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러비드 (10주년 기념 리커버 특별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6
토니 모리슨 지음, 최인자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10월
평점 :
절판


토니 모리슨. <빌러비드>. 문학동네

 

한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백인 경찰의 잔혹한 진압으로 죽었다. 이런 일이 일어났던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고 너무나도 끔찍한 장면을 담은 영상이 전 세계로 퍼지면서 수많은 사람이 분노했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 역시 그 영상을 접하며 화가 났을 정도였으니...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BLACK LIVES MATTER #BLM 운동이 미국과 유럽 등 곳곳에서 불길 같이 일어났다.

 

전 세계가 분노하는 상황에 나도 화는 나지만 내가 화를 내는 것과 화면에 나오는 흑인들이 화를 내는 것에는 질적인 차이가 느껴졌다. 나면서부터 있었고 자라면서 접한 깊고 자연스러운 두려움과 분노가 언뜻 느껴졌다. 그 모습을 보면서 조금 더 알고 싶었다. 책 한 권 읽는다고 얼마나 알겠냐마는...그 순간 <빌러비드>라는 문구를 보았고 흑인 노예들의 아픔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기에 바로 주문하여 읽던 다른 책들을 잠시 접어두고 읽어나갔다.

 

끔찍한 노예제도


첫 문장을 이렇게 시작한다. “124번지는 한이 서린 곳이었다. 갓난아이의 독기가 집안 가득했다.”(13) 이후 124번지에 사는 엄마 세서와 어린 딸 덴버를 중심으로 하는 한 가족과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워낙 모르는 이야기이고 낯선 분위기인지라 처음부터 배경과 이야기가 마음에 와닿진 않았다. 나중에 몇몇 평들을 보니 당시 노예들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인생을 표현하기 위해 이야기가 갑자기 이리 튀고, 저리 튄다는 이야길 보았다. 정말 그랬다. 한참 이야기에 몰입하려고 하면 갑자기 관점과 배경이 바뀌면서 따라잡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도 장면, 장면마다 당시 흑인의 삶이 끔찍한 노예제도 아래에서 얼마나 고통스러웠고, 한이 서려 있는지를 문장, 문장이 가슴 아프게 묘사한다.

 

이 나라에 죽은 검둥이의 한이 서까래까지 그득그득 쌓이지 않은 집은 한 채도 없다. 그나마 아기 귀신이라 다행인 게야.”(17) “베이비 석스가 사랑했던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그저 알고 지낸 사람까지도 죄다 도망치거나 교수형을 당하지 않으면 다른 집에서 빌려가거나 임대되거나 팔려가거나 다시 사오거나 비축되거나 저당잡히거나 상으로 주어지거나 도난당하거나 잡혀갔다. 결국 베이비는 자식이 여덟 명이었고 아이 아버지가 여섯 명이었다. 그녀가 인생이 더럽다고 한 것은 체스 말에 그녀의 자식들이 포함된다고 해서 체스 놀이를 멈추려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46) “내가 아는 사람은 죄다 죽거나 사라지거나 죽어서 사라졌어. 그애만 아니야. 내 딸 덴버만. (76) ”그는 자신의 값어치를, 다시 말해 몸값을 알게 된다. 그의 몸무게, 그의 힘, 그의 심장, 그의 머리, 그의 성기 그리고 그의 미래를 달러로 매긴 가치를.“(371)

 

지옥에서 자녀를 지키기 위해 끔찍한 일을 저지르는 엄마, 세서


물론 소설에서 주인공 세서는 나름 자유로운 삶을 살았다. 딸을 데리고 살았고 자신의 직업이 있었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사랑도 나눈다. 너무나 괴로운 과거를 지나와서 그런지 자유로운 생각, 일상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간절하고 과장 되었다 싶을 정도로 행복해 보인다. 그러면서 별로 생각하지 않고 서로의 아픔을 잘 알기에 일부러 물어보지 않았던 과거의 괴로운 이야기가 원치 않게 드러난다. 태어난 지 몇 개월 안 된 딸 아이의 목을 엄마였던 세서가 톱으로 잘라 버린 것이다. 너무나 충격적인 일이라 소설이니까...하고 넘어갔지만 알고보니 이 내용은 실제로 19세기 미국의 신시내티에서 한 여자가 노예 사냥꾼에게서 아이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칼로 베어버린 사건에 저자가 자극을 받아 쓴 것이었다. 아니 왜....소설에서도 이 일을 이해하는 사람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로 나뉜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로 넘어가기 힘든 일이니까. 이 책의 후반부는 그렇게 죽은 딸 아이가 다 자라서 유령으로 찾아오는데, 그녀의 이름이 빌러비드. 이름도 없었지만 비석에 겨우 새겨진 이름. 엄마 세서는 빌러비드에게 자신의 정당함을 자신이 말라 죽기 직전까지 애가 타게 전한다. 세서는 스스로 이렇게 말한다. “너무 짙어. 그가 말했어. 내 사랑은 너무 짙다고....과연 그가 기꺼이 자기 목숨까지 바칠 사람이 있을까? 비석에 몇 자 새기기 위해 낯선 사람에게 자기의 은밀한 부분을 내주려 할까...엉덩이 치수를 재고는 갈가리 찢어버리도록...내 자식들은 절대 안 돼...내 자식들 없이는 절대 숨을 쉬지 않을 거야.”(333) 그리고 저자 역시 이렇게 말한다. “자식들은 그녀의 보배였다. 백인들이 그녀 자신은 더럽혀도 괜찮았다. 하지만 그녀의 보배만큼은, 그녀의 순결한 분신만큼은 그렇게 되게 할 수 없었다. 머리도 발도 없이 표시만 남은 채 몸통만 나무에 매달린 시체가 내 남편인지 폴 에이인지 고민하는, 그런 꿈으로조차 꿀 수 없는 꿈들은 더 이상 안 된다...학교에 불을 질러 부글부글 달구어진 여학생들 가운데 내 딸이 있는지, 백인 무리가 내 딸의 은밀한 곳을 침범하고 허벅지를 더럽힌 후 마차 밖으로 내던지지는 않았는지 괴로워하는 꿈들은 더 이상 꿀 수 없었다. 그녀 자신은 도살장 마당에서 몸을 팔지언정, 딸에게는 절대 안 될 일이었다...아무도 이 세상 누구도 딸의 특징을 공책의 동물적인 특징 목록에 적을 수는 없었다...세서는 필사적으로 거부했었고, 지금도 거부했다”(409)

 

지옥 같은 과거는...?


지구 반대편에 사는 나 같은 사람이 소설로 읽어도 충격적이고 가슴이 멍해지는데, 이런 역사가 있는 미국의 흑인들이 그 괴로운 기억과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저자는 놀라울 정도로 사랑을 긍정하며 괴로운 어제를 당당하게 마주해야 한다고 보는 것 같다. 세서 못지않은 고통스러운 과거를 가진 폴 디는 세서의 충격적인 과거를 알고 도망치지만, 다시 돌아와 세서의 손을 잡으며 그녀와 미래를 함께 하자고 한다. 그리고 엄마와 자기 언니의 그 두려운 사건을 알았던 또 다른 딸 덴버. 덴버 역시 엄마가 두려웠다. 엄마를 사랑하기에 오빠들처럼 도망칠 수도 없었다. 그러다 유령으로 돌아온 빌러비드 언니 때문에 말라 죽어가는 엄마를 내버려 둘 수 없어 용감한 선택을 한다. “...124번지 현관에 선 그녀는 현관의 경계 너머의 세상에 잡아먹힐 각오를 했다....엄마가 말했듯이, 나쁜 일이 그녀를 기다리는 곳...저 밖에는 백인들이 있다는 것이다.”(397) 덴버의 사랑이 두려움을 이기고 문밖으로 나가는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을 뛰게 한다. 저자는 이 어린 흑인 아이의 행동을 통해 차별받는 동료들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모진 현실이지만 저 밖으로 나가지 않고서는 지옥 같은 과거에 갇히게 된다는 것을...무섭지만 함께 사랑하며 현실을 살아가고 미래를 맞이할 때 힘들지만 그 아픈 과거도 품으며 살아갈 수 있다고.

 

토니 모리슨. 인종 차별을 주제로 한 <가장 푸른 눈>으로 데뷔했고 이후 10여 편의 소설과 여러 에세이를 썼다. <솔로몬의 노래>, <재즈>, <빌러비드> 등이 탁월한 문학성과 함께 대중적인 인기를 얻으며 여러 상을 받았고, 1993년에는 흑인 여성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기까지 했다. 중요한 건 이 유명한 사람과 이 유명한 소설들을 내가 하나도 몰랐다는 것^^;;; 책을 읽으며 이렇게까지 마음이 요동치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책을 읽으면서 수많은 차별로 인하여 고통받는 사람들이 떠올랐고, 그 사람들의 눈물과 가슴 아픈 외침을 대변해주는 말들이 소설 곳곳에 있었다. 이에 대해서도 몇 마디 쓸 수 있겠지만 이 책을 좀 더 천천히 읽으며 흑인들의 가슴 아픈 과거 정도만이라도 좀 더 알 수만 있어도 좋겠다.

 

폴 디의 말은 아마도 BLM을 외치는 흑인들을 대신 해주는 것 같다. “대체 검둥이는 얼마나 참아야 합니까? 말 좀 해보세요. ? 참을 수 있을 만큼 참아야지...참을 수 있는 만큼....왜요? ? ? ? ?”(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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