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교회 - 현존하는 최고의 복음주의자 존 스토트의 교회에 대한 확신
존 R. 스토트 지음, 신현기 옮김 / IVP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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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실재가 현존할 수 있는 여러 방법들이 있다.”(로완 윌리엄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되면서도 살아 있는 교회의 성격을 항구적으로 규정해 줄 분명하고도 본질적인 표지들은 계속 있어왔다. 이 책의 목적은 살아있는 교회라고 부를 교회의 여러 특성들을 한데 모으는 것이다. 나의 희망은 명백하게 성격적인 이러한 특성들이 어떻게든 보존되어야 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교회의 본질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비전

 

1) 살아 있는 교회의 본질적인 표지들을 고찰하기에 앞서 필요한 세 가지 가정

우리는 모두 교회에 헌신한다. 신약 성경은 교회 없는 그리스도인을 알지 못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 한복판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교회의 선교에 헌신한다. 그분의 선교는 언제나 성육신을 의미한다. 안전하게 면역된 천국에 머물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교회의 개혁과 갱신에 헌신한다. 교회는 부패 상태에 있다. 우리는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계속해서 개혁되고 갱신되는 것을 보게 되기를 갈망한다.

 

2) 자신의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비전은 무엇인가?

살아 있는 교회는 배우는 교회다. 성령 충만은 반지성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 특히 사도들의 권위에 복종하면서 성경을 읽고, 묵상해야 한다.

살아 있는 교회는 돌보는 교회다. 관대함은 언제나 하나님 백성의 특성이었다. 우리 모두가 전적인 가난으로 부름을 받진 않았지만, 모두가 검소한 생활방식을 실천하며 우리의 것을 공유하고 나누어야 한다.

살아있는 교회는 예배하는 교회다. 초대교회의 예배는 공식적이면서도 비공식적이었고, 기쁨이 넘치면서도 진중했다. 오늘날 우리의 예배는 이러한 균형을 회복해야 한다.

살아있는 교회는 전도하는 교회다. 예수님 자신이 일상으로 혹은 날마다 전도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전도를 이따금씩 하는 행위로 여기지 말아야 한다.

 

2. 예배 하나님의 성호를 자랑함

예배란 우리의 삶 전체가 예배이며, 우리의 존재 전체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시편 1053절을 따라 여호와의 성호를 자랑하는 것이 예배라 할 수 있다. 좀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 진정한 예배는 성경적인 예배, 성경의 계시에 대한 반응이다.

진정한 예배는 회중 예배. 교회는 통일성과 다양성을 드러내기 위하여 그 교제권을 넓히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

진정한 예배는 영적 예배. 이것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읽고 선포해야 하고, 성찬을 두려움과 기대하는 마음으로 집행해야 하고, 간절한 찬양과 기도가 있어야 한다. 이러한 방법들은 진정한 초월을 경험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친밀한 만남을 가능하게 한다.

진정한 예배는 도덕적 예배. 우리의 마음에 있는 것은 반드시 삶으로 드러나야 한다. 순종이 제사 보다 낫고!

 

3. 전도 지역교회를 통한 선교

지역 교회가 하나님이 주신 역할을 수행하고자 한다면, 먼저 네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지역교회는 교회 자신을 이해하고(교회의 신학), 교회를 조직화하고(교회의 구조), 교회를 표현하고(교회의 메시지), 교회 자신이 되어야(교회의 삶) 한다.

 

1) 교회는 그 자신을 이해해야 한다: 교회의 신학

최소한 교회에 대한 그릇된 상 두 개가 있다.

- 첫 번째는 종교 클럽 혹은 내향적인 기독교이다. 윌리엄 템플 대주교는 교회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비회원들의 유익을 위해 존재하는 협동 사회다.”라고 말했다.

- 두 번째는 세속적인 선교 혹은 종교 없는 기독교다. 이기적인 종교에 대한 그들의 혐오는 정당하지만 종교 없는 기독교란 개념은 균형을 상실한 반작용이다.

- 교회를 이해하는 세 번째 방식이 있는데, 그것은 두 가지 그릇된 속에 있는 진리를 결합함으로써 우리에게 있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세상을 섬기는 책임이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이중 정체성 혹은 성육신적 기독교이다.

 

2) 교회는 그 자신을 조직화해야 한다: 교회의 구조

우리의 정적이고 경직되고 자기중심적인 구조는 이단적이다. 분주하고 교회 중심적인 프로그램은 가정생활에 해악을 끼치고, 지역 사회에 기여할 수 없게 만든다. 그러므로 교회는 5-10년 마다 자신을 평가하고, 교회의 구조가 그 정체성을 얼마나 제대로 반영하는지 알기 위한 조사를 행해야 한다.

특수한 상황을 이해해야 하므로 지역 사회 조사가 필요하다.

지역 교회에 대한 면밀한 질문들이 필요하다.(교회 건물, 예배 의식, 교회 구성원, 교회 프로그램 등)

 

3) 교회는 그 자신을 표현해야 한다: 교회의 메시지

점점 더 다원주의적으로 되어 가는데, 우리는 이러한 복음을 세계 속에서 어떻게 공식화 할 수 있을까? 우리가 피해야 할 두 가지 극단이 있다.

절대 부동성.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선호하는 표현(이신칭의, 하나님의 나라, 해방, 중생 등등)이 사용되지 않는다면 복음이 전해진 것이 아니라고 단호히 선언한다. 이들은 신약성경 자체에서 발견할 수 있는 복음의 형식에 풍부한 다양성이 있음을 깨닫지 못한 것 같다.

절대 유동성. 신약 성경에는 모든 다양성을 지배하고 초월하는 뿌리 깊은 통일성이 있는데, 그것을 무시하는 경향도 피해야 한다.

우리는 고대의 말씀과 현대 세계 사이, 이미 주어진 것과 열린 상태로 남겨진 것 사이, 내용과 상황 사이, 성경과 문화 사이, 계시와 상황화 사이의 변증법을 두고 씨름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성경에 대한 충성과 사람에 대한 민감성이 둘 다 필요하다.

 

4) 교회는 그 자신이 되어야 한다: 교회의 삶

하나님의 비가시성은 신앙에서 하나의 큰 문제다. 구약 성경의 유대인들이 직면했던 것처럼 오늘날 과학적 방법론이라는 토대 위에서 자라난 사람들에게도 도전이 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자신의 비가시성이라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오셨는가?

그분이 만드신 세상 속에서 자신을 가시적으로 계시해 오셨다.

아들을 세상에 보내심으로써 자신을 계시하셨다.

이제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자신을 그리스도인들 안에서 보여주신다.

 

4. 사역: 열둘과 일곱

일곱 집사를 세운 사건에는 아주 중요한 원리 하나가 새겨져 있다. 모든 사람 각자가 모든 일을 다 할 수는 없다.’ 이 원리를 세 가지 긍정적인 진술문으로 표현할 수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모든 백성을 사역으로 부르신다.

하나님은 사람마다 서로 다른 사역으로 부르신다.

하나님은 말씀 사역으로 부름 받은 사람들이 사회적 관리 업무로 산만해지지 않고 그들의 소명에 집중하기를 기대하신다.

 

이 원리에 동의하면서 목사직에 정관사를 붙인 사역으로 간주할 수 없다. 그것은 어제나 교회에 커다란 해를 끼치게 한다. 지역 교회의 리더십은 목양적이면서 동시에 복수적이어야 한다. 다음은 바울이 제시한 목양의 은유들이다.

 

1) 사도들의 모범 바울은 하나님의 계시된 메시지 어느 한 부분도 생략하지 않았다. 그는 지역 공동체의 어느 한 부분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 도시에 영향력을 미치기 위해 시도해 보지 않은 방법이 없었다.

 

2) 거짓 교사들의 침입 양무리를 맡은 목자에게는 두 가지 임무가 부여되었다. 첫째는 양무리를 먹이는 일이고, 둘째는 이리들을 내쫓는 일이다. 그들은 진리를 가르치는 한편 오류와 싸워야 한다.

 

3) 백성들의 가치(양무리) - 양무리들이 있는 교회는 어떤 곳인가?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다. 교회는 독생자의 피로 사신 교회다. 감독을 임명하신 분은 성령이시다. 이러한 진리는 우리를 겸손하게 할 뿐 아니라 우리에게 하나님의 백성을 사랑으로 돌보도록 동기 부여해 준다.

 

5. 교제: 코이노니아의 의미

신약 성경이 말하는 코이노니아의 핵심에는 공동의라는 뜻의 형용사 코이노스가 있다.

공동의 유산. 우리는 나라와 문화와 교회가 다르고 기질과 은사와 관심이 서로 다르다. 그러나 우리는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 구세주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위로자 되시는 성령은 우리를 하나로 만들어 주신다.

공동의 봉사. 코이노니아는 물질뿐 아니라 복음에 대한 지식, 은사도 함께 나누라 도전한다.

상호책임. 어느 누구도 전적인 수혜자 혹은 전적인 기부자가 아니다. 우리는 주고받는 일에서 협력 관계에 있다.

 

6. 설교: 다섯 가지 역설

1) 진정한 기독교 설교는 성경적이고 동시대적이다. 성경과 동시대에 다리를 놓기 위해서는 깊은 협곡의 양면을 연구해야 한다. 익숙해질 때까지 성경을 연구해야 하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연구해야 한다. 나는 이것을 이중적 경청이라 부른다.

 

2) 기독교 설교는 권위적이면서 동시에 잠정적이다. 설교자들은 교리와 불가지론의 요소를 겸비해야 한다. 분명하게 계시된 것들에 대해서는 교리적이어야 하고, 비밀한 것들에 대해서는 불가지론적이어야 한다. 이러한 설교를 통해 사람들을 성경으로 인도해서 그들이 성경에서 스스로 풀을 찾아 먹도록 권해야 한다.

 

3) 기독교 설교는 예언적인 동시에 목양적이다. 하나님이 분명하게 계시하신 교리적 진리와 윤리적 기준을 증거한다는 의미에서 예언적이고, 성경적 진리를 더디 믿는 사람들과 성경적 기준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들을 부드럽게 다룬다는 의미에서 목양적이다.

 

4) 설교는 은사인 동시에 공부하는 설교자를 통해 만들어진다. 칼빈은 먼저 학자가 되지 않고서는 영영 훌륭한 말씀 사역자가 될 수 없다고 했고, 스펄전 역시 공부에 더 이상 씨를 뿌리지 않는 사람은 설교단에서 더 이상 거두지 못할 것이라 했고, 빌리 그레이엄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자신은 사역을 다시 시작한다면 자신이 했던 것보다 세 배는 더 공부하고, 더 기도하겠다고 말했다.

 

5) 다섯 번째 역설은 설교는 깊은 사고와 열정으로서, 지성과 감정이 연동하고, 명쾌한 사고와 깊은 정서가 겸비된다.

 

7. 연보: 열 가지 원리

1) 기독교의 연보는 하나님의 은혜의 표현이다.

2) 카리스마, 즉 성령의 은사일 수 있다.

3) 연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고무된다.

4) 기독교의 연보는 비례적인 연보이다.

5) 균등에 기여한다. 이때의 균등은 획일을 의미하지 않는다. 교육 기회의 균등, 극단적인 사회적 불균형을 차단에 기여할 수 있다.

6) 면밀한 감독이 필요하다.

7) 우호적인 경쟁이 가능하다.

8) 기독교의 연보는 추수와 닮았다.

9) 기독교적 연보는 연보의 목적에 따라 각각의 상징적(신학적)인 의미를 담을 수 있다.

10) 진정한 연보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증진한다.

 

8. 영향력: 소금과 빛

예수님께서는 소금과 빛이라는 모델을 통하여 공동체적으로는 자신의 교회에 대한, 개인적으로는 제자들에 대한 네 가지 진리를 가르치셨다고 생각한다.

 

1) 소금과 빛의 진리

그리스도인은 비그리스도인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지배적인 문화와 다르게 될 것!

그리스도인은 비기독교 사회 속으로 스며들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비기독교 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을 바꿀 수 있다. 바꿀 수 있는 무기로는 기도 / 복음 전도 / 모범 / 논쟁 / 행동 / (믿음으로 생기는) 고난이 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기독교적 독특성을 유지해야 한다. 기독교적 독특성이란 더 큰 의, 더 넓은 사랑, 더 고상한 야망으로 부르시는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 특별히 우리는 비관주의에 회개할 필요가 있다. 신앙과 비관주의는 양립할 수 없다.

 

9. 21세기의 디모데를 찾아서

디모데는 그 주변의 지배적인 문화로부터 구별되라고 부름 받았다.

 

1) 윤리적 호소. 우리는 악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거룩에 이르는 과정엔 수동성이란 없다.

2) 교리적 호소. 사도들로부터 물려받아 우리에게 전해지고 모든 세대에 걸쳐 교회가 지켜 낸 교리를 위해 싸워야 한다.

3) 경험적 호소. 영생은 새 시대의 삶이다. 영생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속에 있다.

 

이러한 삼중적인 호소는 우리 시대에 극도로 적실하고, 균형이 잡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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