만, 언제 들어도 좋은 말에는 이야기산문이라는 낯선 이름이 적혀있었다. 이야기 산문이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소설까지는 아니고 소설 비슷한 이야기를 풀어놓기는 하지만, 소설까지는 아닌 그런 책이라는 말인가. 대충 이런 생각을 했는데, 그 생각은 그대로 맞았다.

 

보통의 존재는 마흔 살이 다 되가는 음악인 이석원 씨가 과거와 현재에 일어난 사건에 자신의 생각을 묻혀서 쓴, 일기장에 나와 있을 만한 글들을 모아놓은 산문집이다. 길지 않은 결혼생활에 대한 감정들, 자신이 과거에 어떤 연애를 했고, 얼마나 돼먹지 않은 삶을 살아왔는지 같은 것들, 한 권의 책까지 낸 사람이 평소에 책을 한권도 책을 읽지 않고, 읽지도 않으면서 서점에 가면 책을 한바구니 가득 산다는 부러운 말도 한다. 이 책은 이석원이라는 사람을 내밀하게 기록한 글들을 모아놓았기에 이 책을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이석원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알게 된다. 본인은 스스로를 한심하다고 여기는 듯하지만, 이 책을 읽은 한 사람의 독자로서 내린 평가는 이석원이라는 개인 혹은 그의 삶은 꽤나 매력적이라는 것이다.

 

언제 들어도 좋은 말은 앞에서 말했듯이 이야기 산문이라는 말에 충실한 책이다. 내용은 이석원이라는 이름의 화자와 매력적인 정신과 여의사의 만남과 연애를 다룬 책이다. 작가의 실명을 그대로 사용했기에 이게 실제로 일어난 일인지 아니면, 작가가 잘 꾸며낸 구라인지 헷갈린다. 소설과 연애 썰 사이에서 교묘하게 줄다리기를 하는데 묘하게 재미있다. 때때로 소설을 읽는 독자는 소설속의 화자가 작가 본인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책의 경우에는 그걸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경우라고 볼 수 있다.

 

언제 들어도 좋은 말은 겉으로는 사십대 작가와 삼십대 여의사의 연애 스토리 정도로 보이지만, 속으로는 앞의 책인 보통의 존재의 변주로서 비슷한 목소리와 생각을 공유한다. 관계에 대한 고민,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고민들, 보통의 존재는 2009년에 출판되었고 6년 후, 언제 들어도 좋은 말이 출판되었다. 6년이라는 시간은 한사람의 고민이나 걱정을 해결하기에는 짧은 시간이었나 보다. 아니 어쩌면 더 골치 아팠을 수도 있다. 보통의 존재의 말미에서 글쓰기라는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 작가는 기뻐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 글쓰기가 가져다주는 고통을 진득하게 경험한다. 희망이 있다고 인생이 쉬워지는 건 아닌 모양이다.

 

P.S 처음 보통의 존재라는 제목을 봤을 때. 나는 그 뜻이 연인이 헤어지고, 시간이 흐르면서 서로의 감정이 서서히 무뎌지고 마침내는 매일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일반적인 사람으로 변하는. 그런 의미인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책에서 나오는 의미보다 내가 멋대로 상상한 의미가 더 낭만적으로 느껴진다.

 

P.S 2 이 책들을 읽고 연달아서 허지웅의 에세이집을 읽었다. 의도한건 아닌데 두 작가의 나이는 엇비슷하고 둘 다 이혼을 한 경력이 있다. 그래서인지 두 작가의 글에는 인간은 홀로 살아간다는 고독감과 관계의 끝을 경험한 시니컬함이 묻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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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 도미노 오늘의 젊은 작가 15
최영건 지음 / 민음사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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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안했던 일을 다시 하려니 이리저리 핑계만 대다가 읽은 지 한참 되는 오늘에서야 글을 쓴다. 문예지를 구독하지 않는 한 젊은 작가를 접하기는 쉽지가 않다. 그나마 이름이 알려진 작가도 전체 소설가에 비하면 아주 한정된 숫자일 뿐이다. 그렇기에 민음사에서 나오는 젊은 작가전이라는 이름의 소설 시리즈의 취지는 좋다고 생각한다. 나 같은 경우에도 이 시리즈를 접하면서 전에는 모르던 작가들을 많이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시리즈의 모든 작품을 좋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개중에는 괜찮은 소설도 있었고, 내 생각을 바꾼 소설도 있었으며, 읽고 내가 뭘 읽은 거지 하고 의문스러운 소설도 있었다. 이번에 읽은 <공기 도미노>의 경우에는 읽고 나서 느낀 감정은 앞의 감상 중 세 번째의 것이었다. 책을 읽는 중에 내용이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아서 뒷부분을 다시 읽기도 해서 짧은 분량의 소설임에도 읽는 시간이 꽤나 많이 들여야 했다. 아니 사실은 읽기가 싫었다. 분량이 짧았기에 다 읽을 수 있었을 뿐. 분량이 이것보다 많았다면, 읽는 것을 포기했을 지도 모르겠다.

 

책의 표지에 장편소설이라고 적혀있기는 하지만 사실 그런 말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연작 소설에 가깝다. 여섯 장으로 나눠진 소설은 각 장에 새로 등장하는 인물들이 있고, 소설의 시점 또한 그들의 시점으로 바뀐다. ‘연주라는 등장인물과 멀거나 혹은 가깝게 관련 되어 있는 것을 제외한다면, 각장의 스토리는 서로가 별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1장은 연주가 할머니의 애인을 데리러 갔다가 애인의 가족의 불행한 가정사를 목격하는 내용이고 2장에서는 뜬금없이 연주가 운영하는 카페의 알바생이 카페에서 밀회를 하다 카페를 탈출하는 내용이다. 3장에서는 불륜을 하는 요가 강사를 욕하러 고향의 친구 엄마가 찾아가는 드라마에서 나오는 작위적인 내용이다. 4장은 연주의 할머니가 5장에서는 4장에 나온 연주의 남자친구의 아는 형이다. 6장에서는 1장에서 등장하는 부잣집 사모님이 다시 등장한다. 연주라는 인물의 가정사에 가깝거나 멀게나마 관련된 것이 아니라면, 각각의 장이 미완된 단편 소설이라고 할 정도로 내용들이 상이하고, 소설로서의 유기성이 부족하게 느껴졌다.

 

또 각장이 시작될 때. 몇 문단 정도 장면을 묘사하는 부분이 있다. 그런데 그 한 문단 안에 너무 많은 문장이 들어가 있어서 장면을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한다기 보다는 문장의 어색함이 느껴졌다. 특히 3장의 첫 번째 문단이 그렇다. 그중에서 가장 어색한 것은 소설의 관찰자적 시점이 보여주는 전능함이다. 단순히 등장인물들의 생각이나 행동을 넘어서 그들의 삶을 평가하고, ‘이들은 어떤 사람이다라는 것을 적시하는 몇몇 부분은 미숙하게 느껴졌다.

 

200페이지도 안 되는 짧은 소설 안에 열 명이 넘는 등장인물이 등장한다. 독자가 그 인물이 누구라는 것을 인지하기도 전에 작가는 문장을 통해서 그들이 누구인지를 모두 적시한다. 이런 부분이 너무 많은 등장인물이 등장하는 것을 인지하고 작가가 취한 조치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부분 때문인지 나는 이 소설이 무슨 말을 하고 그들의 행동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이해하거나 평가 할 수 없었다. 새로 등장인물이 등장하고 그들이 행동을 하지만,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원래 소설을 읽고 나서는 뒤에 실려 있고는 하는 비평가의 글을 읽지 않는 편이지만, 이 소설 같은 경우에는 소설이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아서 읽어보았다. 그제 서야 이 소설이 무엇을 썼는지 조금 감이 잡혔다. 하지만 비평가의 글을 읽고 서야 이해된다니. 어떤 소설의 비평을 하는 일을 필요는 하지만, 책을 읽는 데는 중요하지 않는 요소로 여기는 나로서는 이 책의 뒤편에 실린 비평이 이 소설의 설명서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가전제품을 사용하기 위해서 설명서를 읽는 것처럼. 비평이 하나의 의견이 아닌 소설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소설. 이런 소설을 나는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하는가.

 

어떤 소설이든 그 소설 안에는 작가가 하고자 하는 말이 담겨있다. 그 말은 대놓고 보이기도 하고 배배꼬아나서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안 될 때도 있다. 이 소설에서 말하는 말은 무엇일까. 한 가족의 비극적인 가족사와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인간군상? 그러나 이 소설에서 연주의 비극은 그렇게 비극적이지도 않고. 주변의 인간들은 작위적인 설정과 상황들로 채워져 있어. 인간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히스테릭한 등장인물과 그에 휘둘리는 등장인물들이 보일 뿐이다. 차라리 이 소설이 미완의 작품이라면 나는 더 나은 평가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완성되었고 책의 형태로 세상에 나왔다. 이 소설에서 하는 말을 듣기위해서 13000원이라는 돈과 책을 읽는 몇 시간의 시간을 들어야 하는가? 이 소설을 읽는 독자로서 나는 아니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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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USALON 2017-11-15 08: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설보다 더 재밌는 리뷰였습니다.
 
아몬드 (양장) - 제10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손원평 지음 / 창비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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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조금 실망한 정도가 아니라 많이 실망스러웠다. 차라리 처음부터 별로인 소설이었다면, 책장을 덮으면 그만이었을 탠데, 이 소설의 첫 장은 내가 읽었던 어떤 소설보다도 강렬했다. 이 책의 첫 장을 펼쳤을 때는 하루의 볼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이었다. 소설의 도입부는 하루 종일 쌓아올린 피곤함이 날아갈 정도로 강렬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첫인상에도 뒷장으로 갈수록 이야기는 점점 실망스러워져갔다. 그 이유는 이 소설이 청소년 소설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 한 것. 두 번째는 작가가 등장인물에 너무 많은 연민을 느낀 것이 문제였다고 생각한다. 그 점은 또 다른 청소년 소설인 위저드 베이커리와도 다른 점이다.


소설의 주인공인 윤재는 태어날 때부터 뇌의 이상이 있어서 알렉시타미아증후군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 증후군의 증상은 타인과의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것. 쉽게 말해서 감정을 가지지 않는 것이다. 사랑도, 슬픔도, 느끼지 않는다. 감정이 없기에 아무리 충격적인 일이 일어나도 아무 느낌도 느낄 수 없다. 사이코패스와 같은 말로도 들리지만, 사이코패스는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 남을 해치는데, 주저하지 않는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윤재의 경우에는 무엇을 가지고 싶다는 욕망마저 없으니 사이코패스와는 다른 유형의 인간이다. 적어도 괴물은 아니다.


윤재의 부모 중 아버지는 예전에 사고로 죽었고, 엄마와 할머니의 손으로 자란다. 윤재가 정상적인 아이는 아니기에 그에 맞춰서 두 사람은 유별나게 윤재를 훈련시킨다. 사소한 문제는 계속 생겼지만, 그럼에도 세 사람은 나름 잘 살아나간다. 엄마와 할머니는 사랑을 윤재에게 주고, 가르친다물론 윤재에게 그것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가만히 그가 어른이 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만, 그들 가족에게 여지없이 시련이 찾아온다. 윤재는 그 모든 시련을 아무런 느낌 없이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이 책을 읽으면서 예전에 읽었던 일본소설인 편의점 인간과 비슷한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캐릭터도 비슷하다. 편의점 인간의 주인공인 후루쿠라도 타인과의 공감능력이 결여된 인간으로 등장한다. 그녀의 경우에는 편의점에 소속됨으로서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한다. 온전한 인간은 아니지만, 나름의 방식으로 사회에 적응한 형태다.


윤재가 소설 속의 사건을 겪지 않고 자라난다면, 그녀와 비슷한 모습일까. 그러나 윤재의 가족과 주변 사람들은 어떻게든 그를 따뜻하게 지켜주고 자라나게 도와준다. 파국으로 끝난 <편의점 인간>과는 다른 결말이 기다린다.


그리고 보니 소설의 구조도 비슷하다. 초반 50페이지 정도는 주요캐릭터의 토대를 쌓은 뒤, 그 뒤에 본격적인 이야기를 전개한다. <아몬드>의 경우에는 매력적인 등장인물이 많이 등장해 초반까지는 <편의점 인간>보다 더 재미있다고 느꼈다. 그러나 후반부는 글쎄


작가는 소설 속에서 등장인물에게 절대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다. 거의 신에 가까운 힘을 가지고 있는데, 그 힘을 어떻게 사용할 지는 작가의 마음이다. 그 힘을 적절히 사용함에 따라서 그 소설이 희극이 되기도 하고 비극이 되기도 한다. 좋은 소설에서는 이러한 힘의 사용이 티나지 않는다. 마치 등장인물들의 운명에 따라 움직이는 듯. 자연스럽게 행동하고 생각한다.(이것을 잘하는 작가가 스티븐 킹이다) 그러나 그러지 못한 경우에는 어색하고 도대체 왜 이들이 이런 일을 겪을까. 이상하게 생각된다.


이 소설의 경우에는 작가가 과도하게 힘을 휘둘러 소설의 완성도를 해친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소설에서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은 가족을 상실하거나 감당할 수 없는 시련 앞에 놓인 경우가 많다. 작가가 그들에게 연민을 느껴서 좋은 결말을 만들어 주려고 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데우스 엑스 마키나마냥 느닷없이 일어나는 건 안 될 일이다. 그 덕분에 책장을 덮고 나서 할 말을 잃었다. 아침 7시쯤 방송하는 드라마를 본 듯한 느낌이었다.


스티븐 킹의 작법서인 유혹하는 글쓰기에서 자기는 재능이 하나도 없고 그저 상황 속에 인물들을 내버려 놓는 다는 말을 써놨을 때. 천재의 재수 없는 겸손함 정도로 생각했는데, 작가가 상황에 자주 개입하는 소설을 보니 그 말이 조금은 이해되었다.


나는 소설을 읽을 때. 소설 속의 인물들에게 감정을 이입 하지 않는다. 그것보다는 소설의 문장, 문체, 이야기가 얼마나 짜임새 있고 그 안에서 이야기가 어떤 메시지를 만드는 가 그런 것들을 본다. 이 소설은 작가가 등장인물들에게 지나치게 감정을 이입한 덕에 그런 것들이 철저히 파괴되었다. 앞부분의 장점들도 뒷부분의 뻔한 결말이 모두 망친 케이스다. 역시 결말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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