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 아이 꿈꾸는돌 36
이희영 지음 / 돌베개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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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은 온통 붉은색이었다. 바람이 유순해 파도조차 게으르게 철썩이던 날이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화창했다. 어디를 둘러봐도 새파란 세상 속에서 오직 한곳만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p.7) 프롤로그

 

소금 바람은, 사람들의 기억까지 차곡차곡 염장해 두었다가 그 축축하고 시큼한 것을 엉뚱한 곳에서 불쑥 꺼내 놓았다. (p.25)

 

살아가는데, 침묵은 애무 유용했다. 이수는 그 사실을 몇 번의 경험으로 배웠다. 상대를 위해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는 더더욱 입을 닫는 편이 좋았다. (p.42)

 

만약 그날 할머니가 집에 오지 않았다면, 술에 취한 남자가 갑자기 들이닥치지 않았다면, 주방 싱크대 서랍에 얌전히 잠들어 있던 칼을 녹슬게 내버려 뒀더라면, 차라리 칼 가는 장영감한테 맡겼다면, 엄마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할머니 역시 퍼렇게 날 서 있는 그 칼로 ...... 자신의 아들을 찌르지 않았을 것이다. (p.94)

 

너 나랑 가자.’

다시 만난 할머니의 첫마디였다. 이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떠난다는 건 어쨌든 이곳에서 사라진다는 의미였으니까. (p.98)

 

아들과 여자는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이제 남은 건 어린아이뿐이었다. 아들을 잃은 어머니는 자신의 손으로 그 아이를 거뒀다. 섬이 들썩이는 선, 태풍과 풍랑주의보 때문만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떠들썩했던 뒷말들은 파도처럼 끊임없이 밀려갔다 밀려왔다. 시간이 지날수록 산산이 부서져 섬 주변을 맴돌았다.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p.100)

 

결국 깨닫게 되었다. 슬퍼하거나 서운해하기보다, 이 모든 일에 무감각해지는 편이 휠씬 낫다는 사실을. 그건 이수가 터득한 기본적인 생존 법칙이었다. 처음부터 아무것도 갖지 않은 사람은, 상실감도 느낄 수 없었다. (p.108)

 

아들이 죽인 여자의 피붙이, 엄마를 죽인 남자의 어머니, 둘의 만남에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지독한 악연이라고. 할머니가 어린아이를 상대로 괜한 분풀이를 할 거라 넘겨짚었다. 아직 어린 이수를 걱정했고, 키워 봤자 또 다른 망나니가 될 거라며 할머니를 염려했다. 그러나 지난 5년간 두 사람 모두 조용했다. 한차례 폭풍이 지나가면 바다는 거짓말처럼 잔잔해졌다. (p.139)

 

내 기억력이 좋은가?’ 이수는 마음속으로 도리질 쳤다.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잊어버리고, 대신 엉뚱한 생각들로 머릿속을 가득 채워 버렸다. 어쩌면 그렇게 하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대체 무엇을 위해, 아니 무엇을 지우기 위해. (p154)

 

샀는데 막상 아니다 싶으면 반품하잖아. 인생도 반품하고 싶을 때가 있겠지. 나는 엄마 아빠 이해해. 이왕이면 구매에 좀 신중하지. 그럼 괜한 헛수고 안했을 텐데.” (p.156)

 

막대 사탕 따위 꼬마들만 먹는 줄 알았는데, 자꾸 먹다 보니 묘하게 중독되었다. 익숙해진 것은 사탕의 달콤함뿐만이 아니었다. 누군가와 함께하는 시간은 그보다 더 달았다. (p.161)

 

일주일에 한 번 주던 관심이 한 달에 한두 번으로 바뀌었다. 그마저도 서서히 거둬들였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선인장은 자랐고, 가시는 더 뾰족하고 단단해졌다. (p.162)

 

 

가끔 그런 날이 있어. 온 우주가 나 하나 잘못되기를 기원하는 날. 단순히 운이 없거나 재수가 없다는 말로 부족한....... 신이 작정하고 나는 파괴하려는 날 말이야.” (p.169)

 

따뜻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가정에서 외롭게 자란 아이 세아. 이모님과 지유에게 따뜻함을 느꼈던 짧은 시간이 지나고, 돌이킬 수 없는 사건으로 더 깊은 상처를 받은 채 이수가 있는 학교까지 전학을 오게 된다.

 

초침은 심 없이 움직이는데, 이상하게 새벽이 올 것 같지 않았다. 이수와 할머니 두 사람 모두 영원한 밤에 갇혀 버렸다. (p.201)

 

 

심연 깊숙이 가라앉았던 것들이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갑자기 찾아오는 공황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진정 두려워했던 것, 결코 꺼내 보려 하지 않았던 진실의 민낯과 드디어 마주했다. 할머니가 가슴에 묻어 두었던 비밀과도. (p.205)

 

청소년 소설을 읽으면 나는 그 시절의 나를 자꾸 생각하게 된다.

고등학교 시절 부모님의 이혼으로 재혼가정에서 지냈는데 우울했던 것밖에는 기억에 남은 것이 없다. 그런데 그 시절의 기억을 떠올려 보면 동생은 기억하는데 나는 기억하지 못 하는 것이 많다. 나는 생각한다. 그 기억들을 봉인하고 열어보고 싶지 않은거라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거라고. 나는 아직 마주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왠지 그 시절의 나를 마주하면 나를 불행하게 한 사람을 용서해야 할 까봐 나는 아직도 두렵다.

 

아줌마와 할머니, 그리고 이수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다. 하지만 유일하게 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였다. 가족은 그런 사람들이라고 이수는 생각했다. (p.214)

 

함께 살아서 가족이 아니라 서로를 보듬고 진정으로 배려하는 사람이 가족이라는 생각이 든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여서 괴로워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너무나도 많이 넘쳐나고 있다. 진정한 가족은 무엇일까.

 

할머니는 결국 하나의 섬이 되었다. 그렇게 진실을 가슴에 묻었다. 비록 우연한 사고라 해도, 칼에 찔린 건 당신의 아들이었다. 그럼에도 죄를 묻기보다, 오히려 그 아이의 손을 내밀어 주었다. 그 어린 것 역시 명백한 피해자라 생각했을까? (p.219)

 

 

바다 한가운데 커다란 눈꽃이 피어났다. 구름이 낮게 깔린 잿빛 하늘에서 사락사락 눈이 내렸다. 그 눈송이가 바다에 떨어져 소금이 되었다. 세상에 소금이 내렸다. 차갑게 언 마음을 녹이려. 소중한 추억을 잊지 않도록 그렇게 짭쪼름한 눈을 퍼부었다. 그것은 어쩌면 누군가의 마음인지도 몰랐다. 무르지 않도록, 상하지 않도록, 꼭꼭 감싸서 지켜 주고 싶은 간절함. (p.227) 에필로그

 

섬마을에서 할머니와 사는 아이 이수, 어느 날 이수가 다니는 학교로 전학 온 아이 세아.

이 두 아이의 깊은 내면의 상처가 책을 읽는 내내 가슴을 아프게 한다. 여리지만 단단한 마음으로 두 아이는 서로에게 기대어 줄 등이 되어준다. 책 속에 인간에게 받은 상처가 가장 아프고, 인간에게서 받은 위로가 가장 따듯하다’ (p.228) 고 작가는 말한다. 그러하다. 한 사람의 어른으로서 더이상 아이들이 상처받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간절히 들게 하는 소설이다. 지금 내 옆의 아이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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