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찮더라도,
힘들더라도 대답해주어야 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 처음에는 윤곽도 잘 보이지 않던 그림들이 윤곽을 형성해가고, 선이 분명해지고, 선명한 부분이 점차 확대되어가고, 제 몸에 맞는 색깔이 칠해지고, 그리하여 하나의 큰 그림, 소설이 완성된다. - P91

하나의 궁금증이 해결되는 순간다른 궁금증이 생기도록 하는 것.
궁금증의 지속적인 생산이 중요하다. - P95

플롯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긴장감이다.
긴장감은 끝까지 관심을 가지고 듣도록(읽도록) 하는힘이다. 긴장이 없으면 듣지(읽지 않는다. 들어도 건성으로 듣는다. - P97

소설 쓰기는 ‘기르기‘보다 ‘만들기‘ 쪽이다.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일부러 하는‘ 것이다. - P104

그럴듯하지 않은 참이 아니라 그럴듯한 거짓이어야 한다. 그럴듯하지 않은 참은 소설의 흐름에 어울리지 않거나 소설의 흐름을 방해한다. -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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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도를 만드는 작업이 더 중요하다. 설계도를만드는 데 들이는 시간이 소설을 쓰는 데 들이는 시간보다 더 많아야 한다. 말하자면, 소설을 다 써놓고 소설을 써야 한다. - P82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 - P83

치밀하고 섬세할수록 좋다. 코가 엉성한 그물에는 작은 고기가 걸리지 않는다. 축소는 하되 생략해서는 안 된다. - P83

질문들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왜? 어떻게? 한 질문에 대답하고 나면 다른 질문이 기다렸다는 듯 곧장튀어나온다. 튀어나오는 질문들을 소홀하게 다루어서는 안 된다. 질문을 멈추는 순간 대답이 멈추고, 대답이 멈추는 순간 소설도 멈추기 때문이다. 귀찮더라도,
힘들더라도 대답해주어야 한다. -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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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기가 남아 있던 시절의 모습이었다. 칠십대의 어느 날, 할아버지는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가 충동적으로 영정 사진을 찍으러 갔다. 술을 마셔서 볼이 붉어진 채로, 이런 일이 재미있다는 듯이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 P117

잊어버려도 괜찮구다. 시가가 말했다. 또 그러는 뒤에사실 우리는 대로 잊어야 하지 않는건 중요한부러라도 그래야 해 - P119

너무도 많은 사람이 아픈 사람에게 원인을 돌리면서 쉽게균열을 봉합한다. 아픈 사람에게 암을 부르는 성격이 있다고믿을 때, 아픈 사람 이외의 모두에게 세계는 덜 취약하고 덜위험해진다. 아픈 사람조차 병이 그냥 생겼다기보다는 자신이 무언가를 잘못해서 생겼다고 믿기도 한다. 불확실성보다는 죄책감이 더 편할 수도 있는 것이다." - P123

나는 빗길을 운전하면서 시간의 자비로움을 떠올렸다. 시간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일을 가능하게 한다. 축적된 경험으로 나를 일깨우기도 하고 지난 일로부 거리감을 확보하여 전체를 조망하게 하기도 한다. 내가 바꿀 수 없는 부분을 수용하게도 하고 망각이라는 진통제를 주입해주는 관대한 존재이기도 하다. 어떻게든 시간을 거스르면서 억지를 부리는 일이 어리석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하기도 한다. - P127

어떤 강아지는 자꾸만 뒤를 돌아 주인을 확인한다는 것도, 어떤 어린아이는 한 발 한 발 걸을 때마다 자신이 느끼는기쁨을 감추지 못한다는 것도 알게 된다. - P133

살림조합의 공동 창립자 추혜인은 대학교 1학년 때 성폭력상담소에서 자원 활동을 하다가 "성폭력 피해자의 입장에서 진료해줄 의사가 한 명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듣고 진로를 변경하여 의과대학에 진학한다. 대학 시절 여성주의 운동에 몸담으며 여성주의적 가치를 추구하는 의료협동조합을 계획하고 2012년 실행에 옮긴다. 그 과정에 대한 가슴 풍클한 이야기는 그녀의 책 ‘왕진 가방 속의 페미니즘」에서 읽을수 있다. - P151

"혼자 살아서 외롭지 않아?" 그런 질문을 받을 때면 나는 내가 외롭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나는 외롭다. 하지만 혼자 살아서 외로운 건 아니다. 나는 타인과 함께 살아도 더 깊이 외로울 수 있다는 걸 안다. 괴로움이 더해진 외로움은 비참하기까지하다는 것도. 적어도 지금 나의 외로움에는 비참함이 없다. - P156

나는 계속 거울을 봤다. 눈 수술은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을 고치고 나니 코도 고치고 싶었다. 그다음은..... 그다음은...... 나는 거울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 P170

더이상 나는 거울 속의 나를 보고 ‘못생겼다는 느낌‘을 받지않는다. 그렇다고 ‘예쁘다는 느낌‘을 받는 것도 아니다. 거울 속에는 그저 한 사람이 있다. 사십 년의 인생을 자기 나름대로 고군분투하며 살아온 한 사람이. 나는 이제 그 사람이 꽤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 사람의 지난 시간과 노력을 인정하고도 싶다. - P179

은희와 내가 요구받았던 착함은 수동성이었던 것 같다. 누가 때려도, 부당하게 대해도, 맞서지 말고 싸우지 말고 참고삭이며 감정이나 생각을 ‘거칠게‘ 표현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가 ‘착함‘이라는 일종의 규율로 여자아이들에게 강요됐다. - P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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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나무를 품고 있지 않은 씨앗은 없다. - P54

「해는 어떻게 뜨는가」와 「선고」는 제임스 조지프레이저의 『황금가지』를 읽다가, 「재두루미」는 설날겨울철새를 구경하려고 민통선 안으로 들어간 한지인의 경험담을 듣다가 구상하였다. - P61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다면 떠돌아다니는 것들을 떠돌아다니게 내버려두지 말고 붙잡아야 한다. - P62

일상이나 현실에 당신의 숨결을 불어넣어야 한다.
말하자면 당신만의 시각, 당신의 욕망이나 해석. - P64

무엇이 보이느냐(무엇이 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보느냐(무엇에 의미를 부여하는지)가 중요한 이유는 그것만이 글로 표현될 수 있기때문이다. - P65

호수라는 우회로를 통해 목적지에 느리게 도달하게 하는 이 지연 효과가 사용 설명서나 신문 기사와똑같은 문자의 조합에 지나지 않는 문장들을 문학으로 만든다. 은유, 돌아서 가기가 없으면 문학이 없다. - P72

신비주의자가 되지 말라. 신비주의자는 한순간에 모든 것을 뛰어넘으려고 한다. 엑스터시든 니르바나든 홀리지 말라. -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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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 앞에서는 나의 여섯번째 책이자 첫번째 에세이집이다. 원고를 묶으면서 처음 책을 냈을 때처럼 기분좋은 떨림과긴장을 느낀다. - P9

그때의 나는 내가 느끼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나 비밀스러운갈망을 철저히 감추고 덮어야 한다고 믿었다. 종이 위에 쓰지않는 한 그런 감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나를 속일 수 있었다.
쓰지 않는 한 나에게 얼룩과 그림자가 없다고 믿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쓰는 일을 멈출 수 없었고, 종이 위에서는 나를속이기가 어려웠다. 내게 존재하는 더럽고 자랑스럽지 않은감정과 생각이 나는 부끄러웠다. - P12

그때 왜 그렇게까지 소설 생각에 몰두했는지는 아직도 정확히 설명하기가 어렵다. 오랜 시간 눌러왔던 깊은 욕구가 내 의식에서 인정받자마자 한꺼번에 쏟아져나왔던 걸까. 첫 책의작가의 말에 쓴 대로 이 일을 포기한다는 생각만으로 울음이터져나오기도 했다. 사랑이라는 단어 말고는 그 상태를 설명할 언어가 없을 것 같다. 그러는 동안 공모전에 응모했지만 예심도 통과하지 못하고 떨어졌다. - P35

"나는 차가운 모래 속에 두 손을 넣고 검게 빛나는 바다를바라본다. 우주의 가장자리 같다." - P36

나를 추동하고 나아가게 하는 내 안의 이야기. 내가 선택할수 없는 삶의 방식, 쓰지 않으면약해지고 마는 나외존재. 그 모든 것이 나를 다시 앞에 서게 한다.

내가 결핍이 많은 사람이었다는 걸 밝히면서 역설적으로 그문제로부터 일정 부분 자유로워졌다고 느꼈다. 예전에는 그런이야기를 할 용기가 없었다. 누군가 내 결핍을 알아챌까봐 전전긍긍했고 나를 결핍이 많은 사람으로 평가할까봐 그렇지 않은척 애썼다. ‘애정 결핍인가봐‘ 같은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경멸당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컸던 것 같다. 결핍이라는 건내가 다른 사람들과 연결될 수 없으며 사랑받을 가치가 없다는 의미로 다가왔다. 사랑받을 가치가 없다는 느낌보다 내게더 고통스러운 건 없었다. - P63

아프면 사람의 마음은 외로움으로 기울기 마련이다. 아플때면 어쩔 수 없이 아픈 부분을 의식하게 된다. 만성적인 위경련을 겪는 사람은 위를 의식하며 살 수밖에 없다. 무릎이 아픈사람은 무릎을, 마음이 아픈 사람은 마음을 의식한다. 아프지않은 사람은 무릎이나 마음 같은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매순간 의식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데도. - P81

심지어 누군가는 내 목소리를 들어주고 있다. 이삶에서 나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산다. 이축복 안에서 내 삶은 더이상 벌이나 짐이 아니다. -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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