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시 - 상
살만 루시디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세계사 / 2009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어쩌면 악명 높은 책이라고 해야할까. 어떤 책을 썼다고 해서 그 작가에게 현상금과 함께 사형선고가 내려지고, 책이 진열된 서점이 테러를 당해 무고한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고, 번역자가 칼로 난자당해 죽는가 하면, 영국과 이란은 외교분쟁을 겪기도 했다..  

그런데 나는 어떻게 이 책을 읽게 되었는지..? 대부분의 책에 대해서는 어떤 계기로 그 책을 선택해서 그 시기에 읽기 시작했는지를 다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책을 읽고 나서 블로그에 이런 글을 뚜닥거릴 때 거의 그런 계기부터 적어놓곤 했다. 그런데 이 책에 대해서는 그런 계기가 생각이 나질 않는다. 또 다 읽는데 열흘 정도 걸렸는데 왜 열흘 전에 수많은 쌓인 책 중에 이 책을 집어들었는지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이상하게도 나에겐 이런 게 중요하게 느껴진다..  

다 읽고 나서 가장 놀란 것은 이 책이 그저 '소설'이었다는 것이다. '소설'이란 무엇인가? 소설이란 그 정의부터가 작가가 꾸며낸 '있을 법한 일'이지, '있었던 일'인 사실이거나 '액면가의 진실'을 담고 있는 것은 분명 아니다. 이렇게도 생각해보자고, 더욱 단순하게 얘기하면 '웃자'고 꺼낸 이야기인데, 여기에 대해 '죽자'고 칼을 들다니. 난 이슬람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잘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무런 판단도 내리지 않으려고 하였지만, 이 소설에 대한 이슬람 국가의 반응이야말로 이슬람을 부정적으로 볼 만한 강력한 이유가 된다고 생각한다. 맘에 안들었다면 그냥 비난 성명 한 장이나, 자국내 판매 금지 정도로 끝낼 수는 없었던 것일까(물론 그 정도만 했어도 다른 나라들에겐 대단한 웃음거리가 되었겠지만 말이다). 꼭 죽이겠다고 칼을 들고 작가를 쫓아다니고, 번역자를 죽이고, 무고한 (하긴, 그들의 입장에서는 못된 출판사와 관련된 서점에 드나드는 사람은 모두 죄인이니 결코 무고하지 않다고 주장할지도 모르지만) 사람들까지 상하도록 테러나 해대다니. 이슬람이 자기들의 신과 예언자를 내세워 세상의 다른 종교나 무신론자와는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고 주장한다면, 세상의 다른 모든 종교들과 무신론자들은 그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이슬람 박멸을 외쳐야 할 것이다.  

소설을 둘러싼 사건에 대한 감상은 이정도로 하고.  

소설은 지금까지 읽었던 다른 어떤 소설보다도 정신 사나운 소설이었다. 폭발하는 비행기에서 떨어지면서 노래를 부르는 남자로부터 시작하는 것도 정신 없는데, 꿈과 현실과 마술적 현실(?)이 뒤섞인 구조에, 주어가 나오면 마침표는 대여섯 줄은 지나가야 찍히고, 게다가 영어와 각종 영어 사투리와 가지각색 인도어와 고전으로부터의 온갖 인용이 역자의 꼼꼼한 주석과 함께 들어오는 통에 도대체 이 문장의 시점은 무엇이고 내가 이 집의 어느 방에 서있는지를 파악하는 것도 정말 한참 걸렸다. (잠깐 딴길로 새서, 30년전 출판된 발자끄의 <사촌 베뜨>도 찔끔찔끔 읽고 있는데 여기엔 정말 "역자주'가 없다. 역자의 주석이 자세하게 달려 있으면 물론 세밀한 뜻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만, 그렇다고 해도 본문 중에 자주 끼어드는 역자주석은 아무래도 읽는 흐름을 자꾸 끊는다. 뭐랄까, 역자가 독자에게 작품을 떠먹여주는 느낌으로, 나는 '됐어요' 하는 축이다.). 그러나 일단 현실(마술적 현실(?) 포함)과 꿈이 대충 구분이 되고, 이게 누가 하는 말인지 파악되기 시작하면, 천사 같지 않은 천사, 악마 같지 않은 악마를 따라 무엇이 신이고, 무엇이 악마인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꿈인지, 만화경을 보듯, 퍼즐을 풀 듯, 미로를 짜맞추듯 머리를 쥐어짜며 읽게 된다.  

(여기서부터는 읽지 않은 이에게는 스포일러임)  

그러니까 정리를 하자면, 모든 인도인에게서 사랑을 받는, 발리우드의 수많은 영화에서 주로 신의 역할을 맡았던, 인간적으로도 '사랑'의 능력이 넘치는, 이름도 천사의 이름인 지브릴 파리슈타와, 인도인이지만 영국으로 유학을 가서 가능하면 뼛속부터 자신을 영국인으로 재창조하려는, 천의 목소리를 가지고 TV 성우로 일하며 주로 외계인이나 사물들의 목소리 연기를 하던, 이름도 웃기는 살라딘 참차가 같이 탄 비행기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에게 납치된 후 공중에서 폭파되는데, 에베레스트 높이에서 영국으로 낙하하면서 두 사람은 살아남는다. 그리고 땅에 떨어지는 순간부터 지브릴은 천사의 모습으로 (날개는 없지만 머리 뒤에 후광이 달린), 살라딘은 악마의 모습으로 (머리에 뿔이 나고 허리 아래는 염소 모양으로 바뀐다) 변한다.  

그렇다면 지브릴은 천사가 되고 살라딘은 악마가 된 것이냐? 하면 그건 아니다. 겉모습은 천사요 악마이지만, 둘 다 자신의 몸이 변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며, 생각하는 것도 천사답거나 악마답지 못하다. 자신의 모습이 천사와 같이 후광을 머리에 얹었다고 해서 지브릴이 갑자기 선한 생각을 하고 선한 일을 할 능력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지브릴은 '사랑'의 능력과 함께 굉장한 바람둥이였다), 악마처럼 뿔이 나고 염소 발굽이 생겼다고 해서 살라딘 참차가 갑자기 사악한 생각을 하고 사악한 짓을 하는 것도 아니다. 천사의 모양을 한 지브릴은 영화를 보듯 꿈을 꾸는데, 꿈 속에서 자신은 대천사가 되어, 어떤 꿈에서는 마훈드 -혹은 무하마드- 에게, 어떤 꿈에서는 망명자 이맘, 어떤 꿈에서는 여자 예언자 아예사에게 계시를 내린다 (계시를 내린다고는 하지만, 지브릴은 항상 자기는 아무 말도 않거나 (아예사), 그들이 시킨 말을 하거나 (망명자 이맘), 마훈드의 경우에는 아예 자신이 마훈드이면서 대천사로서 말을 한다고 느낀다). 한편 더욱 비참한 모양으로 변한 살라딘은 꿈은 거의 꾸지 않지만, 일생동안 오직 진정한 '영국인'이 되기 위해 소심하고 착하게 살아온 결과물이 이런 것인가에 대해 절망하면서 그저 숨어지낼 뿐이다.  

그러다가 어느날 살라딘은 갑자기 완전한 인간의 모습으로 되돌아오지만, 지브릴은 갑자기 머릿속에서 음성을 듣고 나팔을 사서 들고 다니며 자신이 진짜로 천사로서 신의 뜻을 대변한다고 생각한다. 지브릴을 사랑하는 알렐루야 콘 (에베레스트를 정복한 금발의 얼음여왕이며, 애초에 지브릴이 인도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영국행 비행기를 타도록 만든 여자)은 지브릴의 '정신분열증'을 치료하려 노력하고,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살라딘 참차는 알렐루야 콘과 함께 있는 지브릴을 보고 새삼 질투와 원한(처음 악마의 모습으로 변해서 경찰에 끌려갈 때 자신을 외면한 지브릴)에 사로잡혀 정말로 사악한 짓을 해서 커플을 갈라놓게 되고, 살라딘은 가책을 느끼지만 지브릴은 완전히 파괴되고 만다.  

아무튼 나로서는 천사가 되었다는 지브릴이 예쁘게 보였던 적이 없었고, 악마가 된 살라딘이 가엾지 않은 적도 없었다. 딱 한 페이지에 걸쳐, 이 소설의 진짜 화자 -신인지 악마인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지브릴과 살라딘을 선택해서 각자를 천사와 악마로 변형시킨 그 이-가 등장한다. 그런데 그분은 왜 하필 지브릴이고, 왜 하필 살라딘이었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단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 이게 옳은지 저게 옳은지 밝혀달라고 요구하지 말아라. 계시의 시대는 오래 전에 끝난다. 창조의 규칙은 명확한 편이다: 이것저것 만들어 차려놓은 다음에는 그냥 내버려둬야 한다는 것이다. 만들어 놓은 뒤에도 넌지시 힌트를 주거나 규칙을 바꾸거나 결과를 조작하거나 하면서 일일이 간섭한다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2권 p176)'고, 그러니까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고 떠드실 따름이다. 그러니까 도대체 왜 이분이 처음부터 불쌍한 지브릴, 불쌍한 살라딘, 불쌍한 인간들을 데리고 천사 만들기 악마 만들기 놀이를 했냐는 것이다. 그것도 겨우 겉모양만 바꾸는. 겉모양을 바꾸어 주면 속도 겉모습에 어울리도록 바뀌는지 보고 싶었나? 그런데 창조의 규칙을 아는 분에게 이런 실험이 왜 필요한가? 어차피 자기가 정한 규칙대로 갈텐데 말이다..  

어쩌면 그가 규칙을 만들었지만, 규칙을 따르고 따르지 않고 하는 것은 인간의 선택에 달린 건지도 모른다. 즉 인간은 천사 옷을 입히면 천사가 되고, 악마 옷을 입히면 악마가 되는 단순 명쾌한 존재가 아닌 것이다. 아니면 애초에 '창조의 규칙'을 정한 자 따위가 없든지……. 그래서 지브릴은 총알을 삼키고, 살라딘은 후회를 하는지도.  

위키에서 이 소설을 둘러싼 논란에 대해 찾아보았다. 내가 처음에 생각했던 것처럼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구나. 이 소설이 이슬람권에서 그렇게 강력한 반발을 일으킨 원인에 대해서, 원제인 'satanic verses'를 아랍어로 번역했을 때, 그것이 '악마적인 꾸란'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 이슬람이란 문화에서 '소설'이란 장르에의 노출이 적다는 점, '풍자'와 '패러디'에 익숙하지 않다는 점들을 고려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 그런 문화 속에서라면 애시당초 이 소설이 '웃자'고 달려든다는 것을 몰랐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서구인들은 이슬람에서 그런 반응을 보이기 전에는 소설의 '예언자 마훈드'가 이슬람교의 '무하마드'인지도 대부분 몰랐었다고 한다. 이슬람 세계가 그렇게 작정하고 칼을 들고 나선 덕분에 서구인들은 오히려 이 소설이 그저 풍자이거나 패러디가 아니라 이슬람에 대한 일말의 진실이라도 담겨 있는게 아닌가 하는 식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노이즈 마케팅에도 성공적이었고 말이다. 하여튼 무슨 일이든 내가 보기에 '미친 짓'으로 보이는 일은, 상대방 입장에서 두세 번은 더 생각해 보고, 더 나아가서 그 입장에서 인정하겠다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한편, 위키의 기사에서 몇몇 타 종교의 대표자들도 이슬람의 행동을 지지 했다고 한다. 어떤 종교에 대한 모독이든 신성모독은 '믿음'을 가진 이들에게 상처를 준다는 이유로 말이다. 내가 이 책을 읽고 하는 생각들을 보면, 이분들이 이해가 된다. 이 소설의 신은 '알라 외에 신은 없다'는 이슬람의 신이지만, 사실 모든 유일신교의 대표자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아무래도 완전한 무신론으로 기울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은 그냥 소설, 어디까지나 '이야기'일 뿐이다. 소설 속의 시인 바알의 입을 빌려, 작가는 시인이 해야 할 일을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것, 거짓을 손가락질 하는 것, 어느 한 편에 서서 논쟁을 일으키고 세상을 가다듬어 잠들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그 정의에 입각해서, 어쩌면 천벌 받을 각오를 하고, 그 밖의 것을 인정하지 않는 신을 공격하고, 그의 손에 제대로 놀아나지 못하는, 그래서 가엾으면서도 떨어져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인간을 그린 것일 뿐이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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