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고통 - 노동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어느 과학자의 분투기
캐런 메싱 지음, 김인아 외 옮김 / 동녘 / 2017년 10월
평점 :
절판


어떤 책을 읽고 인생을 바꿔야 한다면 이 책이다. 뜨거운 가슴으로 차갑게 쓰여진 책이고 그만큼 쉽고도 괴롭게 읽힌다. 읽는 내내 죽비 같은 것이 내 머리를 후려치는 느낌이었다. 캐나다의 노동자들의 환경이 이러할진데 도대체 우리나라에서는 무슨 일들이 벌어지고 있을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역자들이 모두 작업환경전문의인데 그런 전문의가 (정말 부끄럽게도)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있는지도 몰랐다. 내가 수련받은 병원에도 있었던가? 있는 걸 알았다고 하더라도 전공과를 선택해야 했던 그 때는 지금보다 훨씬 근시안이었고 내 새끼손가락의 고통을 다른 사람의 단말마의 고통보다 더 크다고 생각했었기에 이 과를 선택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 책은 특히 과학자들의 ‘공감 격차’를 우려하고 있다. 자신이 과학자로서 노동자의 편에 서서 공감 격차를 줄이고 노동자의 작업 환경을 개선하고 건강과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일생을 ‘싸워 온’ 저자다. 노동자의 ‘편에 섰다’는 것부터 그는 중립이니 불편부당이니 하는 과학의 신화를 맹신하는 과학자들에게는 진짜 과학자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이 그 가치를 판단하지 않는 것은 없으며 판단이 개입하는 순간 중립도 불편부당도 눈속임일 뿐이다. 오늘날 판단의 저울은 누구의 선에 들려 있는가? 바로 자본이다. 자본이 과학자를 사고 과학자는 얼마든지 그 자본에게 유리한, 그렇지 않으면 최소한 불리하지는 않은 결과가 나오도록 연구를 설계할 수 있고 적절한 표현을 이용해서 결과를 포장할 수도 있다. 물론 그것을 인정하는 과학자는 한 사람도 없겠지만.

사실 완전한 ‘공감’이란 정말 그 자신이 되어보기 전에는 성취하기 어려운 것이다. 또한 그 사람의 입장에 일시적으로 서게 된다 하더라도 나 자신이 그곳에 영원히 머무르지 않을 것이라는 알고 있다면, 어쩔 수 없이 계속 그 자리에 있을 수밖에 없는 사람과는 다른 생각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최저생활비로 한번 살아보라고 시켰더니 마트에서 세일하는 햄 같은 것을 사다가 상을 차리고 ‘황제의 식탁’ 운운 했던 과거 모 국회의원의 태도는 카메라에 찍혀서 알려졌기에 비난의 대상이 되었던 것일 뿐 나라는 인간도 별반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가 ‘완전한’ 공감을 원한단 말인가? ‘완전’은 불가능하지만 공감의 ‘격차’를 줄이는 일은 가능하고 당연히 해야할 일이다. 위의 국회의원을 경멸하는 것은 처음부터 공감에 대한 의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없어도 되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그렇게 천박해질 수 있는 것이다. 완전한 인간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천박한 인간이 되는 것은 그저 천박한 선택일 뿐이다.

결론: 나 자신의 공감 격차를 점검하고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하는 훌륭한 책. 그러나 20년은 늦게 읽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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