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익은 커피를 사서 늘 앉던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열었다. 검토해야 할 자료 목록이 펼쳐졌다. 오익은 고개를 돌려 유리 밖을내다보았다. 건너편 술집 앞에서 백발의 남자와 젊은 남자 둘이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 P171

우울증인가?
KUSH우울증? 우울증에 걸리면 그러니? 정서방이 그렇게 돈을 잘 번다는데 집에서 포실하게 살림하는 애가 왜 우울증에 걸리니?
그건 오익도 알 수 없었다. - P173

그러면서 어머니도 점점 오숙을 닮아가는지 낮이고 밤이고 전화를 걸어왔고, 가끔 전화를 안 받거나 꺼두면 반응이 올 때까지집요하게 문자며 카톡을 해대는 통에 오익은 보통 성가신 게 아니었다. - P176

맥줏집에 도착해서 유회장과 청과 일을 하는 철호는 전화를 걸거나 받았고 안경점 김씨와 방여사는 화장실에 갔다. 혼자 창가자리에 앉아 있던 오익이 안주로 나온 구운 노가리를 손질해놓고손을 냅킨에 닦고 있을 때 문자 알림음이 울렸다. 문자함을 열어보낸 장문의 메시지가 주르르 펼쳐졌다. - P177

넌 이게 웃을 일이니?
아니, 그게……… 오익은 웃음을 누그러뜨리고 말했다. 토사구팽은 그렇다 쳐도 구밀복검이나 교언영색은 너무 우습잖아요? - P181

원채요?
전생에 진 빚이다.
원죄와 같은 것인가, 오익은 생각했다.
원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들어보라며 어머니가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 P185

정을 무슨 수로 줘요? 전화도 안 받는다면서요?
마음으로 주는 거지. 진심을 다해 정을 주면, 정은 다 통하게 돼있다. - P187

하여오는 疲勞!
가슴치밀어노는 火氣!
찔으고, 쏘는 苦痛!!
그의게는 이런모든것을 하기는아즉도 넉넉한 餘生이 남아잇더라. -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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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생각을 할까 해.
소용이 없더라도 말이야.

노래가 들려온 건 제작실 서문 쪽에 있는 반 층짜리 계단아래였다. -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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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말했다. "9월이라는 걸 잊지 마세요."
1 "큰 고기가 나오는 달이지." 노인이 말했다.
- 어니스트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 중에서 - P189

알고 나면 다르게 보인다.
내가 맛본 음식, 귀에 익은 음악과 익숙한 내음.
내가 겪은 일, 눈앞의 풍경.
SH그렇게 경험과 공감의 테두리를 넓혀간다.
‘그 이야기‘가 ‘내 이야기‘가 된다.

가족이란 참 이상하고 신기한 존재다. 배우자는 내가 선택하지만, 부모와 자식은 서로 선택하지 않는다. 삶의 많은것이 그렇듯 서로에게 그저 주어진다. 우리는 서로를 선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 함께 여행한다.
따로 또 같이. 틈만 나면 기를 쓰고. - P200

여러 번의 기차 여행을 했다. 우리는 스리랑카 구석구석을 기차를 타고 돌아다녔다. 스리랑카 기차에는 문이 없다.
사방이 열린 채 기차가 달려가는 풍경은 파도치는 바다였다가 깊은 산속 가파른 계곡이었다가 짙은 초록빛 차 밭이 끝도 없이 펼쳐지곤 했다. 나는 문 앞에 걸터앉아 발아래 스쳐가는 배경이 시시각각 바뀌는 것을 구경했다. - P207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는 역에 내려서 짜장면을 먹고 아무도 없는 역사에서 풍금을 쳤다. 새로운 도시에도착하면 지역서점을 찾아갔다. 어느 도시에 가도 작은 동네서점이 하나쯤은 있었다. 카페에 가면 한 잔씩 음료를 주문하듯 우리는 서점에 들를 때마다 책을 한 권씩 샀다. 그리고그 책을 기차나 숙소에서 읽었다. 책은 좋은 기념품이다.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가장 비싼 게 시간이라면, 시간을 사는 방법으로 책만 한 게 없다. - P211

아이는 내일을 향해 있다. 당연히 다음이 있을 거라고 믿는다. 그리고 나도 얼이와 함께 내일로 달려가는 동안, 내일을 기대하는 법을 배웠다. 이제는 내 바람을 미뤄본다.
다시 올 거야. 다음은 더 좋을 거야. 우리는 계속 내일로여행할 거야. - P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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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지금보다 훨씬 긴 여행이 시작될 것이다. - P155

존재는 취향이나 호오의 범주가 될 수 없다.
개를 좋아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혹은 아이를 좋아하거나 싫어하거나이미 존재하는 대상에 대한 나의 기분 같은 건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 P156

정답은 ‘치사랑 나는 그 단어를 몰랐다는 것보다 그 단어가 그토록 생경하다는 게 더 신기했다. 내리사랑이라는 단어는 그토록 흔하고 자주 쓰는데, 치사랑이라는 말은 이렇게낯설다니. - P161

나는 얼이에게 모든 것을 아낌없이 줄 수 있고 목숨조차주저 없이 언제라도 던질 수 있지만,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내 세계 안의 얼이보다 지금은 얼이 세계 속의 내가 더 크다.
나는 얼이의 전부이고 우주여서, 그래서 얼이는 언제나 내게자기 전부와 온 세상을 준다. - P162

그 비행기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가족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을 테지만, 우리는 가족이 다 함께 있었으니까. - P171

호텔에서는 크리스마스이브 늦은 밤에 도착한 우리에게 마구간을 내어주는 대신 예약한 방을 바다가 보이는 테라스가 있는 스위트룸으로 바꾸어주었다. - P172

우리는 신선한 잼과 과일, 따뜻한 차와빵, 그리고 손바닥만 한 아보카도가 놓인 테이블에 앉아 아침을 먹으면서 테라스 너머로 벌새가 나비처럼 날아다니는풍경을 보았다. - P180

에어컨도 없고, 와이파이도 없고, 생필품에 이어 이제 우리는 돈도 없었다. 그때부터 또 다른 여행이 우리앞에 펼쳐졌다. - 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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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의 풍속은 영 - P134

황인찬이 가진 아이러니는 그가 바라 마지않는 영원이 이러한 폭력적인 시적 현실에서 실현되도록 하는 재현의 방식에 있다. 의미의 층위에서 삶과 죽음, 상실과 부재, 인식과재현이 서로의 자리를 엎치락뒤치락하며 사랑의 역설을 만들어냈다면, 시적 재현 그 자체의 층위에서 황인찬의 아이러니는 이미지의 세계에 머물고 있다. - P134

고착된 이미지는 움직이지 않지만 시인의 목소리에 의해 그것은 흐르고, 정지와 운동이 충돌하며발생시키는 이 아이러니가 바로 죽음을 불가능하게 만든다(시의 제목을 다시 떠올려보라). 시와 서정, 그리고 퀴어가만나 만들어내는 새로운 서정은 바로 이런 것이라고, 황인찬은 말한다. 이곳에서 사랑은, 드디어 영원하다. - P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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