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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람스를 좋아하세요...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9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평점 :
실내장식가인 서른아홉 살의 폴은 외로움을 짙게 느낀다. 오랜 연인 로제가 있지만 언제나 차갑게 식은 널따란 침대를 바라보며 폴은 고독에 잠식되어 갈 뿐이다. 폴과 로제는 6년을 만난 오랜 연인 사이지만, 로제는 다른 여자와 하룻밤 밀회를 즐기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폴은 로제의 늦은 연락을 기다리며 쓸쓸히 늙어가는 자신의 모습에 비참함을 느끼는 중이고. 두 사람 사이에는 분명 견고한 무언가가 있지만, 그것이 그렇게 애써 지켜여할 만큼 가치가 있는 것은 잘 모르겠다.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묶인 두 사람 사이에는 모순적이고 모호한 감정들이 자리 잡아 정말 사랑이 존재하는 게 맞는지 가끔은 의아스럽기도 하다.
폴은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스물다섯 살의 시몽에게 마음이 끌린다. 시몽은 로제가 주지 않는 열렬한 사랑에 폴에게 바친다. 언제나 그녀를 지켜보고, 그녀를 위해 늦은 밤 도로를 달리며, 그녀의 사랑을 갈구하고, 그녀의 사랑에 환희한다. 폴은 그런 시몽의 마음이 부담스러우면서 그의 관심에 기뻐한다. 그러나 폴은 자주 무기력하고 자주 고뇌에 휩싸여있다. 폴은 시몽의 모습에 모성애를 느끼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에게 답답함을 느낀다. 그리고 전 연인인 로제를 떠올린다.
시몽과 로제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한 폴의 감정을 이해하면서도, 갈팡질팡하는 그녀의 모습이 답답하게 느껴졌던 것은 사실이다. 폴에게 있어 로제 의지할 수 있는 연인이자, 고독에 휩싸이게 하는 결정적인 이유다. 로제는 폴을 사랑하면서도 언제나 자신의 자유를 찾아 떠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폴이 그 자리에서 자신을 기다리지 않을 것을 초조해하는 상당히 이기적인 인물로도 보인다. 구속을 싫어하는 자유를 원하지만, 폴을 사랑이라는 명목으로 곁에 두고 싶어 하는 상당히 모순적인 인물이랄까. 반면 시몽은 로제와 다르게 오로지 폴만을 원한다. 폴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두고 자신의 인생마저 돌보지 않는다. 폴에 의해 삶이 결정되고 감정이 널뛰는 사람이 시몽이다. 로제와 시몽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폴의 모습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시몽의 물음은 폴이 잊고 있던 모든 것을 환기시켰다. 자신의 삶에서 놓치고 있던 모든 것들을. '브람스를 좋아했던가' 하고 생각하게 했던 시몽의 물음은 폴에게 자그마한 설렘으로 다가왔을지도 모른다. 로제에 대한 사랑이 확실한 것인지 자문하게 될 만큼. 그럼에도 폴이 시몽이 아니라, 폴 자기 자신의 삶이 아니라 로제에게 다시 돌아간 이유는, 현실을 너무 깨달아서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아름다웠던 시몽과의 나날들을 떠올리면 당연히 시몽을 선택했어야 옳지 않았을까 싶지만, 로제에게 돌아가는 게 어쩌면 지독히도 현실적이며 알맞은 결말일지도 모르겠다. 로제에게 돌아감으로써 폴의 끝없는 고독은 계속되겠지만.
폴이 자신의 삶을 사랑하기를 바랐다. 로제가 아니고 시몽이 아닌, 자기 자신의 삶을 아끼고 보듬고 사랑하는 것. 브람스를 좋아하냐는 시몽의 물음이 잊고 살았던 여유와 평안함을 되찾아주는 계기가 되었으면 했다. 무언가에 매여 전전긍긍하는 폴이 아니라 당당하고 빛나는 삶을 살아갈 것. 하지만 폴은 여전히 로제와 함께할 것을 선택했기에 역시 그 결말이 마음에 들진 않는다. 누구든 쉽게 선택할 수 없었던 폴을 이해하지만 꼭 굳이 그런 선택을 해야만 했는지 다소 답답하기도 하다.
작가는 사랑의 덧없음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한다. 사랑으로 엮인 세 남녀의 모습에서 사랑의 덧없음은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기에 작가의 의도대로 잘 반영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가려진 혼란스럽고 모호한 감정들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던 작품이다. 조금 더 나이가 들어 읽으면 또 다른 느낌을 받게 되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