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별로 없었으므로 가방에서 몰래 두꺼비를 꺼내도주인은 세 병까지는 눈감아주었다. 눈이 내렸고 엉망진창으로 취해서 나왔는데 남자애들이 어른 셋과 시비가 붙었다. 어른들은유행하는 황토색 워커를 신고 있었다. - P265

선숙의 집을 나서기 전, 운주는 선숙의 주민등록번호가 적힌메모를 챙겼다. 메모 옆에 다른 종이가 놓여 있었다. 모든 변이 깔끔하게 잘린 이면지에는 운주의 주민등록번호를 적어놓고 가라는 지령이 적혀 있었다. 한 삼 년쯤 걸리려나? 선숙이 S에게 수술을 받고 운주의 예약 순번이 돌아오기까지는. 운주는 자신의 주민등록번호를 적으려다가 그만두었다. 선숙이 그것으로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 P267

그날 이후로 나는 시계를 보다 문득 다섯 시간을 더하곤 한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시각은 새벽 3시 33분인데(진짜다! 라임을 맞추려고 지어낸 게 아니다!) 속으로 ‘8시 33분이네. 벌써 출근했겠다‘ 하고 생각한다. 생각은 자연스레 밤부터 새벽까지 일하는 심야 노동자들, 쿠팡의 새벽 배송 기사들에 가닿는다. 신체의 일주리듬을 교란하는 시간대에 일하는 것은 심장질환을 비롯한 여러질병을 야기한다. - P269

식당 홀을 알뜰하게 쓰려고 테이블을 붙이는 바람에 꺾이고 마모되는 뼈와 관절을 생각하면 ‘등골을 빼먹는다‘는 표현이비유가 아님을 알게 된다.
등줄기를 따라 내려가는 손을 따라 일하지 않던 때로 돌아가는몸. 노동은 어쩌자고 이렇게 고통일까. - P271

운주는 타인의 고통과 노력을 "흥분을 북돋기에는 나쁘지 않은에피소드" (258쪽)쯤으로 여기면서 "드라마틱하게 탈바꿈" (259쪽)하고, 선숙이 이러한 "역사 왜곡에 동참"(같은 쪽)하기를 바란다.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열정을 쏟는 대신, 더 강하고 거칠었기에 생기 있었다고 믿던 추억 속 이상적인 자기 이미지를 안전하게 소비하는 일에만 몰두한다. - P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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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재원의 취미는 취미 이상의 취향을 내포한다. - P226

하지만 아무도 없는 이 집은 재원에게 안전할지언정, 따뜻하는 않다. 재원은 상미와 영상통화를 하며 자기도 모르게 울먹이는데, 이때 재원이 느끼는 슬픔은 상미와 세라를 향한 그리움인동시에 수치심, 외로움, 불안을 촉발한 퀴어 정동을 모두 끌어안은 감정에 가까워 보인다. - P235

프로이트가 성적 주체로서의자기발견이 있어야 진정성을 추구하는 삶이라고 푸코가 끊임없이 자기를 생산하고 발명하는 것이야말로 자아 미학이자 윤리적삶의 태도라고 주장했듯이 재원의 하루는 ‘나‘를 무너뜨리고 또다시 ‘나‘가 되는 그 과정의 한 장면으로서 충분히 의미 있다. - P235

남편이 마음을 먹기 전까지는 희망이 있었다. 문제의 다짐은이른바 남성성 상실과 관련된 것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남편의자발적인 존재 축소가 아내에게 미치는 영향에 관한 건. - P241

"삼삼칠 박수 쳐줘." 운주가 말했다.
경수가 무릎을 꿇었다. 이
"충남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는 우제라는 친구가 있어."
"내가 우제를 몰라? - P245

"어, 몰라. 네가 알던 사람이 아니니까. 우제가 채식주의자가되었어. 구제역 파동 때 살처분 현장을 목격하고는 다시는 육식하지 못하는 몸이 되었어. 어떤 것은 알게 되면 과거로 돌아갈 수없어. 머리로는 그럴 수 있을 것 같은데 몸에서 아예 안 받아버려.
나에게도 불가역적인 변화가 일어났어." - P245

좋아하는 가수, 저주하는 교사, 성격 그리고 혈액형으로 노는무리가 나뉘었다고 증언하길 바라겠지만, 현실은 대단히 명료하고 심플하여 같은 아파트에 사는 애들끼리 놀았다. - P249

・밤마다 애를 잡으려고 시속 십 킬로미터로 골목을 누비고 다녀. 뒤에서 차들이 빵빵거려도 무시하고 차창에 얼굴을 붙이고 거리를 훑어. 며칠 전에는 애를 노래방에서 끌고 나왔는데비디오방이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그제는 애가 친구를집에 데려와 재웠는데 오늘은 애 안 찾고 편히 자겠구나 싶어서고맙더라. 친구 아빠가 애를 장난 아니게 패서 집에 못 들어간다던데 배우고 싶더라고. 우리는 애 어릴 때 때리질 않아봐서 지금도 못하거든." - P252

운주는 새 동네에 옛 친구들을 불러들였다. 다시 오토바이를타고 다녔고 머플러에 종아리를 데었다. 운주에게는 선숙이 필요했다. 살면서 초라함을 느낄 때마다 운주는 선숙을 통과하여 스스로를 고양했다. - P253

지문으로 지저분한 유리문을 밀며 빌라에 들어선 운주는 오늘의 일일야성野性이 기다려졌다. 몇 년 사이에 유행한 그 말은하루 동안 야성을 되찾는다는 뜻으로, 주로 캠핑을 떠날 때 사용했다. 아니면 갑자기 월차를 쓰고 출근하지 않을 때라거나. 산세가 깊어 캠핑 스폿으로 유명한 모 지역은 군의 슬로건까지 바꾸었다. J군에서 보내는 일일야성. 문명이 지워낸 나를 다시 찾는하루. - P254

"나 그 얘기 하면 잠 달아나는데."
선숙이 부스스 일어나 이야기를 시작했다. - P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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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세계가 그렇다고 해서 소설 속에 비추어진 세계마저 종잡을 길 없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 P156

그러니까 소설은 세계를 비추되 다르게 비춘다. - P157

예컨대 소설 독자들은 현실이 아니라 현실에대한 작가의 해석을 읽고 싶은 것이며, 작가의 해석을통해 재구성된 현실을 만나고 싶은 것이다. 작가인 거울. 작가의 욕망이며 세계관인 거울의 반사면. - P138

상징과 은유와 이미지를 적절하게 이용하라. 지하에도 물이 흐른다는 걸 생각하라. 지하 깊은 곳에암반층이 있다는 걸 잊지 말라. - P163

소설 속에서는 어떤 시시한 사건도 ‘그냥‘
일어나는 법이 없다. 역설이다. 그리고 그것이 현실이더 소설 같고 소설이 더 현실 같은 이유다. - P167

안개나 비도 그냥 내리지 않는다. 현실 속에서는어떤지 모르지만 소설 속에서는 내릴 만할 때 내리고표현할 이미지가 분명할 때 내린다. 그것들이 만드는분위기와 이미지가 소설의 몸을 이룬다. 때때로 공간이 곧 캐릭터라고 말해지는 것은 이런 경우다. - P170

어울리지 않는 장식은 하지 않은것만 못하다. 사람이 멋있으면 좋지만 그보다 먼저 진실해야 하는 이치다. 멋은 진실이라는 기반 위에서만의미를 갖는 가치다. - P177

스승에게 배워야 한다. 그러나 스승의 둥지를 벗어나 자기 날개로 날아야 한다. 그러니까이 책의 내용도 잊어버려야 한다. 잊어버리고 소설을써야 한다. - P189

경험과 교류는 그것 자체만으로는 어떤 소설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소설을 탄생시키는 것은 그가 읽은 소설들이지 그가 한 경험들이 아니다. - P201

소설에 임하는 자세(의식)가 소설 쓰기(기술)에 앞서야한다는 나의 소신 때문이다. 소설 쓰는 기술을 익히기에 앞서 소설가로서의 의식에 철저해지는 것이 중요하다. - P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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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 말을 하게 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작가의 선택이다. 각각 장점이 있고 단점도 있다. - P141

작가는 의도와 효율성에 따라사건과 화자의 층위를 자유롭게 정할 수 있다.
유념할 한 가지는 화자의 층위를 일관성 있게 유지하는 것이다. - P142

예컨대 어린아이가 엄마와 아빠가 침대에서 싸우고 있다고 말할 때 우리는 그 밤중에 그 방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는데, 그것은(어른의 사랑에 대해 알지 못하는) 화자인 어린아이의 조건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어린아이의 조건을 감안하여 그것을 걷어내고 사건을 이해하는 것이다. - P143

사실 층위의 화자는 비현실적인 사건도 구체적으로 말하지만 환상 층위의 화자는현실적인 사건조차 모ㅎ하게 만하다. - P150

소설 독자들은 거울에 비추어진 현실을,
거울을 통해 일정한 형태를 부여받은 세계를 보려고 한다. - P155

거울은 세계를 비추되 자신의 감정과 욕망과 생각에 따라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고 형태를 부여해서 비춘다. 거울을 통과해 나온 세계는 거울의 반사면의 감정과 욕망과 생각)에 의해 정리되고 해석되고 재구성된 세계다. - 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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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한다는 건 희생자 한 명 한 명의 삶에 대해 계속해서 듣는 일이다. 그 목소리를 판단하거나 규정하거나 멋대로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듣는 것. 그것이 기억하는 일의 가장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삶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그들의 명예와 존엄을 지키고 유가족과 생존자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여야 하는 과제가 2024년 봄, 여기에 남아 있다. - P244

‘벌써 그렇게 되었나요?‘라고 묻는 일이 누군가에게는 상처를줄 수 있다는 사실도. - P245

*진은영, 「그날 이후」,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문학과지성사,
2022, 48쪽. 이 시에 시인이 붙인 말을 옮겨 적는다. "유예은은 2014년의 4.16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안산 단원고 2학년 3반 학생입니다. 10월 15일, 안산의 치유공간 ‘이웃‘에 예은이 부모님과 하은, 성은, 지은 세 자매, 그리고 친구들이 모여 아이의 열일곱번째 생일 모임을 했습니다. 그날은 쌍둥이 언니 하은이의 생일이기도 했습니다. 생일 모임에 참석하지 못한 예은이를 대신하여 시인 진은영이 예은이의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 P248

그런 게 혐오의 본질 아닐까.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알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무턱대고 무서워하고 싫어하는 거. - P255

이 모든 일이 한 마리의 고양이를 사랑하면서 시작됐다. - P262

할머니를 두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나는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할머니가 노쇠하고 기억을 잃어서도, 이곳에서 우리에게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만도 아니었다. 가만한 눈맞춤,
희미한 미소, 길게 이어지지 않는 대화 속에서 전해지던 애정의 여운 때문이었다. 할머니에게 받은 사랑을 조금도 갚을 수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사랑이 얼마나 불균등했는지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할머니가 읽는 일은 없을 테지만, 이 책을 할머니에게 바치고 싶다. - P272

나의 찢긴 일기장에게, 그걸 찢어 버린 어린 내 손에게, 연필을 깎던 아침에게, 아팠던 무릎에게, 나를 바라보고 매만졌던 사람들에게, 내가 애써 삼킨 말들에게, 열리지 않던 창문에게, 다정한 눈물에게, 눈물보다 부드러웠던 깊은 잠에게, 내가 사랑이라고 믿었던 모든 것에게, 젊었던 할머니에게, 상처와 치유를 주던 시간에게, 좋아하던 하늘색 드레스를 입고 밥상 앞에 앉아 있던 일곱 살의 나에게, 케이크 위 작은 촛불들과 고깔모자, 달콤한 마가렛트 과자에게, 높이 날아간 그네에게 이렇게 멀리서 인사를 보낸다. - P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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