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의 누수 일지
김신회 지음 / 여름사람 / 2023년 6월
평점 :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하고 말하지만 나에게 똥은 더럽기도 하지만 무섭기도 한 것. 똥과 거리를 두는 방법은 아예 똥을 생산하지 않는 일일 텐데, 나는 인간이고, 매일 똥을 … 싼다. 아무리 애써봐도 살면서 똥을 피하기란 쉼지 않다. 인간과 똥은 운명공동체다. (p.56)
버거운 문제를 맞닥뜨릴 때마다 ‘결국은 내가 헤쳐나가야 할 일’이라는 실감에 몸이 휘청인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더라도 다 나의 일. 내가 중심이 되어 해결하고 견뎌야 한다는 막막함은 분명 ‘자유’와는 다른 감각이다. (p.61)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인생 때문에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왜 그런 선택을 했어’라는 말만큼 폭력적이고 납작한 말은 없는 것 같다. 과연 우리 중에 인생을 선택해서 살아온 사람이 있는가. 자신도 모르게 그런 인생에 놓여버린 것 아닌가. 그걸 그 사람의 선택이 잘못된 거라고, 또는 선택을 잘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가 신이라도 되는 줄 아나 보지? (p.62)
잠을 아껴가며 몇 차례에 걸쳐 퇴고하면서 혹시 빠진 내용은 없는지,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보이지는 않는지, 오타나 비문은 없는지, 여전히 아름다운지 살피고 또 살핀다. (p.80)
몰라도 되는 삶은 안락하다. 계획을 실천하며 살 수 있는 일상은 순조롭다. 그런 인생을 잘 굴러가게 한다고 해서 과연 어른일까. 지금껏 알던 세상이 무너졌을 때 잿더미를 털고 일어나, 몰랐던 걸 하나하나 깨치며 단단해지는 게 어른 아닐까. (p.105)
나는 글 쓰는 일을 한다는 것에 자부심이 있다. 그건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데서 오는 자부심이다. 직업은 나를 구성하는 많은 것들 중 하나지만, 글 쓰는 일은 곧 나이기도 하다. (p.122)
내가 원하는 건 하나다. 내 집에서 불안감 없이 편안히 지내는 것.
그를 위해선 뭘 해야 할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비현실적으로 들리던 선배의 조언이 조금씩 마음에 스민다. ‘이만하면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그냥 보내줬으면 좋겠다.’ (p.165)
우리를 지킬 수 있는 건 나밖에 없다는 생각에 전전긍긍했지만, 나는 개를 지키고 싶다는 핑계로 나를 지키고 싶었다. 우리의 일상이 망가지면 가장 힘들어지는 건 나일 테니까. (p.173)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집중해야 할 것은 그럴듯해 보이는 해결책을 찾는 것이 아니라 나는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원하는지를 바로 보는 것이다. (p.178)
내가 늘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던 이유는 좋은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가짜가 더 진짜 같은 것처럼, 애써 좋은 사람인 척하며 살아왔을 뿐이다. 앞으로도 나는 온갖 모순과 위선을 정리 안 되는 짐처럼 끌어안고 살아갈 것이다. (p.199)
나는 여전히 글이 사람을 살릴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의미 있는 글을 쓰고 있다고도 생각 안 한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의미 따위를 고민하느라 꼴값을 떨었지만 역시 글쓰기는 재미로 하는 것. 나는 재미가 있어야 쓰고, 재미를 느껴야 사는 사람이다.
내 글이 사람을 살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쓰다 보니 적어도 나는 살았다. (p.200)
3번의 누수를 겪였던 나는 이 책을 보자마자 집지 않을 수 없었다. 누수로 인해 에어비앤비 신세까지 지면서 4가족이 고생한 걸 떠올리게 했고 사실 다른 집 누수 피해의 상황도 좀 궁금했다. 솔직한 입담의 작가님 글 속에서 나는 순간순간 뜨끔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문제가 생겼을 때 회피하는 유형 바로 나. (p.53) 상한 냄비에 뚜껑 덮고 치워버리기까지 할 사람이 바로 나다. 또 내가 늘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던 이유는 좋은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 (p.199) 이라는 글에서도 끄덕끄덕. 아름다운 내용증명도. 또 ‘똥’에 대한 이야기는 어떠한가. 혼자 읽기는 아까워 남편에게 읽어주기까지 했다. 누수의 발생부터 해결까지 유머가 살아있는 과연 재미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살면서 문제가 생겼을 때 당신은 어떻게 대처하는가. 적극적으로 해결하려 애쓰는가 아니면 최대한 열심히 도망치는가. 나로 말할 것 같으면 후자다. 냄비에 상한 찌개가 있는데, 그걸 처리할 엄두가 안 나면 뚜껑을 덮으면 된다. 그러라고 뚜껑이 있는 것이다. 나는 인생에 크고 작은 뚜껑이 엄청 많아서 이건 이 뚜껑으로 덮고 저건 더 뚜껑으로 막으면서 살아왔다. - P5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