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에 읽은 고통슬픔


 

<고통의 문제>. C.S. 루이스. 홍성사

이 책은 <순전한 기독교>와 함께 루이스의 대표적인 변증서라고 할 수 있다. 흔히 신정론이라고 하는 고통 변증서 말이다. 그의 많은 책들에서처럼 이 책에도 탁월한 비유, 예화, 문장들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이것이 가장 유명하다. “하나님은 쾌락 속에서 우리에게 속삭이시고, 양심 속에서 말씀하시며, 고통 속에서 소리치십니다. 고통은 귀먹은 세상을 불러 깨우는 하나님의 메가폰입니다.” 루이스는 본서에서 내내 고통이 사람들의 인생, 특별히 신자들의 인생에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유의미한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기독교 역사 내내 있었던 주장, 아니 구약 성경에서부터 오랜 시간 있어왔던 주장이니까. 그러나 <고통의 문제>가 다른 신정론보다 특별한 건 루이스가 지니고 있는 천재적인 언어 사용과 더불어 고통(을 당하는 사람)을 대하는 그의 태도에 있다. 루이스는 이 책을 쓰기 전에 이미 아버지, 어머니와 같이 사랑하는 이와 적지 않은 이별의 경험을 했고 전쟁도 경험했다. 고통이 현실이고 하나님의 부재를 강력하게 나타내는 것을 다른 사람들 못지않게 잘 알고 있다. 고통에 대해 몇 마디 말하는 것이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루이스는 처음부터 이 책의 독자를 하나님의 선하심을 확실하게 아는 사람으로 한정한다. 자신의 믿음 때문에 오히려 고통이 문제가 되는 사람들 말이다. 고통은 현실이지만 동시에 사람의 생각을 새롭게 하고 자라게 한다. 고통은 분명 역설을 가지고 있다. 루이스는 이 책에서 그것을 잘 드러냈다. 고통가운데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고통당하는 자와 함께 하신다. 오래된 질문에 당연한 답 같지만 여기에는 분명 진리가 담겨 있다. 독자는 이 책에서 루이스가 오래된 이 질문과 답을 어떻게 논증하고 표현하는지를 한 번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크게 유익할 것이다.

 

<샴고로드의 재판>. 엘리 위젤. 포이에마

신정론에 대해 몇 권의 책을 추천 받았다. 그중에서도 <샴고로드의 재판>은 눈에 띄었다. 무엇보다 우선 작가가 노벨 평화상 수상자이며 홀로코스트를 경험한 <나이트>의 작가 엘리위젤이었다. ‘이런 작가라면 적어도 신을 변론한다고 함부로 말하진 않았겠지라는 기대가 생겼다. 평소 희곡을 잘 읽지 않아서인지 초반에는 조금 낯설었지만 주인공들이 겪은 엄청난 고통-학살과 집단 강간-이 알려지고 하나님을 피고에 세운다는 설정이 잠시 지루할 뻔 했던 감정을 깨웠다. 재판이 진행될수록 욥기를 연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결말은 욥기와 달랐다. 깜짝 놀랄만한 결과였다. 하나님이 나타나시기는커녕 모두가 학살을 당하는 것을 암시하는 소음으로 끝이 난다. 하나님을 멋지게 변론했던 자에게 모두가 속아 넘어가는 장면은 그리 새로울 것이 없었으나 고통에 몸서리치는 자들이 결국엔 또 다시 고통에 휘말리다니! 처음에는 당혹스러웠다. 잠시 멍해졌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섣불리 신을 변론하는 자들을 조롱하는 것인가?’ 그런 의도도 있는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을 재판에 세우고 또 다른 학살이라는 설정에는 더 깊은 의미가 있었다. 고통은 현실이라는 것. 하나님은 분명 부재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 그리고 이점이 가장 중요해 보이는데, 인간의 존재와 저항 자체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역설적으로 증명한다는 점이다. 신정론을 다루는 다른 책들은 하나님의 선하심, 인간의 악함,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어떻게든 엮어서 하나님을 변론하려고 시도하지만 이 책은 달랐다. 이 세상에는 누구도 하나님을 변론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극중 곳곳에 흘리면서 가장 그럴듯해 보였던 변호사마저 사탄으로 표현했다. 고통당하는 이들 앞에서 함부로 말하지 말아야 하고 누구도 쉽게 신을 변호할 수 없다는 것을 이처럼 당혹스럽게 보여줄 수 있을까? 읽은 지 한 달 정도가 된 것 같은데 여전히 여운이 남는 강력한 책!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습니다>. 니콜라스 월터스토프. 좋은씨앗

아들을 앞서 보낸 한 개혁주의자의 애가. 이번에 책을 읽으면서 새롭게 알았는데 한국의 모 일간지와 이런 인터뷰를 했더라.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에게 슬픔에서 벗어나라고 얘기하지 마라. ‘괜찮다고도 마라. 그들은 절대 괜찮지 않다...자녀가 몇 명이냐는 물음에 나는 그 질문을 받을 때마다 다시 고통스러워졌다... ‘(사고 당한 아이를 빼고) 4명이라고 답해야 할지, 5명이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서였다’. 그는 사람들이 자식이 4명이나 더 있지 않느냐고 했지만 위로가 아니라 더 큰 고통을 가져다주었다...자녀는 가게에서 아무 때나 구입할 수 있는 구슬이 아니다짧은 인터뷰였지만 그의 애가를 읽고 나서인지 그의 말에 나의 마음이 오래 머물렀다. 그는 이 책에서 아들 에릭이 죽고 난 뒤에 겪은 괴로운 감정을 조금은 절제해서 담아냈다. 아무래도 그의 지적인 태도가 이런 글에서도 나타나는 느낌이다. 물론 저자는 아들의 빈자리를 마주하며 그것을 철학과 신학으로 애써 메우려하지 않는다. 절제되었지만 솔직하면서도 애절하게 아들을 앞서 보낸 아버지의 슬픔과 허무함, 외로움을 적어 내려간다. 사랑이 크면 클수록 아픔이 얼마나 크고 깊어지는지를 절제된 그의 표현들을 통해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이러한 저자의 괴로운 심정 외에도 특히 눈에 띄었던 건 다른 사람들의 적당한 위로가 얼마나 가벼웠고 그저 함께 눈물을 흘리는 이웃이 얼마나 힘이 되었는지에 대한 저자의 따끔한 충고였다. 루이스의 말처럼 슬픔을 겪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주변 사람들과 피할 수 없는 불편함을 느끼게 되는데 저자의 충고는 우리가 슬픔을 통과하는 이웃을 향하여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알려준다. 쉽게 말하기보다 무거운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귀한지...잘못 내딛은 에릭의 한 걸음이 아버지와 아들의 사이를 너무나 크게 갈라놓았다. 나에게도 아들이 셋이 있다. 아들과 함께하는 한 순간, 한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가. 감정 이입이 되어 책장 하나를 쉽게 넘길 수 없었다. 한 사람의 슬픔을 읽으며 죽음, 슬픔, 이웃, 그리고 나를 생각해 볼 수 있는 묵직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안 그래도 4월이 되면 마음이 아픈데 더 무겁게 만든 그런 책이다.

 

<헤아려본 슬픔>. C.S. 루이스. 홍성사

원서의 제목을 딱딱하게 붙여보자면 하나의 관찰된 슬픔정도가 될 수 있는데 번역하며 제목을 참 멋있게 붙였다. 루이스의 특별한 러브스토리와 사별이야기는 이미 유명하다. 원래 이 책은 출판될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읽어보면 과연 이것이 루이스가 쓴 책이 맞나 싶을 정도로 곳곳에 슬픔과 분노가 묻어난다. 독자가 보기에 어떤 점에서는 흥미롭기도 하다.(슬픔 때문에 괴로워한 내용을 두고 흥미롭다고 하니 미안하기도 하다.) <고통의 문제>에서는 슬픔에 크게 가치를 두지 않았던, 심지어 부정적인 뉘앙스를 비췄던 루이스가 슬픔에 취해 이리저리 비틀대는 것과 같은 모습이 놀라울 정도다. 또 한 가지 놀라운 점이 있다. 그는 자신의 괴로움을 지극히 사적으로 쓸 때에도 감히 따라 하기 힘든 비유들과 표현들을 쏟아놓았다. 이런걸 보면서 역시 루이스는 루이스구나 싶었다. 무튼, 루이스는 슬픔을 헤아릴 수 있었을까? 루이스 스스로가 실패했다고 답한다. 스스로 슬픔을 어떤 지도와 같이 그려볼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정작 써보니 슬픔은 역사서와 같아서 쓰면 쓸수록 그녀에 대한 생각이 걷잡을 수 없이 뻗어나간다고 고백한다. 슬픔은 정해져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과정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자세히 보니 처음에는 큰 파도가 치는 것 같다가 점점 잠잠해지는 것 같았다. 너무나 허무한 시간을 어찌 보내야 할지 몰랐고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쳐다봐야 할지 모를 정도로 괴로워하던 루이스는 점점 그녀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또렷하게 기억한다. 뿐만 아니라 그녀가 주안에서 평안했다는 것을 믿으며 흔들렸던 그의 믿음을 바로 잡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글 중간, 중간에 고통과 사랑에 대한 뛰어난 통찰을 엿볼 수 있는 건 아무래도 루이스의 책에서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아닐까 싶다. “사별이 사랑하는 연인의 자연스러운 과정 중 하나라는 말과 남자와 여자가 서로 몸을 섞으며 원래의 남자와 여자가 아닌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아름다운 형상으로 변해간다는 말은 특히 기억에 남는다. 루이스의 다른 책에서 경험할 수 없는 특별한 그의 감정 분노, 슬픔, 외로움, 사랑 을 느낄 수 있는 이 책, 마음에 오래 남을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빠가 책을 읽어줄 때 생기는 일들 - 퇴근 후 15분, 편집자 아빠의 10년 독서 육아기
옥명호 지음 / 옐로브릭 / 201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주일에 한 두번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준다. 정말 신기한게도 아빠 엄마가 감당하기 힘든 에너지를 발산하는 아이들이 그 시간만 되면 내 옆에 바짝 붙어 앉거나 누워서 조용이 귀를 기울인다. 변신로봇책, 공룡책들과 같이 수시로 싸우고 터지는 내용의 책이나 권정생 선생님의 진지하면서 슬프고 무거운 내용의 책이나 똑같이 집중해서 듣는다. 그 모습이 너무 신기해서 물어본적도 있다. ˝아빠가 책 읽어주면 좋아? 뭐가 그렇게 좋아?˝ ˝음...몰라. 그냥 좋아~˝ 아이들의 대답에 기분이 좋으면서도 마음에 살짝 부담이 느껴진다. 아이들이 이렇게 좋아하는데 자주 못해주니 미안하고 그나마 가끔 읽어주는건 잘 하고 있나 하는 고민도 있다. 그러한 순간에 괜찮은 책을 하나 읽었다. 기독교잡지 ‘복음과 상황‘의 편집장인 옥성호님이 쓴 <아빠가 책을 읽어줄때 생기는 일들>이다. 저자는 무려 십년을 넘게 자녀들에게 책을 읽어주셨더라. 하루 십오분 정도를 쉬지 않고 자녀들과 함께 밤마다 책을 읽었다고 한다. 무려 십년...정말 대단했다. 이 책에는 자녀들과 책을 읽게된 계기와 함께한 시간들, 방법, 함께 읽어온 책들이 소개되어 있다. 여러 유익한 내용들이 있었는데 무엇보다 글에 저자의 행복이 묻어났다. 자녀와 친구처럼 지낼 정도로 많은 책을 읽으며 함께 공유하고 나눌 수 있는 추억이 있다는 것이 부러웠다. 나도 이미 하고 있지만 더 많이 꾸준하게 해야겠다는 다짐을 몇번이나 했다. 책값이 더 늘어나겠지만ㅋㅋㅋ 그정도는 아내가 이해해주겠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눈이 내리는 여름 권정생 동화집 3
권정생 지음, 이기영 엮음, 이소영 그림 / 단비 / 2017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권정생 선생님께서 오래전 쓴 동화들인데 책으로 나오지 않았던 동화들을 세권으로 모아 작년에 나왔는데 이 책이 마지막이다. 권정생의 단편에도 역시 이웃들 아이들 짐승들이 다 나온다. 물론 아프고 가난한 이웃도 나온다. 짧지만 이웃과 함께 하는 이야기들이 마음을 따뜻하게 해준다. 아이들에게 읽어주기에 좋은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통의 문제 믿음의 글들 189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이종태 옮김 / 홍성사 / 2002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C.S. 루이스. 고통의 문제. 홍성사

 

이번에 읽은 루이스의 책은 <고통의 문제>였다. 책을 펴기도 전에 두 가지 마음이 들었다. 우선 들었던 느낌은 반감이다. 4년 전 세월호가 침몰한 이후 신정론 자체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고통당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을 변호한다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지금도 답하기 쉽지 않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이런 느낌과 동시에 루이스라면 다르지 않을까?’라는 기대감도 있었다. <예기치 못한 기쁨>, <순전한 기독교>,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를 차례로 읽으면서 기독교 전통 교리들을 전혀 새롭게 전달하는 그의 능력에 놀라고 있는 중이다. 이 책 역시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데 그동안 들어온 고통에 대한 진부한 이야기들을 어떻게 표현했을지 자못 궁금했다.

 

아니나 다를까? 루이스는 이 책에서도 앞에서 말했던 책들과 주제만 고통으로 달라졌을 뿐 기독교가 오랜 시간 주장해왔던 것을 다시 끄집어낸다. ‘다시 끄집어낸다는 표현이 적당해 보이는데 각 챕터의 제목들 하나님의 전능함, 하나님의 선함, 인간의 약함, 인간의 타락, 지옥, 천국 을 보면 더욱 그렇다. 기독교에 익숙한 사람들은 이러한 소제목들만 보고 어떤 내용이 전개 될지를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실제로 루이스는 그들의 상상대로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라는 기독교의 옛 교리를 변증한다.

 

그러나 루이스는 어쩌면 딱딱하고 진부하다고 느껴질 수 있는 이 옛날 교리를 생생하게 전달한다. 오래된 옷을 리폼하여 전혀 새로운 느낌을 주는 것처럼, 내부를 청소하고 외부를 깨끗하게 손질하여 거의 새것처럼 사용하는 리퍼 가전처럼 루이스의 표현들은 고통에 대한 오래된 교리를 반짝반짝 빛나게 해준다. “하나님은 쾌락 속에서 우리에게 속삭이시고, 양심 속에서 말씀하시며, 고통 속에서 소리치십니다. 고통은 귀먹은 세상을 불러 깨우는 하나님의 메가폰입니다.”, “우리 아버지께서는 여행길에 기분 좋은 여관에 들러 원기를 회복하게 해 주시지만, 그 여관들을 우리 집으로 착각하게 만드시지는 않습니다.”와 같은 표현들은 이 책에서 알려진 꽤나 유명한 문장들이라 할 수 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수천 년 동안 성도들은 고통과 관련하여 비슷한 고백을 이어왔다. 고통을 통해 직접 경험하고 목격한 하나님에 대해 가르쳤다. 이러한 고백과 가르침에는 오랜 시간 쌓여 온 두께라는 것이 있다. 루이스의 치밀한 변증과 생생한 전달은 오랜 시간 교회가 고통을 통하여 하나님을 고백하고 가르쳐온 의미론적 두께에 접근하도록 돕는다. 나는 이 책이 가진 최고의 가치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고통에는 분명 역설이 존재한다. 가난이 청산되어야 할 것이지만 동시에 가난한 자는 복되다고 믿는 것처럼 말이다. 아무리 유익하다고 해서 고통 받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아픈 만큼 성숙한다는 말에는 분명 일말의 진리가 담겨있다. 지금도 이 세상에는 나 때문에, 그리고 너 때문에 그리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질병과 사고 때문에 더욱 괴로운 일들이 많이 쌓이고 있다.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고통의 문제>는 오래되었지만 여전히 새로운 이 질문에 오래되었지만 여전히 포기하기 힘든 답을 가르쳐준다. 하나님은 고통 받는 자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을 하나님께로 이끄신다고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극히 사적인 페미니즘 - 치명적인 상대와 함께 살아남는 법
박소현 외 지음 / 아토포스 / 2017년 7월
평점 :
절판


박소현. 오빛나리. 홍혜은. 이서영.<지극히 사적인 페미니즘>. 아토포스.

네 명의 작가들이 자신들의 일상을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지금, 여기에서의 페미니즘‘을 말하기 위해 자신의 목소리로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를 풀었다. 가사와 육아로 분투하는 여성, 게임하며 즐기고 싶은 여성, 문학을 배우는 여성, 운동권에서 일하는 여성까지. 전혀 겹칠 것이 없어 보이는 각자의 이야기를 하는데 각각의 이야기들이 놀랍게 겹쳐진다. 여성이라서 부딪히고 감당해야 하는 부조리한 상황들에서 말이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집에서, 온라인 게임에서 부당한 상황에 놓여야 한다. 문학작품을 배워도 온통 남자들의 시각뿐이고 가난한 노동자들을 위한 운동권에서도 남자가 나서야 일이 돌아가는 분위기다.

각각의 이야기들을 읽으며 여러 감정이 오갔는데 그중에서도 당혹감과 미안함은 이번에도 빠지지 않았다. 이년 정도 꾸준히 페미니즘을 읽어도 책을 읽을 때마다 여전히 놀랄 일들이 많고 미안해진다. 수십년간 켜켜이 쌓여온 먼지가 그만큼 많다는 증거고 이제서야 그걸 조금씩 털어내는 느낌이다. 함께 약자를 돕는 현장에서도 2등 시민 취급을 받아야 하는 현실, 게임하는 순간에도 여성임을 숨기거나 남자들의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들. 상상하기 어려웠다. 겪어보지 않았으니 말이다. 아니 솔직히 그런 일들이 있었어도 의식조차 못하고 지나쳤을때가 훨씬 많았을 것이다. 특히나 첫번째 이야기를 읽다가 한페이지 가깝게 빼곡히 집안일을 세세하게 열거한 부분을 읽다가 나도 몰래 아내를 쳐다볼수밖에 없었다. 어찌나 미안하던지.

˝100명의 페미니스트들에게 100가지의 페미니즘이 있다˝는 얘길 가끔 듣는다. 이 책을 읽어보니 그 말이 무었을 의미하는지 좀 더 알것 같다. 아마도 세상의 절반인 여성들 모두에게 각자 저마다의 삶이 있을텐데 그 모든 곳에서 자신의 성때문에 차별을 받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리고 그 상황에 맞서기 위해 각각의 모습으로 저항하며 산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여성으로 사는 것도 힘든데 페미니스트로 살아가는 네명의 작가들에게 수고많다고 격려해주고 싶다. 뿐만 아니라 책을 읽으면서 사는 모양은 달라도 비슷한 편견에 시달리며 싸워야 하는 모든 페미니스트들을 응원하고 싶어졌다. 다들 힘내시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