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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결코 어머니가 없었다 - 엄마와 딸의 공동 회고록
하재영 지음 / 휴머니스트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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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이야기가 죄책감에 대한 회고로서 고해성사의 성격을 띠는 것은 우리가 단일한 모성 신화의 세계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 신화의 세계에서 엄마는 언제나아이를 사랑하고 헌신하고 희생한다. 그곳에는 미워하는 어머니도, 실패하는 어머니도 없다. (p.128)

 

어머니를 비롯해 비출산 여성, 다양한 성 정체성과 성적 지향과 가족 형태를 가진 사람이 모성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우리는 경험적 모성만이 아니라 정치적 이데올로기로서, 역사적 문화적 맥락으로서, 제도와 정책으로서 모성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모성에 덧씌워진 신화를 걷어낼 때 우리는 자신과 어머니에 대해 더 많은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p.132)

 

여성이라면, 엄마라면 하면서 모성의 신화를 거들먹거리는 사람들을 보면 마치 죄인이 된 듯 싶었는데 우리는 이 신화에서 벗어나야 함을 통쾌하게 밝혀준다.


어떻게 자존감을 지킬 수 있었어?” 라고 묻자 엄마는 책을 읽으면서.”라고 대답했다. 그 말은 나에게 일종의 경구다. 열렬히 읽는 삶이 그녀를 그녀이게 했다면, 읽고 쓰는 사람으로 사는 한 타인이 나를 훼손해도 나는 훼손당하지 않고, 타인이 나를 모욕해도 나는 모욕당하지 않으며, 타인이 나를 소멸시키려 해도 나는 소멸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p.212)

 

책을 읽는 이유가 이처럼 당당하고 멋지다면 안 읽을 이유가 없다. 우리는 훼손당하지 않고 모욕당하지 않으며 소멸하지 않고자 함께 읽어야 한다.

 

 

7월 독서모임 책으로 선정되기 전부터 관심이 가던 책이다. 하재영작가님의 전작인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를 너무 인상 깊게 읽었기에 기대가 컸다.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여성으로 태어나 여성이 짊어져야 했던 것들을 당연시하면서 살아온 세대의 어머니와 현재를 살고 있는 저자와의 대화를 통해 부조리한 다양한 사회현상을 들여다 본다.

엄마라는 여성, 내가 안다고 생각했지만 거의 모르는 엄마에 대해 나는 기록은 커녕 솔직한 대화도 나누지 못했었다. 나를 속박하지도 강하게 규율을 지키라 하지도 않았던 나의 엄마를 떠올리게 하는 이 책이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했다. 이미 대화를 나누지 못하게 된 나의 엄마를 자꾸만 떠올리게 될테니까.

책을 덮으며 나와 엄마, 또 딸로 살아가는 모든 여성들이 나 자신으로 단단하게 일어서기를 응원해 본다.

독서모임의 회원들은 다 여성인데 이 책을 읽고 나눌 토론의 멀티유니버스가 벌써 상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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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누수 일지
김신회 지음 / 여름사람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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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하고 말하지만 나에게 똥은 더럽기도 하지만 무섭기도 한 것. 똥과 거리를 두는 방법은 아예 똥을 생산하지 않는 일일 텐데, 나는 인간이고, 매일 똥을 싼다. 아무리 애써봐도 살면서 똥을 피하기란 쉼지 않다. 인간과 똥은 운명공동체다. (p.56)

 

버거운 문제를 맞닥뜨릴 때마다 결국은 내가 헤쳐나가야 할 일이라는 실감에 몸이 휘청인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더라도 다 나의 일. 내가 중심이 되어 해결하고 견뎌야 한다는 막막함은 분명 자유와는 다른 감각이다. (p.61)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인생 때문에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왜 그런 선택을 했어라는 말만큼 폭력적이고 납작한 말은 없는 것 같다. 과연 우리 중에 인생을 선택해서 살아온 사람이 있는가. 자신도 모르게 그런 인생에 놓여버린 것 아닌가. 그걸 그 사람의 선택이 잘못된 거라고, 또는 선택을 잘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가 신이라도 되는 줄 아나 보지? (p.62)

 

잠을 아껴가며 몇 차례에 걸쳐 퇴고하면서 혹시 빠진 내용은 없는지,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보이지는 않는지, 오타나 비문은 없는지, 여전히 아름다운지 살피고 또 살핀다. (p.80)

 

몰라도 되는 삶은 안락하다. 계획을 실천하며 살 수 있는 일상은 순조롭다. 그런 인생을 잘 굴러가게 한다고 해서 과연 어른일까. 지금껏 알던 세상이 무너졌을 때 잿더미를 털고 일어나, 몰랐던 걸 하나하나 깨치며 단단해지는 게 어른 아닐까. (p.105)

 

나는 글 쓰는 일을 한다는 것에 자부심이 있다. 그건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데서 오는 자부심이다. 직업은 나를 구성하는 많은 것들 중 하나지만, 글 쓰는 일은 곧 나이기도 하다. (p.122)

 

내가 원하는 건 하나다. 내 집에서 불안감 없이 편안히 지내는 것.

그를 위해선 뭘 해야 할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비현실적으로 들리던 선배의 조언이 조금씩 마음에 스민다. ‘이만하면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그냥 보내줬으면 좋겠다.’ (p.165)

 

우리를 지킬 수 있는 건 나밖에 없다는 생각에 전전긍긍했지만, 나는 개를 지키고 싶다는 핑계로 나를 지키고 싶었다. 우리의 일상이 망가지면 가장 힘들어지는 건 나일 테니까. (p.173)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집중해야 할 것은 그럴듯해 보이는 해결책을 찾는 것이 아니라 나는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원하는지를 바로 보는 것이다. (p.178)

 

내가 늘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던 이유는 좋은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가짜가 더 진짜 같은 것처럼, 애써 좋은 사람인 척하며 살아왔을 뿐이다. 앞으로도 나는 온갖 모순과 위선을 정리 안 되는 짐처럼 끌어안고 살아갈 것이다. (p.199)

 

나는 여전히 글이 사람을 살릴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의미 있는 글을 쓰고 있다고도 생각 안 한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의미 따위를 고민하느라 꼴값을 떨었지만 역시 글쓰기는 재미로 하는 것. 나는 재미가 있어야 쓰고, 재미를 느껴야 사는 사람이다.

내 글이 사람을 살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쓰다 보니 적어도 나는 살았다. (p.200)

 

 

3번의 누수를 겪였던 나는 이 책을 보자마자 집지 않을 수 없었다. 누수로 인해 에어비앤비 신세까지 지면서 4가족이 고생한 걸 떠올리게 했고 사실 다른 집 누수 피해의 상황도 좀 궁금했다. 솔직한 입담의 작가님 글 속에서 나는 순간순간 뜨끔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문제가 생겼을 때 회피하는 유형 바로 나. (p.53) 상한 냄비에 뚜껑 덮고 치워버리기까지 할 사람이 바로 나다. 또 내가 늘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던 이유는 좋은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 (p.199) 이라는 글에서도 끄덕끄덕. 아름다운 내용증명도. 에 대한 이야기는 어떠한가. 혼자 읽기는 아까워 남편에게 읽어주기까지 했다. 누수의 발생부터 해결까지 유머가 살아있는 과연 재미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살면서 문제가 생겼을 때 당신은 어떻게 대처하는가. 적극적으로 해결하려 애쓰는가 아니면 최대한 열심히 도망치는가. 나로 말할 것 같으면 후자다. 냄비에 상한 찌개가 있는데, 그걸 처리할 엄두가 안 나면 뚜껑을 덮으면 된다. 그러라고 뚜껑이 있는 것이다. 나는 인생에 크고 작은 뚜껑이 엄청 많아서 이건 이 뚜껑으로 덮고 저건 더 뚜껑으로 막으면서 살아왔다. - 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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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할 자격 - 게으르고 불안정하며 늙고 의지 없는… ‘나쁜 노동자’들이 말하는 노동의 자격
희정 지음 / 갈라파고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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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누구나 반드시 획득해야만 하는 ‘(정상) 노동자’란 위치가 얼마나 비현실적인 자격을 요구하고 있는지를 밝힌다. 사회에서 통용되는 ‘노동자성’에서 미끄러졌거나 이를 거부하는 사람들, 즉 열정적이고 자기관리에 능통한 청년이 될 수 없는 사람들, 정숙한 현모가 될 수 없는 여자들, 건강한 몸과 건강한 정신을 갖출 수 없는 사람들, 더는 젊음을 흉내 낼 수 없는 사람들, 게으름뱅이, 낙오자들...(로 낙인찍힌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비추어 본다. (책날개소개글)

우리는 지금 어떤 노동을 하며 살아가는가?

노동자란 누구이며 세상은 왜 그것을 규정하는가? (책날개 발췌)

낙인이라는 채찍질 앞에 선 노동자가 어떤 노력 끝에 ‘노동자 되기’를 이루는지 또는 어떤 과정을 통해 그 ‘되기’를 포기하는지, 그것을 볼 수 있다면 우리가 지금 어떤 노동을 하고 있는지, 아니 어떤 노동을 해야 하는지 조금은 더 말할 거리가 생길 것이다. 그래서 이 책에선 ‘좋은 노동자’가 될 자격을 박탈당하거나 ‘좋은 노동자 되기’를 일정하게 포기한 이들을 기록한다. (p.12)

“그 안에서 나는 뭔가 계속 열심히 해야 하고, 그걸 입증해야 한다는 게, ‘여러분 나를 믿어주세요’ 이런 걸 계속해야 한다는 게 너무 스트레스였어요. 전 어설프거든요. (중략) (p.25)

그러던 어느날 ‘몫’이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다 ‘여럿으로 나누어 가지는 각 부분’이라는 뜻풀이를 알게 되었다. 우리 사회는 몫이란 말을 한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 그가 홀로 갖추고 짊어져야 할 책임이란 의미로 이야기하지만, 몫이라는 것은 애초에 개별로 존재할 수가 없는 개념이었다. (p.52)

모두가 자신(자신이 보낸 시간)의 의미를 그렇게 증명한다. ‘내가 되기’ 위해서는 가만있을 수 없다. (p.54)

우리가 언젠가 백수가 된다면, 필요한 것은 백수가 되지 않는 법이 아니라 백수로 잘 지내는 훈련이 아닐까. 백수로 지내도 괜찮은 사회를 꿈꿀 순 없는 걸까.(p.69)

낙인의 특성은 사람을 가둔다는 것이다. 옴짝달싹을 못하게 한다. 무엇을 하든 ‘네가 이렇기 때문에...’로 회귀시키는 놀라운 관성이 있다. (p.85)

이 사회에서 누군가 온전히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자원의 대부분은 왜 ‘가족’에서 나와야 하는가. 안정적인 가족이 없다는 말은 왜 모든 자원을 박탈당했다는 말과 동의어가 되어야 하나. (p.115)

힘들다고 피곤하다고 마음이 안 좋다고 일을 쉬면 ‘일할 자격’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있었다. (p.128)

우울할 수밖에 없는 사회이다. 따로 조사를 하지 않아도 우리는 우리가 왜 우울한지 안다. 하지만 모두가 우울증을 겪는 것은 아니었다. 우울하지 않을 수 없는 사회라고 이야기해도, 이 말은 우울하지 않은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힘을 잃는다. (p.134)

‘언제까지 약을 먹고 출근해야 할까?’ 답을 구할 수 없는 물음을 들으며 나는 살짝 다른 생각을 했다. ‘언제까지 출근하기 위해 약을 먹어야 할까?’ 넘어져도 주저앉을 줄 모르고 약봉지를 든 두 팔을 앞뒤로 흔들며 걸어간 그곳에는 직장이 있었다. (p.135)

1년에 80만 명이 항상 불안해서 힘들다고 한다. 원인은 알 수 없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늘 불안할 것을 요구받지 않나? 우리가 불안하지 않다면 이토록 많은 자기계발서가 팔릴 리 없다. 자기계발서는 우리에게 안주하지 말라고 한다. 제대로 하고 있는지 의심하라고 한다. 그 ‘제대로’의 기준은 자꾸만 높아진다.

덕분에 자기계발서의 주 독자층인 20대가 우울증과 불안장애를 겪는 비율이 늘고 있다. (p.140)

우리의 일터가 원하는 것이 ‘정상성’이라는 것도 착각이겠다. 기업이 진실로 원하는 것은, ‘정상성’의 추구에 갇혀 스스로를 검열하는, 기업이 시간과 비용을 투자할 필요가 없는 값싼 몸이다. (p.160)

“남 좋은 일이지. 나한테는 좋은 게 하나도 없어. 그러니까 지금 너무 허무해. 부서 옮기고 나선 대충 하려고 했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 또 열심히 하게 되어 버렸어. ” (p.162)

실제로 많은 ADHD 직장인이 주말에는 약을 먹지 않는다고 했다. 집중력을 높이고, 일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사람들의 말을 기억해야 할 필요가 없는 휴일에는 약을 먹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연료 첨가제가 따로 없다. (p.174)

노동에 걸맞지 않은 인간이 있는 것이 아니라, 과도한 집중력과 업무 내용의 빠른 전환을 요구하는 노동환경이 어디에도 집중할 수 없는 인간형을 만든다. 그럴수록 그런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특정 자질이 능력으로 추켜올려지고, 그렇지 못한 사람을 가르는 범주가 엄격해진다는 것. 우리가 이토록 우선순위를 정하는데 목을 매는 이유는 시간 활용 (효율) 압박이 있기 때문이다. (p.177)

“몸은 한 번도 ‘결과’였던 적이 없다.” 적지 않은 여성들에게 지금의 몸은 나의 몸이 아니다. 나의 몸은 앞으로 만들어갈 더 ‘합당하고 적합한’ 몸이었다. (p.232)

바쁨은 능력의 다른 이름이었다. 이 책의 3장에서 말했듯이,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요소가 ‘노력’밖에 없는 여성들이 있다. 그런데 노력마저 증명이 필요했다. 자신의 노력을 증명하기 위해 ‘쇼잉’을 한다. (pp.235~236)

우리는 다른 세상을 꿈꾸기에 1급을 선별하고 1등 국민을 만드는 위계의 질서를 거부한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말할 자격을 박탈하는 시선을 뚫고 이야기한다. 이 행위들이 ‘일의 세계 안에서 나다움을 지키며 타인과 함께 일할 수 있는 우리의 오롯한 권리’를 가져올 것이라 믿으면서. (p.270)

이 사회가 지닌 노동의 환상에 잡아먹히고 싶지 않았다. 내 안에 자리 잡은 환상을 거울삼아, 일하는 이들을 비춰 보았다. 건강과 성실, 의지와 통제라는 환상에 촉촉이 젖은 몸으로 그 환상을 직면한다. 내가 어떤 세상에서 누구로 노동을 하고 있는지를. (p.281)

지금까지 차별이라고 느끼지 못했던 부분까지도 콕! 집어주는 책이다. 시장에서 요구하는 노동자의 자격들을 읽으며 그동안 이유 없이 답답했던 것이 조금이나마 해소가 되었다. 내가 이상했던 것이 아니라 이 사회가 잘못됐다는 걸. 잘못된 것이 그대로 용인되어 온 것이 지금이 아닐까? 나는 지금 어떤 노동을 하고 있는지 깊이 생각해 보게 한다. ‘일의 세계 안에서 나다움을 지키며 타인과 함께 일할 수 있는 우리의 오롯한 권리’(p.270)가 누구에게나 실현되는 날이 어서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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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 아이 꿈꾸는돌 36
이희영 지음 / 돌베개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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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은 온통 붉은색이었다. 바람이 유순해 파도조차 게으르게 철썩이던 날이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화창했다. 어디를 둘러봐도 새파란 세상 속에서 오직 한곳만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p.7) 프롤로그

 

소금 바람은, 사람들의 기억까지 차곡차곡 염장해 두었다가 그 축축하고 시큼한 것을 엉뚱한 곳에서 불쑥 꺼내 놓았다. (p.25)

 

살아가는데, 침묵은 애무 유용했다. 이수는 그 사실을 몇 번의 경험으로 배웠다. 상대를 위해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는 더더욱 입을 닫는 편이 좋았다. (p.42)

 

만약 그날 할머니가 집에 오지 않았다면, 술에 취한 남자가 갑자기 들이닥치지 않았다면, 주방 싱크대 서랍에 얌전히 잠들어 있던 칼을 녹슬게 내버려 뒀더라면, 차라리 칼 가는 장영감한테 맡겼다면, 엄마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할머니 역시 퍼렇게 날 서 있는 그 칼로 ...... 자신의 아들을 찌르지 않았을 것이다. (p.94)

 

너 나랑 가자.’

다시 만난 할머니의 첫마디였다. 이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떠난다는 건 어쨌든 이곳에서 사라진다는 의미였으니까. (p.98)

 

아들과 여자는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이제 남은 건 어린아이뿐이었다. 아들을 잃은 어머니는 자신의 손으로 그 아이를 거뒀다. 섬이 들썩이는 선, 태풍과 풍랑주의보 때문만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떠들썩했던 뒷말들은 파도처럼 끊임없이 밀려갔다 밀려왔다. 시간이 지날수록 산산이 부서져 섬 주변을 맴돌았다.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p.100)

 

결국 깨닫게 되었다. 슬퍼하거나 서운해하기보다, 이 모든 일에 무감각해지는 편이 휠씬 낫다는 사실을. 그건 이수가 터득한 기본적인 생존 법칙이었다. 처음부터 아무것도 갖지 않은 사람은, 상실감도 느낄 수 없었다. (p.108)

 

아들이 죽인 여자의 피붙이, 엄마를 죽인 남자의 어머니, 둘의 만남에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지독한 악연이라고. 할머니가 어린아이를 상대로 괜한 분풀이를 할 거라 넘겨짚었다. 아직 어린 이수를 걱정했고, 키워 봤자 또 다른 망나니가 될 거라며 할머니를 염려했다. 그러나 지난 5년간 두 사람 모두 조용했다. 한차례 폭풍이 지나가면 바다는 거짓말처럼 잔잔해졌다. (p.139)

 

내 기억력이 좋은가?’ 이수는 마음속으로 도리질 쳤다.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잊어버리고, 대신 엉뚱한 생각들로 머릿속을 가득 채워 버렸다. 어쩌면 그렇게 하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대체 무엇을 위해, 아니 무엇을 지우기 위해. (p154)

 

샀는데 막상 아니다 싶으면 반품하잖아. 인생도 반품하고 싶을 때가 있겠지. 나는 엄마 아빠 이해해. 이왕이면 구매에 좀 신중하지. 그럼 괜한 헛수고 안했을 텐데.” (p.156)

 

막대 사탕 따위 꼬마들만 먹는 줄 알았는데, 자꾸 먹다 보니 묘하게 중독되었다. 익숙해진 것은 사탕의 달콤함뿐만이 아니었다. 누군가와 함께하는 시간은 그보다 더 달았다. (p.161)

 

일주일에 한 번 주던 관심이 한 달에 한두 번으로 바뀌었다. 그마저도 서서히 거둬들였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선인장은 자랐고, 가시는 더 뾰족하고 단단해졌다. (p.162)

 

 

가끔 그런 날이 있어. 온 우주가 나 하나 잘못되기를 기원하는 날. 단순히 운이 없거나 재수가 없다는 말로 부족한....... 신이 작정하고 나는 파괴하려는 날 말이야.” (p.169)

 

따뜻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가정에서 외롭게 자란 아이 세아. 이모님과 지유에게 따뜻함을 느꼈던 짧은 시간이 지나고, 돌이킬 수 없는 사건으로 더 깊은 상처를 받은 채 이수가 있는 학교까지 전학을 오게 된다.

 

초침은 심 없이 움직이는데, 이상하게 새벽이 올 것 같지 않았다. 이수와 할머니 두 사람 모두 영원한 밤에 갇혀 버렸다. (p.201)

 

 

심연 깊숙이 가라앉았던 것들이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갑자기 찾아오는 공황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진정 두려워했던 것, 결코 꺼내 보려 하지 않았던 진실의 민낯과 드디어 마주했다. 할머니가 가슴에 묻어 두었던 비밀과도. (p.205)

 

청소년 소설을 읽으면 나는 그 시절의 나를 자꾸 생각하게 된다.

고등학교 시절 부모님의 이혼으로 재혼가정에서 지냈는데 우울했던 것밖에는 기억에 남은 것이 없다. 그런데 그 시절의 기억을 떠올려 보면 동생은 기억하는데 나는 기억하지 못 하는 것이 많다. 나는 생각한다. 그 기억들을 봉인하고 열어보고 싶지 않은거라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거라고. 나는 아직 마주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왠지 그 시절의 나를 마주하면 나를 불행하게 한 사람을 용서해야 할 까봐 나는 아직도 두렵다.

 

아줌마와 할머니, 그리고 이수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다. 하지만 유일하게 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였다. 가족은 그런 사람들이라고 이수는 생각했다. (p.214)

 

함께 살아서 가족이 아니라 서로를 보듬고 진정으로 배려하는 사람이 가족이라는 생각이 든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여서 괴로워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너무나도 많이 넘쳐나고 있다. 진정한 가족은 무엇일까.

 

할머니는 결국 하나의 섬이 되었다. 그렇게 진실을 가슴에 묻었다. 비록 우연한 사고라 해도, 칼에 찔린 건 당신의 아들이었다. 그럼에도 죄를 묻기보다, 오히려 그 아이의 손을 내밀어 주었다. 그 어린 것 역시 명백한 피해자라 생각했을까? (p.219)

 

 

바다 한가운데 커다란 눈꽃이 피어났다. 구름이 낮게 깔린 잿빛 하늘에서 사락사락 눈이 내렸다. 그 눈송이가 바다에 떨어져 소금이 되었다. 세상에 소금이 내렸다. 차갑게 언 마음을 녹이려. 소중한 추억을 잊지 않도록 그렇게 짭쪼름한 눈을 퍼부었다. 그것은 어쩌면 누군가의 마음인지도 몰랐다. 무르지 않도록, 상하지 않도록, 꼭꼭 감싸서 지켜 주고 싶은 간절함. (p.227) 에필로그

 

섬마을에서 할머니와 사는 아이 이수, 어느 날 이수가 다니는 학교로 전학 온 아이 세아.

이 두 아이의 깊은 내면의 상처가 책을 읽는 내내 가슴을 아프게 한다. 여리지만 단단한 마음으로 두 아이는 서로에게 기대어 줄 등이 되어준다. 책 속에 인간에게 받은 상처가 가장 아프고, 인간에게서 받은 위로가 가장 따듯하다’ (p.228) 고 작가는 말한다. 그러하다. 한 사람의 어른으로서 더이상 아이들이 상처받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간절히 들게 하는 소설이다. 지금 내 옆의 아이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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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이야기
임경선 지음 / 토스트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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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에서 한 달 살기

광활한 로비의 카펫을 천천히 꾹꾹 밟으며 두리는 과거의 영광과 자존심은 여전히 포기 못 하면서도 이제는 끝을 받아들인 자들이 가지는 어떤 숙연한 공기를 감지했다. (p.22)

 

아쉽죠. 하지만 이래도 돼요. 변질될 바에는 차라리 존재를 지워버리고 싶은 마음이요. 이곳만큼은 바깥세상과 다른 속도로 시간이 흘러갔거든요.”( p.29)

 

-하우스키핑

이해 ...... 사람들은 항시 누군가로부터 이해받고 싶어했다. 그리고 때로는 용서를 구해야 할 상대에게 이렇게 터무니없는 이해를 구하기도 했다. (p.105)

분명히 이해해주실 거야.’(p.110)

 

-야간 근무

메리 올리버의 <블랙워터 숲에서> 시구를 잊지 않고 떠올렸다.

 

강 건너편에는 우리가 영원히 그 의미를 알지 못할 구원이 있지.

이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세 가지를 할 수 있어야만 하지.

유한한 생명을 사랑하기.

자신의 삶이 그것에 달려 있음을 알고 그걸 끌어안기.

그리고 놓아줄 때가 되면 놓아주기 (p.159)

 

-초대받지 못한 사람

“......아무런 접점이 없어서 좋았던 거예요.”

.......”

아무런 접점은 없지만 상우 님과 저는 실은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저는 저와 같은 유형의 사람을 잘 알아보는 편이에요. 타인에게 이해받으려고 애쓰기보다 많은 것들을 혼자 어떻게든 집어삼키는 유형의 인간들이죠. 전혀 다른 일을 하고 있더라도 그런 사람들끼리는 말없이도 통하는 게 있다고 생각해요. 나이가 들어서 그런 사람을 만나는 건 귀하고 감사한 일이고요.” (p.191)


호텔이야기를 읽고 나니 극장에 앉아 독립 영화를 본 것 같다. 진짜 있는 이야기들을 담담한 시선으로 다룬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호텔이라는 장소를 중심으로 여러 인간 군상들의 모습으로, 혹은 제자리를 묵묵히 지키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올 여름 호텔 로비에 앉아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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