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할 자격 - 게으르고 불안정하며 늙고 의지 없는… ‘나쁜 노동자’들이 말하는 노동의 자격
희정 지음 / 갈라파고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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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누구나 반드시 획득해야만 하는 ‘(정상) 노동자’란 위치가 얼마나 비현실적인 자격을 요구하고 있는지를 밝힌다. 사회에서 통용되는 ‘노동자성’에서 미끄러졌거나 이를 거부하는 사람들, 즉 열정적이고 자기관리에 능통한 청년이 될 수 없는 사람들, 정숙한 현모가 될 수 없는 여자들, 건강한 몸과 건강한 정신을 갖출 수 없는 사람들, 더는 젊음을 흉내 낼 수 없는 사람들, 게으름뱅이, 낙오자들...(로 낙인찍힌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비추어 본다. (책날개소개글)

우리는 지금 어떤 노동을 하며 살아가는가?

노동자란 누구이며 세상은 왜 그것을 규정하는가? (책날개 발췌)

낙인이라는 채찍질 앞에 선 노동자가 어떤 노력 끝에 ‘노동자 되기’를 이루는지 또는 어떤 과정을 통해 그 ‘되기’를 포기하는지, 그것을 볼 수 있다면 우리가 지금 어떤 노동을 하고 있는지, 아니 어떤 노동을 해야 하는지 조금은 더 말할 거리가 생길 것이다. 그래서 이 책에선 ‘좋은 노동자’가 될 자격을 박탈당하거나 ‘좋은 노동자 되기’를 일정하게 포기한 이들을 기록한다. (p.12)

“그 안에서 나는 뭔가 계속 열심히 해야 하고, 그걸 입증해야 한다는 게, ‘여러분 나를 믿어주세요’ 이런 걸 계속해야 한다는 게 너무 스트레스였어요. 전 어설프거든요. (중략) (p.25)

그러던 어느날 ‘몫’이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다 ‘여럿으로 나누어 가지는 각 부분’이라는 뜻풀이를 알게 되었다. 우리 사회는 몫이란 말을 한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 그가 홀로 갖추고 짊어져야 할 책임이란 의미로 이야기하지만, 몫이라는 것은 애초에 개별로 존재할 수가 없는 개념이었다. (p.52)

모두가 자신(자신이 보낸 시간)의 의미를 그렇게 증명한다. ‘내가 되기’ 위해서는 가만있을 수 없다. (p.54)

우리가 언젠가 백수가 된다면, 필요한 것은 백수가 되지 않는 법이 아니라 백수로 잘 지내는 훈련이 아닐까. 백수로 지내도 괜찮은 사회를 꿈꿀 순 없는 걸까.(p.69)

낙인의 특성은 사람을 가둔다는 것이다. 옴짝달싹을 못하게 한다. 무엇을 하든 ‘네가 이렇기 때문에...’로 회귀시키는 놀라운 관성이 있다. (p.85)

이 사회에서 누군가 온전히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자원의 대부분은 왜 ‘가족’에서 나와야 하는가. 안정적인 가족이 없다는 말은 왜 모든 자원을 박탈당했다는 말과 동의어가 되어야 하나. (p.115)

힘들다고 피곤하다고 마음이 안 좋다고 일을 쉬면 ‘일할 자격’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있었다. (p.128)

우울할 수밖에 없는 사회이다. 따로 조사를 하지 않아도 우리는 우리가 왜 우울한지 안다. 하지만 모두가 우울증을 겪는 것은 아니었다. 우울하지 않을 수 없는 사회라고 이야기해도, 이 말은 우울하지 않은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힘을 잃는다. (p.134)

‘언제까지 약을 먹고 출근해야 할까?’ 답을 구할 수 없는 물음을 들으며 나는 살짝 다른 생각을 했다. ‘언제까지 출근하기 위해 약을 먹어야 할까?’ 넘어져도 주저앉을 줄 모르고 약봉지를 든 두 팔을 앞뒤로 흔들며 걸어간 그곳에는 직장이 있었다. (p.135)

1년에 80만 명이 항상 불안해서 힘들다고 한다. 원인은 알 수 없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늘 불안할 것을 요구받지 않나? 우리가 불안하지 않다면 이토록 많은 자기계발서가 팔릴 리 없다. 자기계발서는 우리에게 안주하지 말라고 한다. 제대로 하고 있는지 의심하라고 한다. 그 ‘제대로’의 기준은 자꾸만 높아진다.

덕분에 자기계발서의 주 독자층인 20대가 우울증과 불안장애를 겪는 비율이 늘고 있다. (p.140)

우리의 일터가 원하는 것이 ‘정상성’이라는 것도 착각이겠다. 기업이 진실로 원하는 것은, ‘정상성’의 추구에 갇혀 스스로를 검열하는, 기업이 시간과 비용을 투자할 필요가 없는 값싼 몸이다. (p.160)

“남 좋은 일이지. 나한테는 좋은 게 하나도 없어. 그러니까 지금 너무 허무해. 부서 옮기고 나선 대충 하려고 했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 또 열심히 하게 되어 버렸어. ” (p.162)

실제로 많은 ADHD 직장인이 주말에는 약을 먹지 않는다고 했다. 집중력을 높이고, 일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사람들의 말을 기억해야 할 필요가 없는 휴일에는 약을 먹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연료 첨가제가 따로 없다. (p.174)

노동에 걸맞지 않은 인간이 있는 것이 아니라, 과도한 집중력과 업무 내용의 빠른 전환을 요구하는 노동환경이 어디에도 집중할 수 없는 인간형을 만든다. 그럴수록 그런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특정 자질이 능력으로 추켜올려지고, 그렇지 못한 사람을 가르는 범주가 엄격해진다는 것. 우리가 이토록 우선순위를 정하는데 목을 매는 이유는 시간 활용 (효율) 압박이 있기 때문이다. (p.177)

“몸은 한 번도 ‘결과’였던 적이 없다.” 적지 않은 여성들에게 지금의 몸은 나의 몸이 아니다. 나의 몸은 앞으로 만들어갈 더 ‘합당하고 적합한’ 몸이었다. (p.232)

바쁨은 능력의 다른 이름이었다. 이 책의 3장에서 말했듯이,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요소가 ‘노력’밖에 없는 여성들이 있다. 그런데 노력마저 증명이 필요했다. 자신의 노력을 증명하기 위해 ‘쇼잉’을 한다. (pp.235~236)

우리는 다른 세상을 꿈꾸기에 1급을 선별하고 1등 국민을 만드는 위계의 질서를 거부한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말할 자격을 박탈하는 시선을 뚫고 이야기한다. 이 행위들이 ‘일의 세계 안에서 나다움을 지키며 타인과 함께 일할 수 있는 우리의 오롯한 권리’를 가져올 것이라 믿으면서. (p.270)

이 사회가 지닌 노동의 환상에 잡아먹히고 싶지 않았다. 내 안에 자리 잡은 환상을 거울삼아, 일하는 이들을 비춰 보았다. 건강과 성실, 의지와 통제라는 환상에 촉촉이 젖은 몸으로 그 환상을 직면한다. 내가 어떤 세상에서 누구로 노동을 하고 있는지를. (p.281)

지금까지 차별이라고 느끼지 못했던 부분까지도 콕! 집어주는 책이다. 시장에서 요구하는 노동자의 자격들을 읽으며 그동안 이유 없이 답답했던 것이 조금이나마 해소가 되었다. 내가 이상했던 것이 아니라 이 사회가 잘못됐다는 걸. 잘못된 것이 그대로 용인되어 온 것이 지금이 아닐까? 나는 지금 어떤 노동을 하고 있는지 깊이 생각해 보게 한다. ‘일의 세계 안에서 나다움을 지키며 타인과 함께 일할 수 있는 우리의 오롯한 권리’(p.270)가 누구에게나 실현되는 날이 어서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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